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생활자의 수기' 책 감상 후기.

in #kr-writing6 years ago

지하생활자의 수기.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1864.

교육을 통해 교양과 지식을 배웠고, 교양과 지식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지만, 자신이 결코 교양인이나 지식인이 될 수 없음을 아는 불행한 인간의 이야기. 주인공은 19세기 사람이지만, 21세기의 수많은 사람들도 그처럼 심각한 자학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150년 전의 소설이지만 전혀 거리감이 없다. 오히려 '술 권하는 사회' 같은 한국의 근대 소설이 더 멀게 느껴진다.

'지식인 선언'이라는 현수막을 내걸면서 스스로 지식인이라고 말하는 인간들은 행복하다. 소설의 주인공은 스스로 '지식인'이나 '교양인'이라고 말할 정도로 교양과 지식이 부족하지도 뻔뻔하지도 못하다. 그래서 불행하다. 그런 자신을 병적으로 자학한다. 그 묘사가 매우 뛰어나고 섬세해서 깊이 와 닿는다. 주인공은 착한 사람도 아니고 악한 사람도 아닌 지질하고 못난 '평범한' 사람이다.

니체는 1887년 2월 23일에 이 책의 프랑스어 번역판을 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나의 기쁨은 대단한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 45절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연히 나는, 유일한 심리학자인 그(도스토옙스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나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멋진 행운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심지어 내가 스탕달을 발견했던 것보다도 더욱 그렇다.'

이 소설은 니체의 '도덕의 계보'에 나오는 다음 문장의 예증이라고 볼 수 있다.

'고통을 받는 자는 그 감정의 원인을 발견하는 데 무서울 정도로 열중하며 독창적이다. 그들은 상상 속의 모욕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것을 즐긴다. 그들은 괴로운 의심 속에서 한껏 즐긴다. 그들의 아주 오래전 상처를 헤집어 열고 아주 오래전 치유된 상처에서 피를 흘린다. 그들의 친구, 아내, 자식들, 그들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면 어느 누구도 악인으로 만든다.'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는 이 문장이 몇 에피소드를 통해 매우 섬세하고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주인공의 자학적 고통과 그 감정에 깊게 공감하며 빠져들게 만든다. 스스로 '지식인'이라고 말하는 자들보다 소설 속의 지질한 주인공이 훨씬 더 인간적이고 교양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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