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론의 제주 생활 - 4.3을 앓다(2) : 영화 '지슬'의 현장

in #kr7 years ago (edited)

4.3 70년, 4.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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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2013년 개봉한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은 용감한 시도였습니다. 시간은 흘러가지만 시대의 흐름이 역행하면서 제주 4.3을 다시 파묻어 가려는 정치적 분위기 아래에서 과감하게 뛰어나온 독립영화였죠. 이 작품은 2012년 부산 영화제에서 최초로 공개되고, 이후 선댄스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으면서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습니다. 누군가에 의해 은폐되고 잊혀져 가던 제주 4.3이 예술의 옷을 입고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된 계기가 된 작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화 <지슬>의 모태는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에서 발생했던 실제 사건입니다.

이웃마을인 무등이왓에서 사람들이 학살되고 마을이 전소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주변 마을 사람들이 학살을 피해 피난할 곳을 찾다가 '큰넓궤' 동굴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곳에서 120명의 주민이 40일이 넘도록 피난 생활을 하다가 결국 경찰 토벌대에게 발각되어 모두 사살되고 맙니다. 일부는 이곳에서, 일부는 한라산에서, 그리고 많은 사람이 정방폭포로 끌려가 총살되고 그 바다에 버려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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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덕면 동광리의 모습입니다. 제주시를 조금만 벗어나면 어디서든 만날 수 있는 시골입니다. 바람 소리, 새 소리, 가끔 지나가는 차 소리를 제외하면 너무나 고요해서 도시 사람은 깜짝 놀랄 정도입니다. 제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181번이나 182번 급행 버스를 타시고 '동광 6거리'에서 하차하시면 이곳에 올 수 있습니다. 참으로 고요한 동네이지만 '동광 6거리'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에는 진짜 6거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통팔달, 제주와 서귀포 곳곳으로 갈 수 있는 교통의 요지라고 할 수 있죠. 그렇기 때문에 이곳은 4.3 이전에도 민란의 중심지였습니다. 영화 '이재수의 난'의 배경이 되었던 민란도, 그보다 더 오래 전에 있었던 임술민란, 방성칠의 난도 모두 이곳과 대정 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했던 제주의 대표적인 항쟁 지역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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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요한 마을에도 역시 노란 유채꽃이 활짝 피어있습니다.

이곳에서 영화 <지슬>의 실제 현장으로 이어지는 4.3길을 가려면 우선 동광리 복지 회관으로 갑니다. 그곳이 동광리 4.3길의 출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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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회관 앞에는 이렇게 안내도가 부착되어 있습니다. 팸플릿도 배부하고 있으니 길을 찾으실 때 이용하시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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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광리의 4.3길은 양방향 두 코스로 되어 있습니다. 각 코스가 한 번 돌고 오는데 두 시간 정도 소요되기 때문에 하루에 다 돌아보는 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모두 다 돌아보려면 시간을 넉넉히 잡고 출발하셔야 하고요.

지도를 보시면 오른쪽에 무등이왓이 있습니다. 이쪽 마을 사람들이 먼저 토벌대에게 학살되었고,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동광마을, 삼밧구석마을 사람들이 왼쪽에 있는 큰넓궤 동굴로 도망쳤던 것입니다. 오늘은 큰넓궤 쪽으로 갑니다.

아, 참고로 제주어로 '왓'은 밭, '궤'는 동굴, '빌레'는 낮은 언덕이나 넓고 평평한 바위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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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림길에서 만날 수 있는 표지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미 두 차례의 민란이 있었고, 미군정의 수탈에 반대하면서 불량 마을로 낙인 찍혔던 동광리였기에 이곳은 토벌대의 표적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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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벌대가 불태운 후 폐교된 동광 분교를 지나 삼밧구석 마을에 들어갑니다. 마을 어귀에 서 있는 나무는 그날의 기억들을 여전히 갖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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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길을 걸어갑니다. 지금이야 시멘트 포장이 다 되어 있지만 영화 <지슬>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그 당시에는 다닥한 초가집 사이 작은 마을길과 올레였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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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밧구석 마을은 지금 없습니다. 그 당시에 완전히 불타버린 뒤로 마을은 재건되지 않았고, 지금은 이렇게 올레와 집터가 남아 있고, 밭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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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밧구석 입구에 있던 임씨 올레입니다. 이곳에 살던 임문숙 씨 가족 5명을 비롯해 총 14명이 희생된 곳입니다. 임씨 일가의 헛묘는 무등이왓 가는 길에 있습니다. 헛묘란 시신을 찾을 수 없어 옷가지 같은 것을 넣고 조성했던 묘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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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올레를 걸어보신 분에게 익숙한 리본입니다. 제주 올레의 리본은 빨간색과 파란색, 4.3길의 리본은 빨간색과 하얀색입니다. 이 리본을 보고 걸어가시면 방향을 찾기가 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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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비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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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마을터 표지석입니다.
그 참혹했던 날, 그날이라고 하늘이 붉거나 검었을리가 없습니다. 마음이 아려서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이제 큰넓궤로 향합니다. 큰 도로를 따라 1km 정도를 걸어가면 산길로 안내하는 표지판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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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산길로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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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넓궤까지는 약 1.3km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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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왔습니다. 이곳이 큰넓궤로 진입하는 오솔길입니다. 지금이야 길만 따라가면 찾을 수 있지만 아마 그 당시에는 아무것도 없는 그냥 숲속이었겠죠. 살짝 긴장이 되었습니다. 마음은 더 묵직해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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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입구에서 굉장히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일단 가깝다는 것에 한 번 놀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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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저 크기에 망연자실 한숨을 내쉬고 말았습니다. '큰넓궤'라는 이름이 무색하네요. 체격이 조금이라도 크면 못 들어갈 수도 있는 그런 크기의 입구입니다. 영화 속에서 만삭의 산모였던 무동이 부인이 결국 빠져 나오지 못한 게 과장된 극적 설정이 아니었습니다. IMG_0179.JPG

지금은 이렇게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혀있습니다. 헬멧을 쓰고 내부를 탐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전 들어가 볼 엄두는 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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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는 저렇게 좁은데 내부는 굉장히 길고 넓어서 안쪽으로 쭉 들어갈 수 있고 바로 근처에 있는 도엣궤와도 연결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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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도엣궤입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눈에 익은 장소입니다. 영화 촬영 장소였던 것을 알리는 표지판도 있고, 역시 안전을 위해 막아 놓았습니다.

영화 <지슬>은 세트에서 촬영한 것이 아니라 실제 동굴 안에 조명을 설치하고 배우와 스태프들이 그 안에 들어가서 찍었습니다. 연출부가 기어들어가서 슬레이트를 치고 다시 기어서 빠져 나오기도 했다고 하고, 엔딩 크레딧을 보면 다수의 스태프들이 연기자로 출연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물동이를 나르던 소년병 '정길'을 연기한 주정애씨는 연출부이기도 했죠.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거운 마음을 안고 돌아나오는 길에 갑자기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4.3 당일을 맞아 고등학생들이 답사를 올라오고 있더군요. 제주 청소년들은 낯선 사람에게 인사를 잘합니다. 외지인 입장에선 조금은 신기하죠.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과거와 미래가 그 중간에 서있는 저를 스쳐지나가는 기묘한 순간이었습니다.
조금은 위안이 되었습니다.

지나간 아픈 과거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바라보는 저 아이들에게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고.
저 밝은 아이들에게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고.

그렇기 때문에 이곳을 찾은 거라고 생각하며 산길을 내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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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제주에서는 4.3길 스탬프 랠리를 하고 있습니다. 다섯 곳의 4.3길을 방문하시고 그곳에서 스탬프를 모으시면 다양한 기념품과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좋은 행사니까 꼭 참여해보시길 바랍니다. 세상이 좋아져서 잉크 도장이 아니라 전자 스탬프를 스마트폰에 찍는 형식입니다. :)
이곳을 참고하세요

다음 방문지는 무등이왓이 될 것 같습니다.
계속 이어지는 4.3 순례글, 응원해주세요.


아론의 제주 생활 - 4.3을 앓다(1) : 성산포 추모 공원

댓글과 보팅은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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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제가 더 감사합니다. ^^

힘내세요! 짱짱맨이 함께합니다!^^

... 실제로 이런곳이었군요. 정말 무슨말을해야할지..
사진으로나마 보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읽어주셔서 제가 더 감사하지요.. ^^

정말이지 인간만큼 잔인한 동물은 없는 것 같아요ㅜㅜ

중간에서 이유 없이 죽어간 민중의 슬픔을 기억해야죠.. ㅠㅠ

정성 가득한 글이네요~ 응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에비씨 선생님 ㅎㅎㅎ

짱짱맨 호출로 왔습니다.

환영합니다. ^^

4.3 사건은 정말 잊지말아야할 역사인것 같습니다.

네네.. 다른 분들에게도 많이 알려주세요.

제주 4.3.사건에 대해 말그대로 '0'만큼 관심을 가지고 살다가
지난달 제주 여행에서 만난 제주도민 교수님과의 대화로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도민분들을 통해 들으니 정말 더 가슴이 아프더군요...
아름답게만 보였던 제주도가 참 많은 수모를 겪고 지금까지
버텨왔구나.자연에게도 원주민들에게도 감사했습니다.

저런 영화가 있는지 몰랐는데,지슬 꼭 봐야겠네요.

네, 조만간 포스팅하겠지만 '지슬'은 단순 고발 영화가 아니라 예술적 성취도 높은 영화입니다. 꼭 보시면 좋겠어요. 감사합니다. ^^

오늘도 리스팀 해갑니다. 화이팅 해주세요 아론님!

넵.. 감사합니다. ^^ 리스팀은 사랑이죠.

몇년 전 영화 ‘지슬’을 보고 크게 마음이 아프고 슬퍼하고 분노했던 게 생각납니다... 역사를 돌이켜 봐야할 4.3 관련 글을 연재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시간이 허락하는대로 제주도의 많은 곳을 돌아다니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되네요. 4.3 관련된 곳은 최대한 알려보도록 하겠습니다. 방문 감사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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