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살 여행기#17 열차에서 일주일 - 시베리아 횡단 철도 1: 사과 소년

in #kr-writing8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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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3] 사과 소년이 준 사과

모스크바 시간대에 들어왔습니다. 이제는 꽁꽁 얼어 있는 러시아의 강이 낯설지 않습니다. 낮에 잠을 안 자니 시간이 참 안 갔습니다. 여행이 끝나면 이 지루한 시간이 생각날 건 분명했어요. 그러나 전 다시 여행을 가면 이렇게 아쉬워했던 걸 까먹어서 저는 또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아쉬워할 겁니다. 그 이유는 전 늘 소중한 걸 마주했을 때 하찮게 여기고 뒤늦게 후회했기 때문이지요. 졸업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철학과에 다닌 시간들이 흐릿합니다. 철학과에 오기까지는 참 많은 고민을 했는데 왜 오게 되었는지도 잘 기억나지도 않습니다. 저는 그때 얻고 싶은 걸 전 얻었을까요? 또 제가 가고 싶던 곳에 가까워졌을까요?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복도 건너편에 앉은 스무 살 남짓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저에게 다가와 사과를 주고는 갑자기 복도 끝으로 사라졌습니다. 열차가 달리고 있는데 사과를 준 사람이 없으니 차장이 찾았습니다. 사과 소년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다행히 사과 소년은 곧 돌아왔습니다. 그와 있을 때는 기록을 하지 못해서 이제부터는 기억에 의존해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과 소년은 제가 열차에서 만난 사람 중 유일하게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사과 소년도 제가 흥미로웠던지 제 앞에 앉아 있던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고 둘이 자리를 바꿨지요. 유치원 수준이지만 대화할 수 있는 건 즐거운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더 정확히 표현할 수 있게 되었지요. 사람은 이야기하고 살아야 합니다.

사과 소년은 카자흐스탄에서 러시아에 있는 대학교에 가고 있고 지리학을 전공한다고 했습니다. 아까 사라진 건 다른 객차의 친구들과 식사를 해서랍니다. 삼촌이 영국에 살고 자신도 영국에서 유학하고 싶은데 돈이 없다고 아쉬워했습니다. 그나마 카자흐스탄보다 러시아가 공부하기 괜찮고 또 카자흐스탄과 러시아는 소련으로 묶여 있던 시간 덕분에 인적 교류도 있어서 다른 나라보다 오가기 더 수월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러시아로 왔답니다. 그는 김기덕의 영화를 좋아하고 그 외에 몇 가지 한국 영화를 보았다고 말했는데 특히 6.25 전쟁을 다룬 영화가 흥미로웠다고 했어요. 저는 카자흐스탄에 대해서 아는 게 없어 관심 보일 게 없으니 미안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지요.

복도 건너편에는 제 위층 사람과 그의 친구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 앞에 앉은 사람이 읽다 놓은 책을 집고 글자를 손으로 집어가며 읽었습니다. 그러고는 재미없는 책이라는 듯 책 표지에 대해 뭐라고 했지요. 그의 친구는 내 신발에 대해서도 뭐라고 했는데 사과 소년의 말로는 신발 끈이 좌우 비대칭인 내 신발이 이상하게 생겼다고 한 말이랍니다. 사과 소년은 불편한 눈치로 그들이 덜 배웠다고 했습니다. 저는 잘 배운 너가 그러려니 하라고 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 뒤로도 사과 소년은 은연중에 자신이 좀 더 나은 사람이란 생각을 드러냈습니다. 사과 소년이 저에게 사과를 주고 저에게 메신저 아이디를 물어본 것도 외국인 하나와 이야기해보았고 연락처도 안다는 사실이 좀 더 나은 자신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어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튼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과 소년은 카자흐스탄 전통 털모자를 쓰고 떠났습니다. 사과 소년과 시덥잖은 말을 많이 해서 혀끝이 썼는데 그때를 다시 떠올리는 지금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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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사항

  • "복도 건너편에는 제 위층 사람과 그의 친구가 앉아 있었다." >>> "... 그의 친구가 앉아 있었습니다." (@springfield님이 알려주셨습니다.)
  • " 저에게 대가와 사과를 주고는 갑자기 복도 끝으로 사라졌습니다." >>> "저에게 다가와 ..." (@springfield님이 알려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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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홍보하는 프로젝트에서 나왔습니다.
오늘도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의 꾸준한 포스팅을 응원합니다.

늘 감사합니다!!

저에게 '대가와' 가 아니라 '다가와', '복도 건너편에는 제 위층 사람과 그의 친구가 앉아 있었다'-- 갑자기 낮춤말이 등장해서 조금 어색한 것 같아요^^; 일부러 딴지거는 것 정말 아니예요 ㅜㅜ 그리고 수입 제발 나눠주지 마셔요!! 사과 소년의 등장이 참 반가웠는데 대화를 듣고 나니 저도 왠지 씁쓸하네요. 그래도 @daseoh 님 말씀대로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어야하는 것 같습니다 :-)

딴지라니요!!! 소중한 피드백 정말 감사합니다. 오타는 정말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는 건가 봅니다. 머리 속으로 읽을 때는 늘 괜찮은데 써놓고 몇일 있다보면 오타 없는 글이 없습니다.
수입을 나눠주는 것에 대해서는... 아... 알겠습니다. ㅎㅎ
남에 대해서 말하는 건 늘 마음편치 못한 일인 거 같아요. 사과 소년에 대해 쓴 이 글도 남에 대해 평가했다는 점에서 똑같긴 합니다...
동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피드백주신 것에 감사하고요! 시작하는 한 주도 즐겁게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모래요정 바람돌이가 하루에 한가지 소원만을 들어주는것처럼
짱짱맨도 1일 1회 보팅을 최선으로 합니다.
부타케어~ 1일 1회~~
너무 밀려서 바쁩니다!!

@virus707님 오늘도 감사합니다! 쉬엄쉬엄 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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