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랜드와 바카라의 추억

in #kr5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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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에 미리 밝혀두지만 별로 재미있는 글은 아니다.

강원랜드에서 전재산을 잃었다거나 또는 꽃뱀이나 조폭을 만났다면 꽤 극적인 글이 나올지도 모른다만 나는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았기에. 또한 오랜 시간을 보내지 않은터라 글도 짧다.

강원랜드를 방문했던 것은 딱 2년 전으로, 직장을 옮긴 그 가운데 시간이 비어서였다. 나중에 통장에 들어온 돈을 보고 꽤 실망하긴 했다만 돈 많이 주기로 유명한 모 직장으로 이직도 하게 되었고 3년 간 일한 직장의 퇴직금도 받은 상태였다. 마카오에서 비행기 표 값을 벌어온 추억도 있어 한 번은 더 카지노를 가보고 싶었고, 그래서 뭔가 돈과 시간이라는 두 가지가 확보가 되었다고 착각(?)한 덕분에, 악명 높은 강원랜드에 몇 일 있어보기로 했다.

서울에서는 그리 흔치 않은 전당포들과 귀금속 거래소들을 거쳐 가니 강원랜드가 나오더라. 건물 외관은 나쁘지 않았다. 근데 안으로 들어가니 경마장이나 경륜장을 갔을 때 맡았던 것과 똑같은 냄새가 나더라.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이 냄새는 패배자(loser)들의 냄새다. 씻지 않은 중년 남성의 땀 냄새와 술 찌거기, 그리고 담배 냄새 혼합된, 그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못 생기게 태어난 건 죄가 아니고, 운이 나쁘면 열심히 살아도 돈이 없을 수 있다만, 적어도 사람은 자기 몸에 나는 냄새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넓은 공간 자체가 이 냄새로 가득한 것이, 원체 자기 삶에 책임질 의향은 없는 인간들이 군집했다는 증거는 아닐까 싶다.

들었던대로 창문은 없었다. 밖이 어두워졌다는 걸 알 수 없게 해야 더 게임에 집중할 수 있어서라고 들었다. 카운터에 만쥬 박스가 있길래 배가 고파서 14,000원에 하나를 샀는데 알고 봤더니 그 만쥬 박스를 14,000원에 파는 게 아니라 빵집에서는 1,000원이면 파는 그 만쥬 하나를 14,000원에 팔고 있는 거였다.

14,000원짜리 만쥬까지 먹었는데 테이블이라도 잡아서 게임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여름 성수기에 간 터라 테이블은 앉을 수 없었다. 원래 이런 데 오면 눈팅 좀 하고 움직여야 하는데, 테이블에 빈 자리가 있길래 환전한 칩을 들고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가 욕을 먹고 말았다. 성수기에는 오래 전부터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도 테이블에 앉을 수는 없었지만 뒤에서 돈을 걸 수는 있었고, 그래서 이 게임 저 게임을 해보았다. 하는 행동이 어설퍼보였는지 바로 훈수가 들어왔고 훈수대로 몇 번 해보았다. 물론 기대도 안 했고 결과도 그닥.

도박의 왕이라는, 바카라라는 게임을 제일 많이 했는데 재미는 있더라. 설명하자면 뱅커와 플레이어 둘 중 하나의 승리에 돈을 거는 것이다. 룰은 특별히 더 설명할 것이 많지 않다. 속도가 빠른 게 한국인들 정서에 맞는 게 아닌가 싶다. 다만 승률은 모든 도박 중에서도 제일 낮아(수학적으로 오래 반복하면 반드시 손해를 보게 되어 있다), 적당히 미운 놈은 때리고 정말 미운 놈은 바카라를 가르치라는 격언이 있는 게임이다. 1박 2일 동안 거의 바카라만 한 것 같다.

기억나는 순간이 몇 개 있다. 한참 바카라로 순조롭게 돈을 따고 있었다. 근데 잠깐 화장실을 간 사이, 내가 하는 바카라 테이블 말고 다른 테이블에서, 뱅커의 승률이 무려 70%를 넘고 있었다. 그것도 수백번 이상이 진행된 게임에서 말이다. 나는 도박사의 오류(동전 앞 면이 9번 나왔으니 다음 번은 반드시 뒷 면이 나올 거라고 믿는 오류)를 알고 있었지만, 수학적으로 동률이 나와야 하는 이 게임에서 한 쪽의 승률이 70%를 넘고 있는 이 순간이 어떤 기회인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돈을 잘 따고 있던 테이블을 옮겨서 거기로 옮겼고 그때부터 주구장창 플레이어에 걸었다.

결과는 감대로 찍었을 때보다 훨씬 안 좋았다. 뱅커는 거기서 연속으로 16번을 더 이겼다. 계속해서 플레이어에 걸었던 내 베팅의 누적 수익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가만 보니 홀이나 짝이나, 레드나 블랙이 스무 번 연속으로 나오는 것도, 도박장 전체에서는 매우 흔한 일이더라.

오래 전, 모두가 열심히 준비하는 시험에서 똑같이 열심히 공부해서 법조인이 되는 것 사이에 논리필연성이 있냐는 그 자문에, 도박사의 오류라는 것이 있기에 계속 떨어져도 또 떨어질 수도 있지만 수가 반복되다 보면 계속 앞면만 나올 가능성은 지극히 낮기에, 그래서 계속 준비하고 반복하다 보면 될 수 밖에 없다 이런 다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아 그게 아니라 그냥 운이 좋았던 거구나. 인생에서 확률 게임에 자기를 넣는 사람은 무수고 앞면이 열 번이 아니라 스무 번이 나오는 것도 한 개인의 삶에서는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니겠구나, 그 생각들었다. 바카라 게임에서 뱅커와 플레이어의 승률이 딱 동률이 되는 것은 한 만 번은 돌려야되는 것 아닐까...... 물론 한 개인은 인생에 어떤 아젠다를 만 번 돌려볼 수는 없다. 그래서 운칠기삼을 넘어 운구기일이라고 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아마 바카라로 돈 버는 놈도 있을 것이다. 만 번 씩이나 할 시간은 없으니 누군가는 16번의 뱅커에 편승해 성공했을 수도 있지. 80세 성공한 투자자라고 그게 전부 자기 실력으로 볼 수 있는 게 맞는가 싶기도 하다. 혹은 본인이 의지로 확고하게 붙잡아 둘 수 있는 것은, "사실 이건 내 실력이 아니었어."라는 그 생각을 안 까먹는 것 정도가 아닐까. 김성근이 한화에 도전하지 않았다면 죽을 때까지 명예를 지킬 수 있었을텐데. 시사점이 많다. 이미 나온 성과를 두고 다 운이라고 말하며 비즈니스를 까먹을 이유는 없지만 자기 자신에게만은 솔직해야 할 때가 있는 것 같다.

바카라 게임장에는, 큰 종이에 뱅커와 플레이어의 승리 숫자를 볼펜에 열심히 기록하며 나름 승부를 걸어보려는 사람들이 많더라. 이런 비슷한 광경은 경마장에서도 보았다. 그 중 게임기를 하나씩 점하고 열심히 도박을 하던 한 부부가 가장 기억이 난다. 대화를 통해 유추해볼 수 있듯, 그들은 생존 바카라를 하고 있었다. 근데 꼴에 남편이라는 작자는 그래도 남자라고 다음에 뭐가 나올지 모르는 바카라 게임을 두고 자기 아내한테 맨스플레인을 하고 있더라. 근데 딱히 여자도 더 정신 박힌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워낙 예외도 많기에 진리까지는 아니고, 그냥 배우자를 보면 그 사람의 수준도 알 수 있다는 반 정도 맞는 반(半)진리를 적나라하게 보았던 순간이다. 그 부부가 나누는 대화에 호기심이 생겨 원래 있으려던 시간보다 다섯 시간을 더 있었고 덕분에 더 잃었다. 그래서 그 부부 면상을 떠올리면 더 짜증이 난다.

나는 꽤 돈을 잃고 강원랜드를 나왔다.

"난 1박 2일로 도박에 대한 교훈을 꽤 얻고 나왔고 다시 안 할 셈이다. 수고들 해라 똥멍청이들아."

이런 건방진 말 따위는 하지 않는다. 인생에서 끔찍한 일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사람이 겪는 끔찍한 일이 언제든 내 것이 될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을 늘 인지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일이든 사랑이든 투자든 간에 말이다. 강철 같다고 불리는 사람이라도 마취 없이 이빨을 뽑거나 불에 태우면 고통스럽게 비명 지르게 될 것이고, 냉철한 인간도 이상한 약을 몇 번만 맞으면 저능아처럼 된다. 인간은 원래 그렇게 약하고 별 볼 일 없는 존재다.

카지노와 바카라는 재미있었지만 반복해서 하게 할 유혹은 되지 않았다. 다만 어느 분야에서 그런 일이 생길지는 정말 모르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어딘가 내가 경멸했던 이 모든 실수를 반복하는 일이 생길 것을 우려해, 이 글을 남긴다. 어느 분야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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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류형의 값진 경험으로 나는 절대 강원랜드에 가지않겠어!!
나는 몸에서 꽃냄새가 나는 사람이니까!!

음? 그때 뵈서 인사까지 하지 않았었나요?

@admljy19님의 글은 조리가 있으면서도 재미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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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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