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526 나루 작업 일지] 왜? 왜? 왜?

in #kr8 years ago (edited)

batch_IMG_9989.JPG

백수 일기를 장렬히 끝내놓고선,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뭐 하고 지내는지 궁금한 분이 있을 것 같아 글을 써봅니다.

원래 개인 작업을 할 때는 작업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고, 제 곡보다는 글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기대도 부담스럽고요. (그래서 저는 공연이 있어도 알리지 않거나, 아무도 오지 못하게 공연 2시간 전에 뜬금없이 포스터를 올리곤 합니다)

그런데도, 스팀잇에 있는 몇몇 분들이 소식을 궁금해 해주셔서 가벼운 마음으로 작업 일지를 적습니다.


최근 집중하고 있는 작업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그중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무용 작품인데요. 6월 말에 대학로에 올릴 예정입니다. 어쩌다 보니 제가 쓴 시나리오로 작품을 하게 돼, 제가 연출이 되었습니다.


무용 작업은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한 외부 작품이 제 첫 번째 무용 작업이었어요. 그때는 무용수와의 호흡보다는, 연주자들끼리 합을 맞추는 것에 더 급급했습니다. 한 시간이 넘는 러닝 타임 동안 계속 곡이 연주돼야 했고, 연주자도 10명에 달했거든요.

그때는 곡을 쓰고, 그 곡을 합주를 통해 만들어 내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막상 결과물을 보니 만족스러웠습니다. 무용수의 움직임이 더해지니 제 부족한 곡도 참 예쁘게 들리더라고요. 그때 무용이라는 장르에 처음 매력을 느꼈어요. 그 이후로 무용에 대한 갈망이 있었는데, 몇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다시 하게 됐습니다.

이번에 제가 하는 작품은 전적으로 무용수와의 호흡으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과보다 과정에 더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 역시 좋은 결과물을 위해서지만요) 제게는 음악 형식도, 작업 방식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새로운 형태입니다.


제가 쓴 작품이고, 안무를 하려면 음악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구체적 계획도 없으면서 다음 만남까지 곡을 만들어오겠다고 장담했습니다. 제 부담감이 느껴졌는지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일단 같이 움직여 보죠!"

생각해보면 음악가라는 직업만큼 움직이지 않는 직업도 없는 것 같습니다. 연습을 한다고 몇 시간이고 연습실에 틀어박혀 있게 되지요. 곡을 쓸 때도 항상 컴퓨터 앞에 앉아 있기 때문에 움직인다는 표현이 참 낯설었어요. 그래서 일단 움직여보자는 말이 새롭고,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즐거운 자극이 되었어요. 그래서 요즘은 많이 움직여보며 이것저것 만들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하면서 제가 가장 놀랐던 것은 "왜?"라는 질문이 멈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명목상이지만, 제가 연출이 되었기 때문에 다들 끊임없이 제게 묻습니다. "왜?", "왜 내가 거기 서 있어야 해?"

저는 곡을 쓰기 때문에 저에게 "왜?"라고 묻는 사람이 없습니다. 언제부턴가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연주자들은 제가 쓴 곡을 연주할 뿐이지요. 저 역시도 그들에게 "왜 그 부분에서 그렇게 연주해?"라고 묻지 않습니다. 그냥 잘 만들어진 레퍼런스 곡을 주면서 비슷하게 연주해달라고 말하지요.

무용수는 끊임없이 질문합니다. 그러면 전 이렇게 대답합니다. "잠깐만요. 생각 좀 해볼게요." 그리고 골똘히 생각합니다. 그동안 그들도 함께 고민합니다. 저희는 한 번 만날 때마다 적어도 6시간 정도는 함께하는데, 그중의 반 이상을 '이 작품 안에서 왜 이 행동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으로만 보내게 됩니다.

이런 작업을 진작 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음악에는 기술적 흉내만 있고, "왜?"라는 질문이 결여돼있다는 것을, 요즘에서야 느끼게 됩니다. 좀 더 집요하게 파고들지 못했기에 늘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끝없이 질문하고, 서로 대답하고, 충돌하고, 비로소 이해하게 됩니다. "왜?"라는 질문의 답이 명확해지면 기술적인 측면은 저절로 해결되더라고요.

가끔은 '왜?'라는 의미 부여에 너무 깊게 빠져 이상한 방향으로 갈 때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몇 시간 공들여 짠 안무와 음악을 버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평상시 저라면 "별로 안 이상한데 그냥 해요."라고 했을 텐데 요즘은 몇 번을 버리고 다시 만들어도 즐거운 마음이 듭니다. 저는 이 작품을 통해 예술에 대한 태도를 다시 배우고 있는 것도 같습니다.


앞서 말했듯 제 글이 제 음악보다는 낫기에, 이 글보다 제가 만든 작품이 더 나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번 작품은 부끄럽지 않게 만들어보려고 애쓰는데 잘 될지는 모르겠네요.

평상시 저였다면 못했을 작업입니다. 일을 그만두면서 시간적, 정서적으로 여유가 생겼기에 할 수 있었습니다. 바쁜 시기에 이 작업을 했다면, 아마 "별로 안 이상한데 그냥 해요."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일상에 공백이 늘어나니, 가끔씩 채워지는 이런 일들이 더 재밌고 소중하게 느껴지네요.


어쩌다 보니 무용 작품에 대한 글이 길어져, 또 다른 작업은 다음에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작업이 많지 않기에 바쁜 척 해보는 것이지요.

또, 새로운 앨범도 조심스럽게 고민해보고 있습니다. 가끔 스팀잇에 있는 분들로 라인업을 짜보는데 그 상상이 참 즐겁습니다. (아직까진 공상에 가깝지만요) 크레딧에 @ab7b13으로 올라가는 생각을 종종 해봅니다.

한 번도 이런 식의 작업 일지를 써본 적 없는데, 작업 일지라기보단 작업 일기에 더 가깝네요. 작품이 끝나고 몇 년 뒤 이 글을 보면 어떤 기분이 들지 벌써 궁금해집니다.

다정한 마음으로 읽어주시는 이웃분들. 저는 몇 개의 작업을 하고 있고, 그래서 무척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답니다:) 늘 감사합니다!

Sort:  

제 일상에는 여전히(?) 공백이 많아서...
저도 재밌고 소중한 일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calist님의 일상도 공백으로 가득하군요. 예전엔 비어있는 시간을 견디질 못했습니다. 뭐라도 해야한다는 압박감에 뭔가를 꾸역꾸역 채워 넣었지요. 아마도 회피할 목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일상의 공백에서는 무슨 일이 생겨도 즐겁지요. 비어있는 @calist님의 일상도 재밌게 채워지길 바라봅니다.

오.. 기대됩니다. 날짜 나오면 한번 홍보 질러 주세요. 보러갈 사람이 많겠습니다~~! (별일 없으면 저도요 ㅋㅋ)

앗..? ㅎㅎㅎ 부끄러워서 안 됩니다. 잘은 만들되, 아무도 모르게 끝내는 것이 목표입니다ㅋㅋㅋ 잘 마무리하고 알려 드릴게요...

읽다보니 작업의 고민과정을 엿보는 것 같기도 하네요. 다른일을 하지만 저도 비슷한 것 같아요. 본질을 찾으려 애쓰면서도 어떨땐 그것에 집착하다보니 오히려 본질이 흐려지기도 하고.. 그렇게 엎치락뒤치락 하다보면 또 어느새 그다음이 보이기도하구요 ㅎㅎ

맞아요. 살아가면서 끝없이 왜? 라는 질문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질문 거리를 만들면 끝도 없지요. 엎치락뒤치락하면 조금은 답이 나오는 것 같고, 그걸 바탕으로 살아가고 그러는 것 같습니다. 뜬금없지만 P님을 항상 응원합니다. 저희 열심히 물으면서 행복하게 살아요!

ㅎㅎ 대학로 간 지도 참 오래됐는데 한 번 공연 보러가야겠네요

대학로에 좋은 공연 많으니... 두루두루 둘러보고 가세요. 무서운 댓글이 많이 달리는군요. ㅎㅎ 제 작품을 들려드린다 생각하면 정말 부끄럽고... 자괴감 들고 그렇습니다. 그래도 말씀만으로도 힘이 되네요:)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니 꼭 보러가야겠네요 ㅋㅋㅋ

왜 라는 질문이 참 어려운 질문인데..
그 질문이 참 중요하게 보이네요 정말.ㅎ
이런 일기는 참 새롭게 보여서 재밌게 읽었습니다.ㅎ 음악가의 일상을 보는 것도 재미가 쏠쏠하네요.ㅎ '무엇'이나 '어떻게'가 아닌 '왜'가 중요한 일이 참 드물거 같아요.

새롭게 보이시나요? 음악가의 일상이면서, 한량의 일상이기도 합니다ㅎㅎ 요즘 완전 여유로운 삶을 즐기고 있거든요. 글로 적고 보니, 앞으로 더 많이 '왜?'라는 질문을 해야 할 것 같네요.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화이팅입니다 멋진작품이 나올거 같은 느낌이네요.

어떤 작품이 될진 모르겠지만, 열심히 해보려고 합니다. 따뜻한 응원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화이팅!!

오! 저도 글 읽으면서 보러 가야지 마음을 먹게 만드셨습니다. ㅎㅎㅎ 그리고 몇몇 스티미언분들과 함께 하는 상상도 해봅니다. 저는 물론 관객입니다. ㅎㅎㅎㅎ 항상 응원하는거 아시죠?

당연하죠. 늘 따뜻하게 엄마 마음으로 지켜봐 주시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ㅎㅎ 그래서 감사하고요. 나중에... 제가 좀... 잘하게 되면 그때 정식으로 초대를... (주절주절) 밋업을 해보진 않았지만, 나중에.. 아주 나중에 공연 겸 밋업을 하면 재밌겠다 싶네요ㅎㅎ 생각보다 반응이 뜨거워 당황스럽습니다. 역시 정겨운 곳이에요.

어... 엄마? ㅎㅎㅎㅎ 엄마맘 맞아요! ㅎㅎㅎ

와 여러가지 작업을 하시네요

음악들어보싶습니다. 창작자로써 고뇌가 느껴집니다.

여러가지 작업이긴 하지만... 제대로 하고 있는가 돌아보면 또 아닌 것도 같고요. 작곡가면서도 제 음악 들어보고 싶다는 말이 가장 무섭게 느껴지니 창작가로서는 탈락인 것도 같네요. 그래도 이렇게 보내주시는 관심에 또 다시 힘을 얻기도 하고요. 감사합니다. 좋은 휴일 되셨으면 해요:)

왜 없는 무엇을 어떻게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설령 '왜' 에 대한 답을 구하기도 전에 무엇을 어떻게 한들 얼마나 오래 갈까요.

그러게요. 근데 저는 맨날 왜 없이 '무엇을 어떻게'에만 방점을 찍고 살아온 것 같습니다. 왜라는 질문을 마주하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회피지요. 그래서 오래가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저렇게 글을 써놓고도, 모르고 있었네요.

'이유 묻지 말고, 지시에 토 달지 말고, 시키는 것만 잘하면 먹고 사는 것은 문제 없다.' 고 가르친 사회의 책임이 가장 큽니다. 비단, 어느 특정 개개의 잘못도 아니고 한 두사람만의 문제도 아니죠.

'왜?' 냐고 묻는 것이 그렇게 많은 힘을 들이거나 어려운 일도 아닌데,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시간과 노력을 들이드니 돈 한 푼 더 버는 것을 더 높이 평가하는 시대를 관통하고 있음이 유감스럽습니다.

묻는 것 자체는 힘들지 않지만, 답을 구하는 것에 시간과 노력이 든다는 말 참 공감됩니다. 답을 구하는 것이 무서워 질문을 피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우유님의 댓글을 보니 그간 제가 '이유 묻지 않고, 지시에 토 달지 않고, 시키는 것만 잘하면서' 살아왔다는 생각에 섬뜩해지기도 하네요.

계속 고민하게 만드는 질문이죠 "왜?"
레고는 그런 질문이 없어서 다행입니다 ㅋㅋ

답은 없지만 계속 질문하다보면 스스로 확신은 생기는 것 같아 좋아요. 생각해보니 레고는 정말 그런 질문이 없는 것도 같네요. 찾아보면 있을 것도 같고요 ㅎㅎㅎ 그런데... 브라이언님은 왜 레고를 좋아하시죠?! (문득 너무나 궁금해짐)

Coin Marketplace

STEEM 0.04
TRX 0.33
JST 0.077
BTC 62042.63
ETH 1628.63
USDT 1.00
SBD 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