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 Cubano#6] 때로는 곤란해도 괜찮다.

in #kr-series6 years ago (edited)

''산티아고데쿠바'에서 보낸 10일의 시간이 마무리되었다. 혼자 시작한 여행에 어쩌다 보니 동행인이 생겨버렸다. 주머니 사정상 여러 도시를 여행할 수 없었고 아바나를 가는 길에 트리니다드에 들러 2 - 3일 머물기로 했다.

함께 떠나기로 한 아침 알레는 오랜만에 집에 들러 성경책을 포함한 단출한 짐을 챙겨왔다. 쿠바에서 보통 관광객들은 '비아술'이라는 버스를 타고 다니는데 가격이 꽤 비싸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비아술이 35 CUC이라면 트럭을 개조한 로컬인 대상 비공식 버스는 5 CUC 정도. 돈이 없는 우리는 당연히 로컬 버스를 타러 갔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아침 9시, 20명 이상 승객을 모아야 출발할 수 있다고 한다. 짐을 대충 버스에 구겨 넣고 기다리는데 1시간쯤 지나도 우리 포함 승객이 8명 정도뿐. 믿음을 가지고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한다. 오히려 이탈자가 생긴다.

오후 2시, 여전히 승객은 한참 부족하다. 망했다. 운전사는 곤란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가고 싶지 않단 뜻이 분명하다. 그는 내일 다시 오라며 우리를 버스에서 내보냈다. 날씨는 매우 더웠고 밥 한끼 먹지 못하고 과자로 연명하며 기다린 시간(그림도 그리고 구경도 하고 글도 쓰고)은 참을만했지만, 나의 지갑 사정은 괜찮지 않았다. 나는 죽는 목소리로 호들갑을 떨었다.

-우리 망했어 어떡하지...

우리 둘 다 버스가 출발 못 할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로컬버스비+숙소 하루치+푼 돈이 전부였다. 비아술을 타고 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그 외 돈은 달러뿐, 바꿔놓은 여분의 돈이 없었다. 그리고 주말 동안 Cadeca는 문을 닫는다. 즉, 내일까지 돈을 못 바꾼다. 이 돈으로 버텨야 한다. 후회할 땐 이미 늦었다. 되돌릴 수 없다. 정말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잖아. 절망적이다.

-걱정하지마. 방법이 하나 생각났어. 잘~ 하면 괜찮을 거야.
-그게 뭔데? 진짜야?
-일단 가자.

설명은 생략한 채 오토바이 택시 두 대를 잡더니 뭐라 뭐라 말한다. 익숙해진 오토바이 택시를 타고 난생처음 보는 인근 동네에 도착한다. 시내도 아니었고 관광지도 아니었다. 마을의 아이들이 보였고 가정집만 빼곡한 로컬동네였다. 그는 나를 나무 뒤에 숨기듯이 세워놓고 아이에게 신신당부하듯 말한다.

내가 부를 때까지 여기 꼼짝하지 마.

끄덕끄덕. 5분이 채 지나지 않아서 밝은 미소를 띤 채 그는 돌아왔다. 그리고 첩보작전을 수행하듯이 조용하고 민첩하게 나를 끌고 한 민가 안으로 후다닥 들어갔다. 침대 두 개가 놓여있었다. 80년대에 존재했을 것 같은 다이얼을 돌리는 TV가 한쪽 구석에 놓여있었다. (채널은 단 3개뿐이다) 집안 내부는 공사중이다. 집은 아담하지만 알레네 집에 비하면 궁궐이다. 화장실도 있고 간단한 주방에 조리기구도 있다. 그야말로 사람 온기가 느껴지는 집이다.

-인사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저씨야.
-아..안녕하세요.

그분은 알레가 가장 친하게 지냈던 형제 같은 친구의 아버지였다. 나머지 가족들은 미국으로 망명을 갔고 아저씨는 돌아올 부인을 위해 스스로 집을 고치고 계셨다. 집을 고치는 비용은 미국의 가족이 보내주고 그때그때 자금 사정에 맞춰 공사가 서서히 진행되었다. 영화 노트북이 생각났다. 로맨틱하다.

알레의 표현을 빌리자면 쿠바 정부는 10원 한 장 세어나가는 걸 용인하지 않았다. 세금이 세는 건 용서할 수 없는 불법 행위고, 불법을 자행하는 범죄자에게 자비롭지 않다. 이전 글에서 말했듯이 여행객 전용 숙소 'Casa'를 운영하고 싶으면 허가와 매달 관리를 받고 세금을 내야 했다. 돈을 받든 받지 않든 정부의 허가 없이 여행객을 재워주는 행위 자체가 불법이다. 알레는 내게 여기 있는 동안 이웃의 눈에 띄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네가 날 괴롭히지만 않으면 큰 소리 날 일은 없을 텐데.'

누군가 만약 나를 보고 신고한다면 나를 재워준 그 마음씨 좋은 아저씨는 내게 온정을 나누어 주었다는 이유로 벌금을 물어야 했다. 그런데 그 아저씨는 그냥 단번에 알겠다고 한 후, 인자한 미소로 우리를 이틀 밤이나 재워주셨다. 막중한 책임감과 미안함을 느끼며 내가 불편해하자 알레 녀석이 말한다.

-괜찮아. Stella 다 돕고 사는 거야! 신이 우릴 지켜주기에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리고 침대에 벌렁 눕는 그를 보며 참 속 편한 녀석이라 생각했다. 어쨌든 달리 방법이 없었다.
정말 그 이틀간 쥐죽은 듯 지내려고 노력했다. 아저씨는 말이 통하지 않는 나에게 밥도 해다 주시고 차도 끓여주시고 샤워를 할 수 있도록 뜨거운 물도 끓여 주시고 머리빗도 찾아주셨다. 심지어 리모컨을 내 쪽으로 주며 보고 싶은 걸 보라며 미소지었다. 천사가 아닐까...아저씨의 친절을 통해 그동안 쿠바인을 모욕하고 미워했던 마음을(너희 쿠바인들은 다 사기꾼이야! 네츄럴본 사기꾼!!!!! 거짓말쟁이들! 등등...) 깨끗이 씻게 된다. 감사합니다.

심지어 월요일이 되고 우리가 떠날 때 나는 정말 고마워서 얼마 안 되는 돈이라도 맛있는 거 사드시라고 드렸는데 극구 거부하셨다. 하아. 어쩌면 알레와 이렇게 다를까. 알레 같으면 하나님이 보내준 돈이라며 냉큼 챙겼을 텐데! 그렇지만 사실 다 알레 덕이다. 알레는 어떻게 이런 좋은 분을 아는 걸까. 정말 그의 말대로 돈 없는 여행객을 혼자 두지 않고 도와주는구나. 평소 같으면 소심한 나는 빚지는 기분으로 거절했겠지만 알레의 조언을 받아들여 그냥 고마워만 하기로 했다. 대신 앞으로 누군가를 도와줄 기회가 있다면 그때 돕기로 한다.


그 아저씨 집에서 하룻밤 자고 난 다음 날, 조용히 누워있던 알레는 좀이 쑤셨는지 일어나서 내게 통보했다.

-Stella, 우리 이모 보러 가자!
-응? 뭐라고? 거길 내가 왜 가?
-가자가자가자!!! 가가가가! 여기서 가깝단 말이야~ 나 큰소리 낸다?

악마다, 악마! 나는 남자친구가 생겨도 절대 부모님에게 보여준 적이 없는데? 사귀는 사이라도 남의 집에 불쑥불쑥 찾아가고 그런 사람 아닌데... 내가 왜 너희 이모 댁에 가야 해???
그러나 내가 그를 이기는 방법 같은 건 어차피 없다. 조용히 원래 그 동네에 사는 주민처럼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진짜 그의 이모 댁에 도착했다.

연락도 없이 왔건만 그들은 익숙한지 알레를 반겨준다. 그리고 나를 보며 놀라지도 않는다. 나는 어색해 죽을 것 같았지만 인사를 했다. 그러자 그들이 물었다.

-그런데 둘이 무슨 사이? 애인인가?
-아니에요! 저흰 친구예요. Amigo y Amiga!!

내가 황급히 손사래 치며 대답하자 뒤에서 사악한 얼굴로 알레가 말했다.

그래 우린 아.미.고.

아. 미. 고. 한 글자씩 힘주어 끊어 말하면서 내 뒤에 서서 글자 수에 맞춰 배 아랫부분을 활처럼 그러나 무척 상스럽게 앞뒤로 튕겼다. (장도연의 에너지 나눠주는 그 포즈랑 비슷하다) 주변 사람들을 빵 터졌고 난 어이가 없어서 얼굴이 빨개졌다.

-나랑 결혼할 여자야. 하하하하하
-쟤 진짜 미쳤나 봐 아니에요! 절대 아니야!!!

어이가 없었다. 나는 속으로 내가 미쳤냐. 너랑 결혼하게. 너와의 악연과 나의 고통은 쿠바로 끝낼 것이라고 결심하듯 내뱉었다. 그는 날 부엌에 떠밀더니 '맛있는 거 해줘'라고 했다. 정말 염치가 없는 놈이다. 처음 본 남의 집 부엌에서 내가 어떻게 요리를 해. 혀를 끌끌 차더니 착한 알레의 친척들이 말려 나는 그냥 채소나 몇 개 씻었다. 그들은 알레와 다르게 무척 예의 바르고 상식적인(?) 분이었다. 그중 한 분이(6촌으로 추정) 영어를 하셔서 알레의 사고뭉치 어린시절에 대해서 말씀해주셨다. 정말 못 말린다고 했다. 누굴 닮은 지 모르겠다고. 나는 엄청나게 공감이 되어서 같이 흉을 보았다.

식사가 완성되고 그날따라 이상하게 유독 신난 알레는 '내가 모히토 만들어줄게!!'하고 폭주하더니 밖에 나가 정체불명의 푸른 잎사귀를 뜯어왔다. 그리고 안전한지 확신할 수 없는 모히토 한 잔을 기대하는 눈빛으로 내게 내민다.

-아....나는 별로...
-내가 만든 거잖아! 너를 위해 손수 만들었어!
-우리 아저씨네 가야 해. 취하면 안돼. 나 주량 약하잖아
-한 입만 마셔봐! 진짜 맛있어!

합리적인 항변도 안 먹혔다. 그리고 한 입 맛본 모히토는.. 어? 맛있잖아? 정말 모히토였다. 오늘 받은 스트레스만큼 모히토를 꿀꺽꿀꺽 삼켰다. 그리고 럼주는 곧 내 온몸으로 퍼져 나가 나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졸려.. 기억나지 않지만, 눈을 뜨니 안방 천장이 보였다. 모르는 사람 안방침대에서 정신을 잃고 잤다. 살짝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술에 깼기에 부끄러운 표정으로 '죄송하고 감사했습니다. 전 이만 집에 가볼게요.' 인사를 하고 집을 나왔다.

한참 걷고 나서야 날 따라온 알레는 어찌나 이모가 내 걱정을 하든지 등쌀에 못 이겨서 더 있고 싶은데 따라 나왔다고 투정을 부렸다.

-오랜만에 가족들 보니깐 너무 좋았어. 고마워.
-나도 즐거웠어. 민폐를 끼치긴 했지만
-근데 모히토 진짜 맛있지 않았어?
-맛있긴 하더라...

술기운 때문인지 친절한 환대 덕분인지 둘 다 조금 신났던 것 같다. '알레 주변에 좋은 사람이 있구나.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라는 문구를 좋아한다. 지나고 나면 나쁘기만 한 일도 좋기만 한 일도 없기 마련이다. 소심하고 작은 일에도 울고 웃는 나는 물론 감정에 충실해서 이리저리 흔들리기는 한다. 그러나 역시 예상치 못한 어려움 덕택에 쿠바 사람들의 따뜻한 면모와 순수한 호의를 받게 되었다. 저 멀리 알 수 없는 미지의 나라 쿠바가 조금은 친근하게 느껴졌다. 살다 보면 이렇게 바라지 않았던 마법 같은 순간이 선물처럼 찾아오곤 한다. 그래서 때로는 곤란해도 괜찮다.


Mi Cubano 시리즈
[Mi Cubano#1] 첫 만남 - 난 생각보단 괜찮았고, 넌 날 쉽다고 생각했다
[Mi Cubano#2] 예고된 불협화음의 시작
[Mi Cubano#3] 단 한순간도 지루하지 않았다.
[Mi Cubano#4] 사랑하지 않아도 특별한 사람
[Mi Cubano#5] 그렇게 마음이 열리다.

Sort:  

I upvoted your post.

Keep steeming for a better tomorrow.
@Acknowledgement - God Bless

Posted using https://Steeming.com condenser site.

마치 소설을 읽는 것 같은 멋진 글이네요, 1편 부터 다시 정독해봐야겠어요~^^

와 정주행이라니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_^

세상 어느 곳이든 마음 따뜻한 사람들은 존재한다는 걸 새삼 생각하게 됩니다. 이번 편도 잘 봤어요^^

네- 맞아요 나쁜 사람도 있고 따뜻한 사람도 있고 또 어디선가 나쁜 사람이 저기선 따뜻한 사람이기도 하고 평면적이지 않은 알쏭달쏭한 세상이지만 또 그게 매력이죠 :D

마음을 여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마법같은 순간들이 그걸 가능케 했네요.

가끔씩 우연이 지나쳐서 때로는 누군가 설계해놓은 함정 같은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죠. ㅎㅎㅎ 지나고나니 이미 감당도 못할만큼 마음을 너무도 활짝 열어버렸더라고요.

문장 하나하나 다 좋아요 :) 오늘 할 일 있는데 일해야 하는데 지금 완전 정주행중 ㅋㅋ

유키님 일을 방해했네요. 여전히 읽고 계신것 같은데 집중력이 좋으신것 같아요 ㅋ 으엇 ㅎ 영광이에요 ㅋㅋ덕분에 저도 정주행중^_^

Coin Marketplace

STEEM 0.26
TRX 0.11
JST 0.032
BTC 63617.36
ETH 3070.79
USDT 1.00
SBD 3.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