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불편과 어려움에 공감하는 연습

in #kr-writing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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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착역을 알리는 방송이 기차 안에 울려 퍼졌고, 기차 안에 있던 사람들과 같이 나도 슬금슬금 걸음을 옮겼다.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은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긴 행렬을 이루고 있었고, 나 역시 그들 사이에 동참하여 자리를 잡았다. 긴 줄 사이로 할머니 한 분이 행렬에 같이 동참했다. 할머니 뒤로 한 여자가, 그리고 그 여자 뒤로 내가 서있었다. 날은 너무 더웠고, 에스컬레이터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한 사람이 올라타면, 뒷사람이 올라탔다. 리드미컬한 박자감은 없었지만, 그 박자를 타지 않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방금 전에 내 시야에 들어왔던 할머니만이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주춤주춤 하면서 멈춰있었다. 할머니 뒤에 서있던 여자는, 에스컬레이터를 타지 않고 멈춰버린 할머니를 피해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은 그때 일어났다.

할머니는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내딛으면서 동시에 옆으로 자리를 피한 여자의 옷도 같이 끌어당겼다. 여자는 할머니의 행동에 짜증을 냈고, 할머니는 멋쩍은 듯이 웃으며 무어라 말을 건넸다. 뒤에 서있던 나는 더운 날씨 탓에 정신이 잠시 풀어져 있어서인지 조금 전의 상황이 바로 파악되지도 않았고, 할머니의 대사 또한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그 장면을 다시 되감으며 할머니를 유심히 쳐다보니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할머니는 혼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고, 옆에서 부축해줄 사람이 필요했으나 도움을 청하는 대신에 혼자서 타려고 노력하셨던 것 같았다. 하지만, 발을 떼는 것과 동시에 불안한 마음이 옆에 서있던 여자를 붙잡게 된 것이었다. 물론, 여자의 옷을 끌어당길 의도가 없다고 하더라도, 결론적으로 할머니는 여자의 옷을 끌어당기고 말았고, 이런 상황을 알리 없는 여자는 짜증이 난 것이다. 할머니의 대사를 그녀가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여자는 할머니의 옆자리를 피해서 성큼성큼 앞질러서 가버렸다.

사실 여자의 행동이 이상해 보인다거나 과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날은 너무 더웠고, 할머니는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주춤거리며 타지 않았고, 갑자기 말도 없이 자신의 옷을 끌어당겼다. 이 상황 전개만 놓고 보자면, 어느 누구라도 놀라지 않거나 불편한 기색을 내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여자가 가버린 그 자리에 할머니는 혼자 남았고, 나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순간 할머니가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릴 때도 도움이 필요한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혹시나 싶어서 나는 여자가 떠난 자리에 서있었다.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지 직접적으로 물어보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혹시나 실례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고, 할머니의 표정이 이미 굳어져버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따듯한 말 한마디 대신에, 그냥 할머니 옆에 있어주기로 했다. 혹시라도 잡을 것이 필요할 때 쓰시라고, 왼쪽 팔을 할머니 곁에 가까이 두었다. 다행히 할머니는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릴 때는 아무런 문제없이 내렸고, 나는 할머니 뒤에서 잠시 같이 걸었다. 할머니는 유난히 걸음이 느렸고, 걸음걸이가 바르지 않았다. 아무런 문제없이 내린 것처럼 보였지만, 보이지 않는 그 마음에는 엄청 애를 쓴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남의 불편을 미리 짐작하기가 어렵다. 자신이 겪는 불편이 아니면, 다른 사람의 불편에 공감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거나 너무 쉽다고 생각하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도움을 받지 않으면 굉장히 해내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계단보다 편하게 오르내리기 위해서 만들어진 에스컬레이터지만, 그마저도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하기 어려운 일인 것이다.

나 역시도 갑자기 누군가 나의 옷을 잡아당긴다면 당연히 놀랄 것이다. 다만, 상대방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서 조금만 눈여겨본다면 나의 옷이 아니라, 나의 손을 잡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누군가의 불편과 어려움에 공감하는 연습. 우리에게는 그런 연습이 필요하다는 생각과 함께.

할머니는 그렇게 천천히 어디론가 걸어갔고, 나는 기차역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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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조용 속삭이는 듯한 문장들이라 참 읽기 편안하네요. 덕분에 배려에 대하여 생각해보고 갑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더 좋은 글을 남길게요. ^^

되게 잔잔하면서 많은 생각이 들게하는 글입니다.
할머니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픕니다.
그리고 작가님의 사려깊은 배려가 인상깊네요.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써주세요. 팔로우랑 보팅 누르고 갑니다.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다음에도 또 읽어주세요. ^^

조용한 수필을 읽는 기분이었습니다. 글이 따뜻하네요. 그 순간의 할머니도 안타깝고, 여자분도 탓할 수 없는.. 그런 미묘한 기분입니다. 남의 불편함을 안다는 것, 참 힘든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약한 자를 돕는 것, 또 도움을 받은 사람도 자기보다 약한 자를 돕는 것.. 그게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dianmun님이 해결책이나 우리 모두 이러한 행동을 취하자, 이런 말을 써놓지 않아도 화자의 의도를 충분히 알 수 있는 글이었습니다. 그래서 좋은 글이라고 생각해요. 팔로우&보팅하고 갑니다. 제 스팀파워가 빈약해서 죄송할 따름이에요..🤣

이렇게 읽어주신 것만으로도 너무 고맙습니다. 이렇게 정성스러운 댓글이라니 감동입이다 ~

늘 글을 잘쓰고 싶단 생각이 앞서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채 글을 올리는 경우가 꽤 많은 저인데, 글쓰는 능력이 부러워요. 앞으로 자주 찾아올게요😊

네네 고맙습니다. ^^ 굿밤되세요 ~

좋은 글이네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좋은 글이네요~[보팅지원 이벤트]선정글입니다 보팅합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좋은 글이네요~[보팅지원 이벤트]선정글입니다 3$보팅합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너무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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