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한의사의 불편했던 비즈니스 매너 - 자존심을 세워야 하는 진짜 이유

in #kr6 years ago (edited)

나는 한의학이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지만 그와 별도로 그저 위약효과라고 치부하기에는 내 몸에는 제법 잘 받는 편이다. 내게는 거의 10년 가까이 방문한 한의원이 있다. 내 담당 한의사에게 진료를 받기 위해서는 기본 한 시간, 때로는 두 시간도 기다려야 한다.

그 한의원에는 다른 한의사들도 있다. 모두 원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그저 클라이언트들에게 좀 더 규모가 있어보이고 싶어 모인, 직원과 임대료 정도만 공유하고 다 별개인 별산제 법무법인이 그렇듯, 실은 매출은 다 제각각으로 산정되는 그런 곳이 아닌가 싶다.

어느 날 저녁 약속 전 한의원을 들렀고, 담당 한의사 선생님의 줄이 평소보다도 긴 것을 본 나는 마냥 기다릴 수 없어, 다른 ‘원장’ 한의사에게 진료를 받는 길을 택했다.

다른 ‘원장’ 한의사의 방에 들어가자, 나보다는 나이가 많아 보였지만 한의사 치고는 아직 ‘새파란’ 젊은 남자 하나가 앉아 있었다. 이렇게 말해봤자 똑같이 젊은 나이에 개업한 전문직인 내 얼굴에 침 뱉기지만 나는 술을 같이 먹으면 형 소리가 절로 나올 젊은 의사 선생님이나, 소개팅에서 같이 스테이크를 썰고 있어도 전혀 위화감이 들지 않을 새초롬한 여자 치과 의사들은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이 한의사라는 사람의 분위기는 어딘가 불안정해 보였다.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다짜고짜 물었다.

“원래 오△△원장님께 진료 받으셨네요?”
“네 그렇습니다.”
“저를 찾아오신 걸 보니까 뭔가 진료에 아쉬운 점이 있으셨나보군요.”

그게 아니라 기다리는 줄이 길어서 일회성으로 당신에게 온 것이고, 앞으로도 나는 오△△ 원장님께 진료를 받을 거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 했다. 내가 묵묵히 앉아있자 자기 말에 대한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그 젊은 한의사는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부으며 자신의 진료 철학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 이제 진료법을 바꾸어보겠습니다!”

아마 암 세포를 절개하거나 하다못해 썩은 이빨의 신경 치료라도 받는 ‘대수술’이었다면 나는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고작 침을 맞는 거니까, 나는 결례를 저지르기 싫어, 그냥 형 소리 나는 그 ‘애송이’ 한의사에게 침을 맡기로 했다. 진료 기록에서 내가 1년에 두 번씩 비싼 한약을 지어먹는, 나이에 비해 A급 고객이라는 걸 보아서일까, 침을 놓는 한의사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고, 그는 침을 놓다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다. 팔에서 피가 철철 났다. 으으윽.

몇 달 뒤 그 한의원을 다시 갔을 때 나는 그 한의사의 명판이 사라진 것을 보았다. 그게 거진 5년 전 일이니까 지금쯤이면 어디 뽀얀 얼굴을 감추기 위해 두꺼운 돋보기안경이라도 쓰고 다른 곳에서는 영업을 잘 하고 있겠지.

그래도 그 사람은 그래도 그런 실수가 아직 양해가 되는 나이였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도, 고객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아쉬움에 이런 실수를 하는 사례는 흔하다.

사실 비즈니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갑이고 을인지 파악하는 것이다. 자기가 을인 사람, 상대방에게는 선택권이 많지만 자신에게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공연히 자존심을 세우는 사람들이 있다. 하물며 남녀 관계조차도 더 아쉬운 쪽이 숙이는 것이 일반적이고, 그렇지 않은 쪽이 알아서 대접해주길 바라며 자존심을 세우는 것도 웃긴데, 비즈니스에서 시커먼 남자가, 그것도 실은 이미 상도의 잔뼈가 굵었어야 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잰 체하며 ‘여자어’를 쓰고 상대방이 맞추어주길 맥 빠지게 기다리는 경우도 의외로 많이 보았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자신이 아쉽다는 걸 또 너무 쉽게 드러내는 사람들도 있다. 사람은 자기 자존심을 치켜세워주는 것은 좋아하지만 자기가 돈 나가는 일을 무능한 사람에게 맡기는 것은 싫어하고,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던져 버리고 비굴한 것은, 짧은 인상만으로 상대의 능력을 판단해야 하는 비즈니스 필드에서, ‘무능함’으로 판단되는 경우가 많다. 일감이 없어서 초조해 보이는 사람에게 자기 중요한 일을 맡기고 싶을 턱이 있나.

거기다 격 없이 매달리는 상대는 일단 불편하다. 예전 방문한 동네 목욕탕에서 아버지뻘 아저씨가 바닥에 걸레질을 하다가 그 걸레질 하던 자세 그대로(무릎을 꿇고) 나와 내 친구에게 조근조근 자기 목욕탕을 홍보하는 것을 듣고, 부담스러워 다시는 그 곳을 방문하지 않았다. 단골을 만들려는 의도였을지, 어떤 나이 지긋한 대리기사가 내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쓰는 것을 보고 몸에 소름이 돋은 적도 있다. 반말로 꼰대 짓을 했다면 그것도 그 나름대로 다시 찾지 않을 이유가 되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까지 불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을이 자기가 을인지 모르는 것도 웃기지만 을이 너무 아쉬운 모습을 보이면 갑도 갑 나름대로 부담스럽다. 재촉하지 않으면 느긋하게 더 관찰하고 기다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을이 초조해하는 게 보기 싫어 일찍 비토를 놓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비즈니스에서 약자는, 대접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를 대접하기 위해, 즉 편하게 만들기 위해 적당히 자존심도 세울 줄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소위 자신감과 여유인 것이다. 이건 연기로 되는 것이 아니라, 눈 앞의 욕망에 적당히 초연해볼 수도 있는 정신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를 위해 썼고, 쓰고 보니 역시 어려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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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게 하는 글이군요.

ㅎㅎ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에 읽은 책의 한 페이지인데 일본 교토의 상점가 주인들은 자기 가게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손님들도 가게이 들어설 때면 실례지만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하는 정중한 태도를 가진다고 합니다.
"커피 나오셨습니다."라는 말까지 하는 한국의 문화가 그들에겐 이해가 가질 않겠죠.

그 자부심이라는 게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의 곤조가 아니라, 아마 모든 것의 종합적인 비즈니스 철학의 결정체가 아닐까 싶습니다 ㅋㅋㅋㅋ

물론 한국 가게가 제일 친절하고 해외 나가면 그냥 아무 것도 없이 마냥 불친절하기만 한 경우도 흔하지만, 철학 없이 친절하기만 한 것이 옳을까 그것도 궁금하네요 ㅎㅎ

네 , 일본의 오래된 가계들은 대를 이어서 몇 십 , 몇 백년 하는 곳들이 많으니 그런 자부심이 가능하지 않나 싶습니다.

소비자에게 최대한의 친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좋으나 그것은 갑질과는 구분되는 것이야겠죠. ㅎㅎ

맞습니다. 을이 품위를 지키면서 을 역할에 충실하면 갑은 더 흡족하지요. 품위있는 을 위에 선 자신이 되니까요.

바로 정답인 것 같습니다 ㅎㅎ

저래서 을 생활을 제대로 하기가 어렵죠. 갑이 부담스럽지 않게 잘 띄워주는건 대단한 스킬입니다.

그러게요 ㅋㅋㅋㅋ 그냥 티 나게 아부하는 건 오히려 마이너스고 ㅎㅎ 말씀하신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저도 초보 한의사로 진료할때 비슷한 실수를 해봐서 더 와닿네요... 잘 읽었습니다.

ㅎㅎㅎ 한의사님이셨군요 혹시 제가 쓴 글 어딘가가 불쾌하지 않으셨기를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을에게도 을만의 자존심은 필요하군요
잘읽고가용

오늘도 읽어줘서 고마워요 찡여사 ㅋㅋ

사람 상대하는 건 언제나 어려운 일이죠.

그게 제일 중요하고 제일 어렵죠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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