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소녀와 6년 뒤 부서진 백미러

in #kr6 years ago (edited)

서른으로 열심히 달려가던 6, 7년 전 일이다.

온라인으로 연락하던 10대 소녀가 있었다. 정말 우연치 않게 알게 되었고 처음에는 아무 사심이 없었다. 언어에 욕심이 없어서였을까, 우리 둘은 많이 친해졌다. 그녀가 삐뚤빼둘한 손 글씨로 노란 편지지에 쓴, '이렇게 좋은 분을 알게 되다니 앞으로 더 착하게 살아야겠어요.' 라고 적힌 그 편지를 아직 가지고 있다. 답례로 나는 당시 유행하던 브랜드의 운동화를 사서 선물로 보내주었다.

나중에 실제로 그녀를 만나보게 되었다. 아직 포근한 봄날, 강원도의 작은 소도시, 수수한 개나리 꽃이 펴 있던 장난감 같은 도서관 앞에서 그녀를 처음 보았고 반나절 동안 시간을 같이 보냈다. 그녀는 내가 선물한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나는 내가 곧 넥타이 맨 유능한 키다리 아저씨가 될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만, 그때는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조금은 덜 면목이 없을 거라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남들 다 붙던 시험에 홀랑 떨어진 덕분에 신림동 고시생이 되었고 그녀는 남자 친구가 생겼다.

한동안은, 그녀는 연애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만큼 내게 자주 연락했다.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 원래는 썩 좋아해서 사귄 게 아니었던 그 남자에게 그녀가 푹 빠져버린 것을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었다. 예상과 달리, 가장 어려웠던 시기의 보잘 것 없던 아저씨에게 여전히 보여주었던 한동안의 관심과 애정이 기뻤고, 당초 예상대로 그것이 사라져서 서글펐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그녀의 상태 메세지와 목소리에서 기묘한 것을 읽었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보았다. 답은 내가 추측하던 것과 같았다. 그녀는 남자 친구의 아이를 임신해서 어쩔 줄 몰라하던 상태였다.

나는 그녀가 남자를 매우 좋아한다는 것, 가장 예민한 시절 부모님이 이혼했던 탓일지 동그랗고 사랑스러운 인상과 달리 심리적으로 결핍이 있다는 것을 원래 알았다. 그것은 그녀의 잘못이 아니다. 계획에 없던 임신을 하는 것은 나이 든 어른들도 흔히 하는 실수다.

내가 슬펐던 것은, 그녀가 잔인할 정도의 무책임했던 그 남자 친구에게 임신한 그 시점에도 완전히 휘둘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남자는 금전적인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했다. 내가 보았을 때는 그 여자 아이가 유일한 여자 친구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남자 친구가 사랑하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과 네 탓이라는 질책 사이에서 갈팔질팡하고 있었다. 하다 못해 그 새끼가 웹 소설 남주처럼 잘 생기기라도 했다면 좀 덜 억울했을텐데.

당시 신림동에서 고시 식당이나 전전하며 제 몸 하나 간수하지 못하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돈을 주었다. 몇 달 간 나를 행복하게 해준 것에 대한 대가였고 동시에 절연금이었다. 나는 돈을 건내주며 군 복무 시절 내 뒷담화를 하다가 걸린 후임을 갈굴 때보다 더 심하게 몇 시간 동안 잔소리를 했다.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는 모르겠다. 그때 분위기조차도 이제는 남긴 글을 통해 유추해볼 수 있을 뿐이니까.

너가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앞으로 더 관망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간 감정을 정리하며 짤막하게 보상받고 싶었다.

여전히 네가 친구라고 믿는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이제 없다고 판단한 이상 더 소모할 감정은 없다. 해줄 수 있는 것은 다 해주었기에 아쉬움은 없다.

답을 얻어 기쁘다. 행복할 수 있다면 늘 행복하기를.

그녀는 다음 날, 지금까지 쓰지 않던 반말로 그 남자와 완전히 헤어졌노라고 말했는데 진짜였는지는 모르겠다. 그 날 이후로 딱히 연락을 끊었던 것도 아니지만 연락을 하지도 않았다. 몇 년 뒤 대학생이 된 그녀는 그 돈을 갚겠다고 말했는데 필요 없다고 답했다.

과학자들 연구에 따르면, 2차 성징 이후의 십대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윤리적 문제와 별도로 정신병리학적 문제는 없다고 하니 그냥 솔직하게 고백하겠다. 그때는 부정했지만 나는 그녀를 여자로서 사랑했다. 매일 아침 맞춤법이 틀린 그녀의 문자를 받을 수 있어서 좋았고, 맛 대가리가 없노라며 찍어 보낸 급식 사진 하나에 하루 종일 행복했다.


오늘 아침 차를 주차하다가 실수로 백미러를 날려 먹고 말았다. 이거 하나 수리 못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핍절한 것은 아니다만 사무실을 열은지 얼마 되지 않아 나갈 돈도 많은데, 공돈 수십만원이 깨지니 온갖 짜증이 치솟았다.

마침 페이스북 채팅 리스트에 그녀가 있는 것을 보고, 간만에 안부를 묻다가 대뜸 그 돈을 갚을 수 있겠냐고 물었다. 새 남자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을 프로필로 해놓은 그녀는 그 말을 듣고 30초만에 그 돈을 입금해주었다. 그 기억에 대한 불편함이었을지, 아니면 그 사건을 알고 있는 나에 대한 불편함일지는 알 수 없다만 백미러 수리 비용은 신경쓰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누군가 끝나는 것은 목숨이지 사랑이 아니라고 말했는데 나는 그 반대말을 좋아한다.

끝나는 것은 사랑이지 목숨이 아니다.

늘 그렇다.

※ 이 이야기는 창작에 불과할 수 있으며, 경험자는 필자와 동일인이 아닐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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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반전이네요.. 백미러 수리비를 결국 그렇게 갚으셨네요~ 이젠 어엿한 숙녀분이 되신 듯.. 가즈앗!!! ㅋ

ㅎㅎㅎㅎㅎㅎ 픽션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

끝나는 것은 사랑이지 목숨이 아니다.

전 그 반대편에 서겠습니다.

각자의 삶에 장르라는 것이 있겠지요 ㅎㅎ

jjy님의 장르는 저보다 더 화사하시길 바랍니다 ^^;;

엇 ㅋㅋㅋ 반전이군요!! 이런 반전 좋아요!!
픽션이라면 좋겠네요 제 순수한 마음이 그러길 바랍니다 ㅋㅋ

ㅎㅎㅎㅎ 진실은 저 편 너머에 있겠지요^^;
재밌게 읽어주셨다니 기쁩니다 ㅎㅎ

끝나는 것은 사랑이지 목숨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을 목놓아 외치셨다는 것입니다. 그걸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하기 어려우신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무슨 일이 생길지는 또 모르는 것입니다만 쓸 데의 기분은 그냥 레토릭이었습니다 ㅋㅋㅋㅋ

저 여자분은 마음의 빚을 덜어서 후련했겠네요. 저같아도 즉시 30초만에 송금할 것 같습니다.

ㅎㅎ 누군가는 이 이야기를 들으니, 끝나버린 관계를 완전히 끝났다고 확인한 것에서 나온 모멸감 때문이라던데... glory7님 말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는 부정했지만 나는 그녀를 여자로서 사랑했다. 매일 아침 맞춤법이 틀린 그녀의 문자를 받을 수 있어서 좋았고, 맛 대가리가 없노라며 찍어 보낸 급식 사진 하나에 하루 종일 행복했다.

글의 전체 내용과는 상관없이 그냥 이 문장을 읽으니 아련해져요.

ㅎㅎㅎㅎㅎ 쉰내나는 아재의 로리타 컴플렉스로 읽히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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