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 문학상에 도전한다? (3/3)

in #kr6 years ago (edited)

뉴비 철학자입니다. 요즘 노벨문학상 후보로 매년 거론(누구에 의해?)되는 시인이 추문에 휩싸여 있습니다. 저는 시인에 대해서가 아니라 '노벨문학상'에 대해 말해보려 합니다.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담고 있다기보다 자료를 찾아 정리한 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총 3편으로 나누어 포스팅합니다.


노벨 문학상에 도전한다? (1/3)

노벨 문학상에 도전한다? (2/3)

노벨 문학상에 도전한다? (3/3) - 이번 글


* 전체 차례:

1. 노벨상의 유래 - 2. 노벨 문학상, 그 권위에 도전한다 - 3. 노벨 문학상의 평가 기준

4. 노벨 문학상의 선정 과정 - 5. 노벨 문학상 선정 기관, 스웨덴 한림원(아카데미) - 6. 노벨 문학상을 둘러싼 정치성과 문학성, 그 영원한 갈등

7. 노벨상에 대한 우리의 반응 - 8. 한국 문학의 반성 - 9. 한국 문학, 노벨 문학상에 도전한다


** 우리는 노벨상이 한 작가의 문학적 업적에 대한 순수한 평가로부터 주어지는 상이 아니라 상당한 정치성이 개입되어 있는 상임을 보았다. 그렇다면 한국 문학이 노벨상에 다가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한국에서 노벨상을 탈 수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 이런 물음을 '새롭게' 던져보아야 할 때이다.



7. 노벨상에 대한 우리의 반응


요즘도 크게 변한 것은 없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노벨 문학상의 계절'이라는 것이 있었다. 신문과 출판사 그리고 서점을 중심으로 그 해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와 그의 작품에 대해 요란하게 떠들어대는 목소리가 있었으며 여러 종류의 번역본이 등장하곤 했다.


한 계절 동안 노벨 문학상 수상 작품을 두고 신문과 출판계가 보이는 과민 반응은 문학을 위해 기여하기는커녕 오히려 역기능으로 작용하는, '객적은 헛소동'일 뿐이다. 이런 사태를 두고 유재용 씨는 '세계 미인 선발대회'와 흡사하다고 평하고 있으며, 이내수 씨는 서구에 대한 문화적 사대근성을 노출'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힐난한다.


사실 수상자가 터무니없이 잘못 선정되었다거나, 선정 과정에 무슨 문젯거리가 될 만한 사건이 개입되었다든가 하는 경우 말고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결정했다는 사실 자체는 조금도 떠들썩한 보도 대상이 아니다. 문학 자체가 센세이셔널한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실을 알리고 거기에 약간의 해설을 곁들인 기사면 충분하다. 언론의 소임은 수상자를 일반에게 소개하는 것으로 족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광적인 노벨상 열기의 밑바닥에는 우리나라 사람들, 특히 지식인들의 자격지심이 깔려 있다. 노벨상 열기가 조성된 것은 애초에는 이루고 싶고, 소유하고 싶고, 정복하고 싶지만 능력이 미치지 못해, 도달할 수 없는 거리 저편에 있는 것에 대한 선망에서 비롯되었다 할 수 있다.


이러한 자격지심은 일반인들의 통념과 다를 바 없다. 일반인들은 노벨 문학상을 소박하고 단순하게 문학의 수준을 가늠하는 최고의 척도로 보려 한다. 마치 어떤 상품을 대상으로 하여 '세계 제일', '세계 최고' 하는 식으로 정도를 가늠하듯이, 문학 작품도 그런 식으로 인식하려는 발상이다. 여기서 우리는 결국은 우리네 지식인들도 문학을 이런 식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교육도 이런 현상에 큰 책임이 있다. 우리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교육과 학구열의 성과로서 다다를 수 있는 극치가 노벨상인 것처럼 은연중 학습되어 왔던 것이다. 노벨상을 탈 수 있는 생애야말로 가장 성공한 생애라는 식으로. 아직도 텔레비젼 광고에서 '노벨상을 목표로' 살자는 얘기가 호소력을 가지면서 방영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노벨상을 마치 올림픽 경기와 비슷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정부의 일시적이고 집중적인 지원을 통해서 과학적으로 체력과 기술을 향상시키기만 한다면 노벨상이라는 금메달을 딸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한 나라의 정신 문화는 단시일 내에 향상되는 것이 아니다. 문화란 고급 포도주처럼 오랜 시간 길러지고 보호되고 발효되고 숙성되어야 제 맛을 낼 수 있다.


대개 문화라는 것은 빙산에 비유될 수 있다. 물 속에 잠긴 거대한 부분을 전제로 할 때에라야 물 밖으로 약간의 노출된 부분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의 전반적인 문화 수준이 탄탄히 다져졌을 때라야 비로소 훌륭한 문학 작품도 나올 수 있을 거라는 얘기다.


스페인의 사상가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훌륭한 정치가는 국민의 열망이 만들고 훌륭한 예술가는 독자의 소망이 이룩한다'고 이야기한다. 이 말은 결국 우리의 문화적 소양이 성숙했을 때에만 훌륭한 예술가와 훌륭한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이다. 조금 난해하고 거부감이 일더라도 그것을 인내하면서 작품을 이해해 보려는 그런 사랑의 능력을 가진 독자가 많아져야 한 문화는 고도의 성장을 이룩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 노벨 문학상에 대한 막연한 환상에만 집착할 뿐 실제로 작품을 창작, 번역하고 홍보하는 일에 소홀했기 때문에, 그리고 더 나아가서 훌륭한 작품이 나올 수 있는 토대를 형성하는 일에 게을렀기 때문에, 수상 가능성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 냉정한 분석이라 할 것이다.   


사실상 한국 작가도 몇 번인가 노벨 문학상 후보로 추천된 적이 있다. 통상적으로 추천 사실을 비밀에 붙이게 되어 있기 때문에 정확히 누가 언제 추천되었는지를 안다는 것은 몹시 힘들다. 이례적으로 최인훈 씨가 1992년 후보로 추천된 사실이 밝혀졌을 때 많은 얘기가 떠돌았던 것도 이러한 사실 때문이다.


기존에 추천되었던 작가 말고도 황순원, 이청준, 이문열, 박경리, 한용운, 한강, 윤동주, 김소월 등이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곤 한다. 하지만 이들이 과연 노벨 문학상을 탈 수 있을 것인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그것은 이들이 훌륭한 작가가 아니라서가 아니라 이들의 훌륭함을 알리기까지는 아직도 넘어야 할 벽이 많기 때문이다(게다가 노벨상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수여된다).



8. 한국 문학의 반성    


한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문학과 노벨상과의 거리를 단축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스웨덴 아카데미 회원인 안데르스 리베르그는 서구 여러 나라와 문화적 교류를 가질 것, 이를 위하여 정부가 적극 지원할 것, 그리고 작가들의 의욕과 정열이 뒷받침될 것 등 우리 문학이 해결해야 할 몇 가지 과제를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여기에 빠진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어서 언급할 필요조차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우리 문화의 토양이 성숙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 바닥 사람들의 삶을 개선시키는 문학이어야지 노벨상을 기준으로 문학의 가치를 재려는 것은 얼마나 터무니없는 식민주의적 발상이냐'라는 소설가 박태순 씨의 지적에 주목해야 한다.


이 지적은 '검사나 의사를 향한 선망보다 몇 배의 선망과 동경을 예술가를 향해 보는 풍토가 이룩될 때 우리는 훌륭한 예술가를 더 많이 가질 수 있고 더 풍요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라는 장명수 씨의 지적과 일맥상통한다. 다시 말해 우리 나라 사람 대다수가 예술(문학)이 무엇이고 삶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성찰하는 자세를 가질 때 비로소 훌륭한 예술 작품이 탄생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문학 작품을 작가의 의도로 환원시켜 해석하는 버릇이 있다. 하지만 작가의 의도란 작품의 몸뚱아리를 이루는 많은 요소들 중의 단지 하나에 불과하다. 작가가 사용하는 언어, 건강, 분위기, 전통, 독자들, 심지어는 작가가 사용하는 필기도구(볼펜, 만년필, 타자기, 워드프로세서 등)까지도 하나의 작품 탄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한 작가의 의도는 백 년을 넘기 어렵지만 위대한 작품의 수명은 수천 년을 지속하는 것이다.


이처럼 문학이란 작가가 좌우할 수 없는 우연 속에서 탄생하기 때문에 문학적 작업, 예술적 작업이란 더더욱 지난하다. 거기에는 멜빌의 "모비딕"에서 에이허브 선장이 일생을 바쳐 흰 고래를 잡으려 했던 그 열정과 처절한 싸움과 집념과 탐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그 작업에 동참하지는 못할망정 그 작업을 지켜보고 지켜줄 자세가 되어 있는가를 한 번 자문해보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보면 언론은 스포츠나 연예 기사에 비해 문학 기사를 지나치게 푸대접한다. 대중들이 그것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은 언제나 대중들의 관심을 따라가는 법이다. 그러나 일제 말기의 신문은 상업성에 영합하면서도 문학 기사에 상당한 비중을 두었으며, 그런 공로는 우리 문학사가 소중히 기록하고 있다. 우리의 반성을 요하는 대목이다.


여기에 외적인 요인 한두 가지를 덧붙일 필요가 있다. 우선 한국 근대 문학의 여명기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과연 위대한 문학이 나올 만한 여건 하에서 문학 활동을 해왔는가 자문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 여건이란 물론 '표현의 자유'이다. 우리 근대 문학은 검열 속에서 출발하여 검열 속에서 자라왔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일제하에서 우리는 총독부 검열관의 색연필을 통과해가며 'XXX'니 '△△△'니 'OOO'니 하는 식으로 된 기묘한 문장을 쓴 경험이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해방이 되어서도 시국의 변화나 정세의 추이에 따라 검열과 출판금지 사태는 계속되어왔다.


또한 번역을 소홀히 대해왔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오늘날 영미 시의 혁명은 피츠제럴드의 "루바이아트" 번역과 에즈라 파운드의 "캐세이" 즉 중국 당시(唐詩) 번역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번역은 학문이면서 예술이다.


이미 괴테도 '유사성'>이라는 시에서, 번역이 마치 꽃을 꺾는 일과 같다고 말함으로써 한 작품이 가지고 있는 원래의 생명력을 죽여버리는 일이라고 보면서도 동시에 훌륭한 번역은 그 꺾은 꽃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이라고 번역 행위의 의미를 평가한 바 있다.


그러나 우리는 번역을 천시하는 인습을 가지고 있었으며 지금까지도 그것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다. 외국 작품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이나 우리 작품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일 모두를 너무 홀대해왔던 것이다. 심지어는 노벨 문학상 수상 작품이 졸속 번역됨으로써 우리의 오역 문화의 병폐를 기르는 온상이 되기까지 했다.


이처럼 번역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해서 거기에 이상한 방식으로 신경을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우리의 우수한 작품들이 훌륭하게 번역되어 외국에 널리 소개되는 것은 이론의 여지없이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노벨 문학상을 타기 위한 분위기 조성을 목적으로, 그 목적이 첫째 이유가 되어 번역 사업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번역은 어디까지나 한국 문화의 토양을 살지게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9. 한국 문학, 노벨 문학상에 도전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노벨 문학상의 역사를 몇몇 일화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역사를 살펴본다는 것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돌이켜봄으로써 단지 우리의 지식을 넓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 있을 때 거기에는 반드시 여러 가지 권력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노벨 문학상의 수상자를 선정하는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그 상이 정치적, 경제적 강자들의 역학 관계 속에서 놀아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이때 역사를 정확히 바라본다는 것은 하나의 사건에 연루되어 있는 권력들이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를 정확히 해석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순수한 사건이란 없다. 사건이란 그 사건을 겪고 바라보는 자의 해석을 통해서만 의미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한 사건의 의미는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이 처해있는 조건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우리는 해석자의 입장에서 어떤 사건을 바라볼 수밖에 없으며, 해석하고 평가하는 자의 자리를 영원히 떠날 수 없다. 자신이 객관적인 위치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헛된 망념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자기 자신만이 유독 특별하고 예외적인 해석을 할 수 있는 자리에 있다는 주장에 불과하다.


노벨 문학상과 한국 문학을 연관지으려고 노력할 때마다 우리는 이런 점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사태를 좀 더 냉정한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늘 했던 불평을 다시 늘어놓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한국 문학은 지금까지 무엇을 했느냐, 일본도 두 번이나 노벨상을 탔는데 우리는 왜 못 타고 있느냐 하는 비판의 목소리이건, 언제쯤이면 우리도 노벨상을 탈 수 있을까, 우리도 곧 노벨상을 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의 목소리이건 간에, 놓치기 쉬운 점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자세히 살펴보았듯이 노벨 문학상은 한 작가에게 주어지는 상이라기보다는 한 나라의 국력에 주어지는 상이다. 이때 말하는 국력은 문화적인 힘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일차적으로 정치적, 경제적인 힘을 의미한다. 이렇게 볼 때 한국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를 기대하거나 예상하는 일은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더 나아가서 수상을 희망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노벨 문학상은 대체로 수상자 모국의 정치적, 경제적인 지위를 반영하는 것일 뿐 진정한 문학적 업적에 대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상 정치적 경제적인 힘을 반영하는 지표는 노벨 문학상 말고도 여럿 있다. 군사력이니 무역수지니 국민총생산(GDP)이니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사실상 노벨상은 기다리면 언젠가는 탈 수 있다. 우리의 정치적 경제적인 힘이 성장하고 서구인들의 안배가 한국에 미치지 않을 수 없게 될 때가 되면 한국 작가들 중 누구에게라도 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일단 한국 작가를 선정하겠다고 맘을 먹고 나면 어디 줄 만한 사람이 없겠는가. 그러니 이런 상을 기대하고 예상해보고 희망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희극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우리가 노벨 문학상을 가치롭게 여겼던 것은 그것이 문학적인 업적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반영한다는 환상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하지만 노벨상이 문학성과는 관계가 없는 상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잣대로 우리의 문학이 이룬 업적을 얘기할 수는 없게 된다. 다시 말해 노벨 문학상을 두 차례나 수상한 일본과 한 번도 수상하지 못한 한국의 문학적 성취도는 노벨 문학상이라는 잣대로 비교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대해 반론이 있을 수는 있다. 그 반론은 노벨상을 수상한 작가들의 작품이 위대한 문학적 성취를 이뤄냈다는 점을 근거로 삼는다. 노벨상 수상자를 몇 명이나 배출했느냐 하는 것이 한 나라의 문학적 성취도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반론은 우리가 노벨 문학상의 역사를 한 번 일별해보기만 해도 여지없이 무너질 운명에 있다. 노벨 문학상이 놓친 위대한 작가들을 우리는 얼마든지 열거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서 자세히 밝혔다고 본다.)


방금의 예에서 우리는 우리가 노벨 문학상의 역사를 살펴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처한 위치를 그 역사 고찰로부터 배울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선 우리도 노벨 문학상을 타야겠다는 헛된 기대를 버릴 자세를 갖춰야 한다. 더 나아가서 노벨 문학상을 타야겠다는 욕심을 더 좋은 문학 작품을 낳아야겠다는 결심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 결심을 우리 문화의 토양 전반에 대한 반성으로 확대시켜야 한다. 그것이 노벨상의 역사를 고찰한 더 큰 의의가 되어야 한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강대국이 된다는 것과 문화적으로 힘있는 나라가 된다는 것은 밀접한 관계에 있지 않다. 한국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아직까지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가 문화적으로도 후진적인 위치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자조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실상 문학 작품이란 국위를 선양하기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훌륭한 문학 작품이 만들어지면 결과적으로 국위선양에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한국 문학이 노벨 문학상에 도전한다는 과업은 한국 문학이 인류에 기여를 하는 훌륭한 문학 작품을 낳아야겠다는 과업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색하는 일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우리가 해 온 역사적 고찰의 진정한 의미는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옥타비오 파스는 사랑이란 '자유롭게 선택하는 현기증'이라고 말한 바 있다. 우리는 문학 속에서, 예술 속에서,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서 이러한 사랑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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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홍보하는 프로젝트에서 나왔습니다.
오늘도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의 꾸준한 포스팅을 응원합니다.

훌륭한 글 잘 읽었습니다!!!
존경하는 들뢰즈 철학자님
노벨상 수상은 그 나라의 총체적인 문화적 역량에 비례한다고 믿습니다
기초과학분야나 번역 등에 장기적인 투자와 지원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일본의 사례와 같이 한 우물을 파는 장인정신을 본받고 그들을 적극 지원해야겠습니다
앞으로 후속 글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장기적인 투자와 노력이 필요한 일이지요.
총체적 역량의 발전이 중요합니다.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한국 문학이 인류에 기여를 하는 훌륭한 문학 작품을 낳아야겠다는 과업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라는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일단 노벨상 수상을 해서 명성이 올라가면 그다음 발전은 뒤따라 올 것이라는 생각보다 밑바닥 기초부터 차근차근 쌓아올리겠다는 생각이 필요합니다. 문학상 수상은 결과가 아닌 중간 과정일 뿐이지요.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도 훌륭한 번역가를 만났다고 들었고, 맨부커 인터내셔널의 경우 작가와 번역자에게 같이 수상을 하는 방식입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번역청을 설립해야한다는 의견도 요즈음 나오고 있는데, 특히나 번역에 대해서 좀더 관심을 많이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노벨 문학상의 경우 정치적인 이데올로기, 지역별 수상 분배에서 벗어나기 힘들며, 이러한 선정 위원의 사고방식이 갈수록 다른 문학상들과 확연한 괴리를 보이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네, 말씀하신 그런 생각을 해서 작성한 글입니다. 한국문화와 한국어의 총체적 역량이 모여야 이루어낼 수 있는 일이지요. 기초체력부터 길러야 하겠습니다.

갓난스티미언입니다...30년전입시면접서국문학과지원동기를질문받고...사르트르처럼노벨문학상을거부하기위해서라고답했죠...다분히쪼다스런객기이상도이하도아닌답변이었습니다...ㅋㅋ그냥생각이나네요과거의국문학도에게좋은글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국문학을 하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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