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 Cubano#1] 첫 만남 - 난 생각보단 괜찮았고, 넌 날 쉽다고 생각했다
프롤로그
꼭 쓰여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내가 흔들릴 때마다 우리의 이야기를 쓰면 유명해질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진짜 사랑이 뭔지 증명할 수 있다고 설득하듯이 말하곤 했다. 그때마다 반쯤 그가 순진하다고 생각하고 반쯤은 그 말을 믿었던 것 같다.
나는 몇 번이나 이 이야기를 쓰려고 시도하곤 했지만, 완전히 쓴 적도 완전히 말한 적도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떤 날은 조금도 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고 어떤 날은 모두 다 쏟아내고 싶었다. 소설인 척해볼까. 1인칭이 아니라 3인칭으로 써볼까. 그로 빙의한 1인칭으로 쓸까. 좋은 부분만 담아낼까. 단편적으로 쓸까. 수많은 고민을 했다. 내가 글쓰기 연습을 더 하고 조금 나은 실력이 되면 써야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서랍에서 사진기를 찾다가 우연히 포스티잇 몇 장에 쓴 메모들을 발견했다. 그에 대한 기록이 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신기하게도 남아있었고 아직은 글씨가 뚜렷이 보이지만 곧 바래지거나 내 기억에서 사라질 것 같았다.
이 이야기를 영원히 내 마음속에 묻은 채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다. 나는 못 견디게 이 이야기가 하고 싶다. 여러 가지 생각하지 않고 그냥 일단은 한 번은 쭈욱 원하는 대로 한 번은 이야기해야겠다.
이제 정신적 충격에서 많이 벗어나서 거리를 둘 수 있게 되었고 난 이 이야기를 할 준비는 되었다.
스팀잇의 힘을 빌려 재지 않고 솔직하게 내가 하고 싶은 이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한다.
이건 사랑 이야기일 수도 있고 사람이야기일 수도 있고 인생이야기일 수도 있고 성장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 이야기가 뭐가 될진 다 써봐야 알 것 같다.
남미의 장기 여행자라면 누구나 쿠바를 간다. 당연히 나도 쿠바에 갔다. 쿠바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아무 준비도 하지 않고 나는 쿠바에 갔다. 쿠바는 한 달 정도 있을 생각이었다. 그리 짧지도 길지도 않지만 충분해 보이는 시간이었다.
무얼 상상해도 기대 이상이라는 쿠바, 쿠바는 조금 특이하긴 했지만, 아바나의 일주일은 생각보다 평온했다. 한 가지 실수한 건 내가 현금을 넉넉히 챙겨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생각보다 여행자 물가가 비쌌고 나의 카드는 쿠바에서 먹통이었다. 나태하게 일주일을 보낸 후 그냥 충동적으로 재밌어 보이는 제2의 도시 '산티아고데쿠바'로 떠났다.
알레를 만난 건 '산티아고데쿠바'에 도착한 첫 아침이었다. '산티아고데쿠바'의 날씨는 환상적이었고 하늘은 파랗고 집들은 아름답고 대도시지만 아기자기하고 깔끔했으며 사람들은 아바나보다 훨씬 친절했다. 나의 기분은 하늘로 솟아있었다. 정부에서 운영하는 100원 정도의 수제 아이스크림을 먹고 행복 치사량에 달아 거리 사진을 마구마구 찍고 있었다.
그때 웬 남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그게 알레였다. 그의 첫인상은 특별히 기억에 남진 않는다. 그 당시에는 쿠바 사람들이 어떤지에 대해서 정보가 전혀 없었기에 그가 조금 다르다는 걸 몰랐다. 다만 나는 '안녕! 난 너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남자의 의중이 궁금했을 따름이었다.
나는 아주 버릇없게도 그의 호의적인 인사말에 이렇게 대꾸했다.
-안녕? 나는 돈이 없어. 나는 영어로 말 거는 사람들은 아주 싫어해. 그들은 내 돈을 노리거든. 그런데 난 진짜 돈이 없어. (문법 하나도 안 맞는 초 단순 스페인어)
-무슨 소리야. 난 그냥 너랑 이야기를 하고 싶다니깐. 원한다면 스페인어로 말해줄게.
-미안하지만 난 스페인어 못 알아들어. 돈 없다고.
끈질기게 내게 이야기하자는 그는 자기가 날 대접하겠다고 했고 테이블이 있는 슈퍼 같기도 하고 카페 같기도 한 야외 테이블 그늘 한구석으로 날 데려갔다. 난 사이다 비슷한 걸 시켰고 당연히 그에게 얻어먹을 생각은 없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를 하려기에 날 데려왔을까. 이 남자의 목적이 뭘까. 굳이 확인하고 싶던 나는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지루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하나도 관심도 없어 보이는 김이 새는 영혼 없는 우리의 대화가 그럭저럭 이어졌다. 심지어 너무 지루해 슬리퍼를 벗고 의자 위에 발을 올리고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대체 날 부른 이유가 뭐지 알 수 없는 놈이다.
슬슬 집에 가려고 얼마냐고 물으니깐 웨이터님은 이미 계산을 했다고 한다. 그는 그 순간 씨익 웃고 있었다. 가난한 쿠바인에게 얻어먹고 입을 씻고 간다는 건 내겐 불가능한 일이다. 다음은 내가 사고 빨리 이 빚을 청산해야지. 그는 많이 해본 듯 '노래 들으러 갈래?' 다음 코스를 권유했고 나는 알겠다고 했다.
그가 데려간 곳은 Casa de la Musica! 그 장소는 누구랑 와도 무척 흥미로운 음악 바였다. '산티아고데쿠바'는 음악으로 유명하다. 마치 '부에나 소셜 클럽'같은 라이브가 경쾌하게 이어지고 사람들은 춤을 추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관객들은 옹기종기 나무 의자에 앉아있다. 박수도 치고 리듬도 타고~ 그렇다. 나는 단순한 인간이다. 이 인간의 의도는 잊었고 그 분위기와 음악에 빠져들었고 이곳을 소개해준 그에게 고마움도 느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에게 맥주를 한 캔 사서 내밀었다. 고맙기도 하고 얻어먹은 것도 있으니깐.
그는 뭔가 조금 감동한듯한 얼굴로 절대 내가 꺼내지 않았으면 하는 말을 꺼냈다.
'춤출래?'
절대 싫다고 몇 번이나 거절했는데 어느새 나는 그의 리드에 따라 스텝을 억지로 밟고 있었고 그 꼴은 아마 목각인형 같았을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는 '노'라는 말을 못 듣는 필터가 귀에 장착되어 있다. 제 맘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독재자였다. 난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고 그 끔찍한 시간이 얼른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다행히 그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음악을 듣고 기분이 한껏 고취된 나는 어느덧 그의 다음 코스도 따라간다. 그곳은 LP판을 틀어주는 분위기가 끝장나는 바였다. 쿠바는 모히토가 유명하지. 그는 내게 한 잔을 권하고 자기도 한 잔 마신다.
옳지! 이 녀석 네 원래의 목적을 드러내시지. 나는 순순히 덫을 노는 사냥꾼처럼 모히또 가격을 계산했다. (쿠바에서는 3 CUC짜리 음료수는 6~10 CUC으로 팔아먹고 뒤로 커미션을 챙기는 사기는 일상이다) 모히토 가격은 정상적이었다.... 어... 나는 좀 김이 빠졌다. 얘 뭐지.. 그리고 술도 한 잔 취했고 음악도 좋고 내 마음이 어느새 몽글몽글해져 버렸다.
얼굴이 시뻘게지자 그는 테라스에 의자를 두 개 끌어와서는 앉으라고 했다.
음악을 한참 듣고 평화로운 거리를 바라보고 아무 걱정도 근심도 없었다.
(쿠바 모히토는 고급 럼주가 잔뜩잔뜩 들어간다)
-키스해도 돼?
-왜?
-그냥 하고 싶으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키스가 뭐 어려울 일도 아니고 분위기에 취하기도 했고 키스타임 같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 얜 생각보다 키스가 참 별로구나.
별거 없는 그 키스를 끝내고 술에 더 취하면 길바닥에서 드러누울 것 같아서 숙소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전날 만날 여행객을 따라 숙소에 갔는데 원래 1박에 25 CUC이었던 숙박비를 돈이 없어 옮긴다고 하자 15 CUC으로 깎아줬다.)
내일도 만나자. 12시에 광장으로 와.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좋은 곳을 소개해주기도 했고 의도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딱히 내 돈을 노리는 것 같지도 않았다. 같이 있는 게 나쁘지 않았던 하루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지 그만 만나면 되지라는 생각을 했다.
생각보다 싱거웠다. 알레와의 첫 만남은.. 그냥 기억에 남는 거 없이 평범했다.
알레는 '산티아고데쿠바'가 고향이다. 원래는 아바나에서 살았는데 내가 '산티아고데쿠바'를 가기 일주일 전쯤 '아바나'에서 추방당했다고 한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 알게 된 건데 왜 그날 그는 끈덕지게 내게 이야기하자고 졸랐을까.
간절해 보였던 그의 말투와는 다르게 그 답은 너무 심심해서였다.
그는 원래 인터넷을 쓰러 가는 길이었는데 (그 당시 쿠바 인터넷은 제한된 공간에서 한 시간에 4~6천 원을 내고 아주 느린 속도로 정부 감시를 받는 메일을 써야만 했다) 마침 그 공간이 문이 닫혀 할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때 난 염색으로 머리가 노랬고 그는 처음 날 서양인으로 착각했다. (그는 동양인을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한국인) 내가 뒤돌아본 순간 그는 고민했다고 한다. 아씨 그냥 갈까... 한국인 같잖아. 그때 그의 안에 목소리가 말을 했다고 한다. 신경 쓰지마. 그냥 말을 걸어!
단지 몇 번의 우연과 심심하다는 원초적인 이유로 평소 좋아하지도 않는 동양인에게 끈덕지게 말을 걸었을 뿐인데 호기심 많은 내가 걸려들었다. 그도 내게 딱히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그 이상한 야외 테이블에서 내가 발을 올린 순간 그 발이 너무 좋았다고 한다.
평소 나는 발이 콤플렉스여서 양말을 벗지도 않는다. 우리 오빠는 내 발을 낙하산이라고 불렀다. 쿠바에서 거지꼴이었다. (난 큰 짐 없이 작은 배낭과 에코백 하나 들고 마실 오듯 쿠바를 왔다. 초고속으로 출국장을 빠져나가는 나를 보며 비행기에서 만난 한국인 모녀는 그게 짐이 다냐고 물었다) 여행 동안 모든 걸 내려놓았기 때문에 발 정도 보여주는 건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쿠바 사람들은 발에 아무도 신경을 안 쓰는데 잘 씻기고 컴플렉스를 가리기위해 바른 매니큐어를 보며 발관리를 참 잘했다. 얘는 전신이 참 깨끗하겠다는 이상한 매력을 느끼셨단다.. 이상한 발 페티쉬다. 그때부터 내가 예뻐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Casa de la Musica에서 맥주를 건넨 순간 날 관광시켜줘야겠다고 생각했단다(?) 자기가 무얼 사달라고 말한 적도 없는데 알아서 맥주를 바치는 관광객은 처음 봤다고 했다. 그때 정말 감동한 것 같았다. 아마도 자기를 동등한 인격으로 대하는 내 진심을 본 것 같다. 난 쿠바에 관해 일도 몰라 왜 그가 그렇게 감동한 것인지 나중에야 알 수 있었다. 쿠바에서는 사기꾼 수 못지않게 쿠바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이용하다 떠나버리는 관광객 수도 아주 많았다.
그냥 네가 내게 음료수를 사줘서 빚을 지기 싫어 맥주를 사줬을 뿐인데...
그렇게 몇 번의 우연들과 사소한 접점들이 만나 우리의 만남은 이어지게 됐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그때 넌 키스를 하지 말았어야 해. 네가 하고 싶지 않다고 했으면 난 키스하지 않았을 거야.
그건 일종의 시험이었다. 하지만 키스하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망할 놈. 그때 난 멕시코에 두고 온 남자친구가 있었다. 헤어진 건 아니었고 진심이 아니 지도 않았지만 무언가를 약속한 적도 없었고 그에겐 남자친구가 있다고 말했었다.
그의 입장에선 내 사랑이 정말 가벼워 보였을 것이고 이 여자 또한 그냥 항상 보던 그런 여자들과 비슷하구나. 나쁜 사람은 아니지 즐겁게 즐기다 가야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랬다. 그는 날 쉬운 여자로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상처받았을까 봐 '네 키스는 정말 별로야.'라는 말을 하지 않은 게 후회가 된다.
스팀잇에서 가장 집중해서 읽은 글이에요!! 자유롭게 사시는 듯한 영혼의 소유자인 fgomul님이란 사람에 대한 흥미도 많이 생기네요 ㅎㅎ
우와 감사합니다. 자유로운 영혼티가 나나요? ㅎㅎ 제 일상은 그닥 자유로운 방식은 아니지만서도 늘 자유를 꿈꾼답니다.
네 티 많이 나요 ㅎㅎ 맥주 한 잔 기울이며 살아온 이야기 밤새 듣고 싶어지는 그런 분같은 느낌이랄까 ㅎㅎ
안녕하세요. 아, 참 좋습니다. 잘 읽었어요. 첫 문장부터 좋았어요. 자주 봬요. 다음 편도 기대합니다.
afinesword님 반갑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이 글을 지워버릴까 바보같이 고민하던 중에 힘이 되는 말씀이시네요. 다음편도 일단계속 써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근사한 추억이네요.
네 맞아요! 라고 대답해드리고 싶지만 아마 뒤로갈수록 추잡해질거에요 ㅋㅋㅋ
다시 읽고 있어요.
아~~~ 이 댓글의 의미를 이제야 알겠네요. ㅎㅎㅎㅎㅎ ㅠㅠㅠㅠㅠ
ㅋㅋㅋㅋ 이제는 말할 수 있다~ ㅋㅋ 경쾌한 여행에세이인 척 하는 첫 편
아 글이 너무 좋아요 ㅠㅠ
지금 부터 정독을 시작합니다!!!!!!!!!!!!!!!!!!!!!!!!!!!!!!!!!!!!!
샘터님 아침부터 심장설레게 ㅎㅎ 영광이에요 ㅋㅋㅋㅋ
우와 완전 재밌네요 ㅋㅋㅋㅋ
진짜 저도 이렇게 솔직하고 담백하고 재밌게 글을 쓸 수 있으면 좋겠단 생각!!
저도 이런 이야기들이 좀 있는데, 전 여행지에서의 연애나 남자 이야기를 쓰면 평가 받을거야... 라는 생각에 늘 갇혀 있었나봐요. 솔직해서 좋아요. 왠지 저도 제 이야기를 써보고 싶은 느낌 :)
내가 한 경험도 숨기지 않아도 되는구나, 라는 용기 받고 가요 ㅎ 감사합니다.
재밌게 읽어주셨다니 영광이에요. 원래 지나칠 정도로 솔직하긴 했는데.. 스팀잇이 아니였으면 글 끝까지 쓰지 못했을 것 같아요 ㅎㅎ 플랫폼이 가진 힘이란 게 있더라고요.
물론 세상에 다양한 사람 많으니 비난하거나 평가할만한사람도 분명 있겠죠. ㅎㅎ 이렇게 긴 글을 비난하려는 목적으로 보는 것도 싶지 않을거란 생각에 에라 모르겠다 썼던것같아요. ㅎㅎ 이후 따뜻한 관심덕에 맘편히 썼어요:D yuky님 이야기도 기대되는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