"천개의 고원" 번역 과정의 몇 가지 에피소드

in #kr7 years ago

질 들뢰즈와 펠릭스 과타리가 함게 쓴 "천 개의 고원"은 어렵다. 물론 부분적으로 쉬운 대목도 있고 저자들도 아무 데서부터나 읽으라고 권하고 있지만, 그건 저자니까 할 수 있는 말일 뿐 전체적으로 봤을 때 이 책은 아주 까다롭다. 역자의 입장에서도 저자를 따라 아무 데서부터나 읽으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독자들을 속이지 않기 위해 솔직히 말한다면 이 책은 정말 어렵다.


한번은 출판사에서 번역이 읽히지 않는다 하여 번역의 어떤 부분을 임의로 고쳤다. 그런데 고친 원고를 제3자가 원문 대조하여 검토한 결과 거의 역자가 원래 번역했던 상태 비슷하게 돌아왔다. 읽히지 않는 것은 원문이었지 번역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마땅한 입문서가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원전은 원전을 통해 독파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의미에서라면 이 책은 아주 다양한 입구를 갖고 있다. 수학, 음악, 전쟁, 건축, 뜨개질, 문학, 항해, 지리, 미술, 기술, 물리학, 화학, 지질학, 언어학, 경제, 장식, 기호학, 정신분석, 생물학, 정보이론 등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의 분야를 그것도 꽤나 깊이 있게 비판적으로 망라하고 있는 것이다. 독자는 자신에게 친숙한 곳을 통해 이 책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역자로서 이런 괴물 같은 책을 번역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게다가 아직도 번역은 끝나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역자가 가장 중점을 둔 것은 고른 번역 수준을 갖추는 일이었다. 위에 열거한 각 분야를 가급적 깊이 이해하면서 번역을 수행하려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전혀 무의미한 작업이 되겠기에. 그래서 번역 작업은 마냥 늦어졌다.


주위에서 여러 가지로 도와주긴 했지만 번역과 관련해서 실제적인 도움은 거의 받지 못했다. 한번은 교정지 가득 빨갛게 문제제기가 되어 돌아왔다. 하지만 실제로 쓸모 있는 지적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지엽적인 지적이거나 틀린 지적이었다. 그러나 역자로서는 혹시나 해서 일일이 원문 대조를 하느라 아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런 허망한 작업만도 몇 달이 걸렸다.


책을 그냥 상품으로만 본다면 독자들이 그 책을 가지고 무엇을 하든 상관없다. 하지만 책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다. 책이란 사상을 전달하는 하나의 외피일 뿐이다. 사상은 돈으로 살 수 없으며 삶으로 만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책에는 겸손한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 역자가 자신에게 그리고 독자에게 가장 당부하는 것이 이 점이다.


"천 개의 고원"은 자기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에게만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찾지 않는 자에게 새로운 삶은 결코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스로 만들기 전에는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삶을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뭔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뭔가 깊은 오해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 책의 궁극적 메시지는 ‘자신을 만들어라’라고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을 만드는 것은 세상을 만드는 것을 통해서만 우회적으로 완성된다. 세상은 자신의 일부이며 자신은 세상의 꼭 필요한 일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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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잘 읽었습니다
존경하는 들뢰즈 철학자님이 훌륭하게 번역하신 [천개의 고원]을 수 십번을 읽었습니다
덕분에 이어서 들뢰즈 저작들을 거의 읽은 거 같습니다
타자를 통해 자신을 만들어라!!
차이와 반복 ㆍ 생성과 긍정은 저의 화두가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설 명절 즐겁게 보내세요 샘!!!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내용 푸짐하게 올리겠습니다.

스스로 홍보하는 프로젝트에서 나왔습니다.
오늘도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의 꾸준한 포스팅을 응원합니다.

탈주 vs 도주 번역어를 놓고 벌어진 논쟁은 이런 지난한 과정에서 등장한것이었군요. 대단하십니다요 ^^

네. 그런 사연들이 있었습니다.

선생님 글을 읽으니 15년전 기억이 새록새록... 들뢰즈 관련 책으로 번역 분량만 540페이지(최종 출간물 기준^^)에 달하는 대작이었죠. 당시 번역가 겸 출판사 대표로서, 그 책의 번역을 담당하셨던 모 교수님과 함께 했던 6개월여의 콜라보... 매일 퇴근 후 새벽까지 메일로 온 교수님의 번역원고에 원서 대조 후 피드백을 달아 보내고, 논의/회신 후 확정된 원고는 업데이트하는... 다시 하라면 결코 못할 힘든 작업이었고 덕분에 출판사 경영까지 휘청거릴 정도였지만 작업 자체는 보람있었어요. 나중에 학술원 선정 우수학술도서에 선정되서 출판사 살림에도 결정적 도움이 되었고... 그리고 인생에 또한번의 전환점이 된 계기/계시인 작업이기도 했죠. "넌... 사업이 아니라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을 해야 해"...^^

오호. 흥미로운 사연 잘 봤습니다.

그냥 이해 안 가는 부분은 넘기고, 침대에서 뒹굴거리면서 읽기 편하고 재밌는 부분만 읽는건 들뢰즈 책에 대한 무례함일까요?

오오, 바람직한 태도입니다. 들뢰즈 본인도 그런 식으로 읽으면 좋다고 제안한 바 있습니다.

오 그럼 이번 기회에 어려움의 대명사였던 들뢰즈 책이나 다시 도전해봐야겠습니다 ㅎㅎ

"자신에게 친숙한 곳을 통해 이 책으로 들어갈 수 있다"

천개의 고원을 들여다볼 용기를 주시네요. 그런데 번역에 이런 지난한 과정이 있으셨다니... 대단하세요. '원문이 읽히지 않았던 것이다' 라는 말에도 끄덕여집니다. 하이데거의 책을 공부한 적이 있었는데 분명 (번역된)한국말로 쓰여있었는데 제가 아는 그 한국말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원문으로 공부하는 게 중요하고 또 번역도 무척 중요한 것 같습니다. 대단한 작업에 경의를 표합니다.

평가 고맙습니다.
사실 철학 책 읽기 훈련을 학교에서 조금만 받아 봐도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분들이 참 많을 텐데, 학교의 책임이 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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