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감정] 04 다름에서 피어나는 감정
면접 때문이었다. 심리학에서 배운 게 뭔지 자꾸 묻는 면접관 앞에서 할 말을 찾기 위해 답을 한마디로 정리해야 했다. 다양한 심리학 과목을 나름 열심히 이수했지만 우습게도 내가 내린 결론은 단지 이뿐이다. '사람은 모두 다르고 다양해서 함부로 재단할 수 없으며 개인을 이론으로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즉, 배우면 배울수록 인간을 알 수 없단 사실만 배웠단 뜻이다. 이런 허무주의적 결말 앞에 도대체 이럴 거면 뭣하러 심리학을 배웠냐는 현타가 오기도 했지만 교훈 하나는 마음속에 남기고 싶었다. 그래서였다. 다름을 받아들이는 관용적인 인간이 되고자 무던히 애를 썼던 건.
어쩌면 고등학교 때 홍세화 씨가 썼던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를 읽고 그때부터 '똘레랑스'란 단어에 꽂혔을지도 모른다.
“톨레랑스는 ‘관용’이라기보다 ‘용인’이며 ‘화이부동’이다.”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고 축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다름을 견디는 것이 톨레랑스이며 ‘서로 화평하면서 획일화하지 않는다’는 화이부동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 그리고 권력의 강제에 맞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야말로 톨레랑스라고 힘주어 말한다.
출처: 홍세화의 더 깊어진 '톨레랑스'중 발췌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173832.html#csidx55cc2f684d7f5b6a173da0f745868fa]
'똘레랑스' 라는 마법의 단어가 우리 사회에 있다면, 아니 내 안에 진정 한 자리를 차지한다면 나는 그 어떤 역경과 거지 같은 환경에서도 꿋꿋이 부끄럽지 않게 그런대로 괜찮은 삶을 살아갈 것만 같았다. 모두 다른 인간 군상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이 인간 사회에서 관용적인 인간이 되는 건 참 멋져 보였다.
그런 나의 무의식적인 믿음은 내게 큰 오해를 남겼다. 별다른 근거 없이 나는 어느새 스스로 '포용력이 있는 제법 관용적인 인간'으로 여겨졌다. 어느덧 나를 묘사하는 명사로서 '관용'이 자리 잡은 것이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본다. 내가 관용적인 인간이란 증거는 뭐였지?
동성애자, 이성애자, 트랜스젠더, 무성애자, 다자연애자 등등 성적 취향과 정체성에 거부감 없이 열려있음. 나와 다른 종교와 정치관을 가졌어도 내게 무리한 강요를 하지 않는다면 생산적인 대화가 가능한 점. 어떤 스타일과 성격의 남자라도 서로 애정이 있다면 길게 오래 사귈 자신이 있다는 것. 다른 나라에 가서 답답하리 만큼 늦은 행정처리와 올 생각도 않는 제 멋대로 시간표의 버스에도 화가 나지 않았다는 일화.
일련의 증거를 찾다 문득 깨달았다. '대놓고 아예 다른 것, 다를 만하니깐 다른 것'에 대해서만 관용적이었을 뿐이란 걸. 물리적 거리만큼 생소한 라틴문화에서 공통점을 바라는 게 우습다. 당연히 다를 것이라는 마음의 준비가 끝나면 당황스러운 사건, 이질적인 문화는 용인하기 쉬워진다. 게다가 누가 등 떠밀어 억지로 하는 게 아닌 자의로 택한 여행이라면 마음을 열기는 한층 더 쉽다.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의 시각에 차이가 있는 것도 기독교, 개신교, 불교, 이슬람교 등등 종교 사이의 다름이 있는 것도 무척이나 당연하고 누구나 예상할만하다.
그렇다면 예상치 못했던 다름을 마주한다면, 비슷하다고 믿었던 사람에게서 넘을 수 없는 간극을 발견한다면 나는 어떠할까? 여전히 아무렇지 않게 다름을 용인했던가? 아니다. 처음엔 믿을 수 없을 거고 무척 당황할 거고 이내 실망하거나 때로는 화가 났을 거다. 한 문화에서 자라 늘 익숙하고 친숙한 사람에게서 갑작스럽데 느껴지는 다름은 아예 대놓고 생경한 남보다 훨씬 받아들이기 거북스럽다.
그런데도 스스로 관용적인 인간임을 자처해온 믿음의 근원은 나와 다른 누군가와의 거슬리는 만남은 늘 피하며 살아온 행동 양식 덕분이었다.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 아니 보고만 있어도 답답해지는 인간군상을 마주할 때면 굳이 화를 내거나 토를 달지 않았다. 그냥 그다음부터 안 보면 그만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혹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로 주위를 채워놓은 채 안전지대에서 편안하게 고립되어 지냈다. 그러니깐 딱히 다름을 받아들일만한 일이 생기지 않았을 뿐이다. 그것도 모르고 '역시 난 포용력이 있어서 부딪칠 일이 없네. 하하하' 하면서 만족스러워했다.
이해관계가 얽히지 않았다면, 일회성 만남이라 다시 볼 일이 없다면 그 누군가와 나와 다르다고 해도 그다지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어차피 안 볼 사이 알게 뭐람. 내 인생에 상관도 없는 사람.' 그건 내가 특별히 관용적인 인간이라서 넘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누구든지 그럴 수 있다. 진짜 다름은 내 일상과 밀접하게 결부되었을 때 생겨난다.
이 믿음이 흔들린 건 역시나 직장생활을 시작하면 서다. 내 스타일이 아니어도 말이 안 통해도 늘 일상적으로 만나야만 하는 사람이 생기고야 마는 곳.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만남. 보통 그 다름이 문제가 되는 사람은 상사일 경우가 많다. 나는 그들을 무시할 선택권 같은 건 없고 오히려 그들이 내 밥줄을 쥐고 있다.
나는 그다지 관용적 인간이 아니었다. 아니 오늘 깨달은 건데 '내 머리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사람의 다름을 반복적으로 목격하면 그 자체로 무지하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제 있었던 일도 역시 별 거 아니다. 회의를 끝내기 직전, 대표가 한 마디 했다. '새해인사도 먼저 할 줄 알아야 어른이 될 수 있는 거다. 그게 예의다.' 우리 모두 '네'라고 대답했다.
물론 대답과는 다르게 듣자마자 숨이 거칠어지며 뇌 속에 온갖 불만이 차오른다. '아 꼰대 또 시작이네. 명절 전에 인사했으면 됐지. 왜 남들 잘 쉬고 있는 연휴 마지막 날 그런 거지 같은 단체 카톡을 보낸 것도 모자라 아직도 꽁하게 잔소리하고 난리야.' 그동안 그녀와 있었던 권위주의적 일화가 자동으로 떠오른다. 그리고 생각한다. '난 저 여자가 정말 싫어!' 기분이 가라앉고 조금 우울해졌다. 뒷골이 당겨왔다. 그러다 드는 결론. '아 얼굴 보기도 싫다. 역시 이놈의 회사 오래 다닐 수가 없어.' 그 감정은 3시간이 지나도록 지속되었다.
아니 까짓것 먼저 '대표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12자 써서 카톡으로 보내면 될 일 아니야? 맞다. 그런데 왜 이다지도 짜증이 나는 걸까?
처음에는 고리타분한 권위주의에 대한 반감이라고만 생각했다. 권력은 그녀에게 주어져있고 계약상에 없었던 온갖 자잘하고 사소한 사적 영역까지 통제하고 가르치려고 하는 그녀가 꼴 사나웠다. 힘 좀 있다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대접받길 원하는 것 같은 태도도 같잖았다.
그런데 다른 각도로 생각해보니 어쩌면 이 갈등은 단지 그녀와 내가 서로 다를 뿐이기에 생겨나는 걸지도 몰랐다. 다른 시대 다른 경험을 지니고 자라 만들어진 가치관과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그러니깐 꼭 상사라서가 아니라 단지 사람으로서 내게 기대하는 걸지도 모른다. 말도 안 되지만 그녀와 내가 위치가 뒤바뀌었어도 똑같은 갈등이 있었을 거란 얘기다. 나는 그녀가 아부한다고 생각했을 테고 그녀는 나를 냉혹한 상사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불편한 이유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어 역할에 대한 기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내 기대와 다른 상대방의 언행이 주는 불협화음은 본능적으로 불쾌감을 선사한다. 직장에서 인간관계가 힘든 건 끝없이 서로가 다르다는 걸 확인하고 타협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면 결국 감정이 상하기 때문이다. 아랫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의 기준이 다르고 윗사람으로서 마땅히 함양해야 할 자질의 내용이 서로 다르다. 누군가에게 직장은 단순한 계약관계로 이루어진 일시적인 커뮤니티에 불과하고 누군가에게 직장은 여느 사적인 공동체와 다를 바 없는 그저 일이 공통 관심사인 지속적인 커뮤니티다. 이런 다른 생각을 지닌채 골치 아픈 일을 서로 긴밀히 협력해서 처리하고자 하면 사소한 지점마저도 서로 부딪힐 수밖에 없다. 그리고 보통은 그 다름을 용인하지 않기에 무언가 하나로 통일하는 방식을 택한다.
누군가 생각을 바꿔야 하는데 생각이 그렇게 빨리 필요에 의해 사람의 생각이 진심으로 바뀌진 않는다. 그러면 보통 권력이 없는 쪽이 억지로 생각을 바꾼 척해야 하는 부조리에 직면한다. 나는 언제나 그게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왜 직원들만 임원과 대표를 위해서 일방적으로 맞춰줘야 하는가? 그것이 합리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고 때로는 비효율적일 때도 있건만...'
그런데 이면을 잘 살펴보니 나는 관용에서마저도 대가를 바라고 있었다. 내가 이만큼 양보해주면 너도 당연히 이 정도는 양보해줘야지. 다음번엔 상대가 나를 한 번쯤 용인해주겠지라는 일말의 기대감. '왜 나만 일방적으로 계속 이해해줘야 해. 불공평해.' 이해타산이 맞지 않을 때의 분노와 실망. 이런 장사 속 이해관계가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관용에 적용되고 있었다. 그걸 진정 관용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해도 모르겠다. 나와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종종 '이해해주기조차 싫다!'라는 막연한 감정에 직면할 때가 있었다. 차라리 그냥 관용적인 인간이 되기를 포기하는 게 빠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진정으로 그냥 그 사람을 편히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 '다르구나. 화낼 일이 아니구나. 그냥 그렇구나.'하고 편안히 인정할수 있으면 좋겠다. 대가를 바라는 셈법이 아니라 세상을 관조하는 마음으로 일상에서 부딪히는 나와 다른 타인의 다름을 보고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미래의 먼 어느 날 '나도 제법 관용적인 인간이었어.'라는 혼잣말을 할 수 있기를.
P.S. 관용의 사전적 의미를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제까지 내가 알던 뜻과 좀 거리가 있었다. '남의 잘못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 관용은 베푸는 거란다. 나는 자신의 방식을 강요하지 않고 다름을 받아들이는 태도나 방식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흐음.. 글을 다시 써야 하나 고민하다 나처럼 넓음 의미로도 사용하는 사람도 있기에 그냥 적었다.
[안녕, 감정] 시리즈
01 입장 정리
02 감정을 드러내는 거리
03 평화의 날
저도 고물님과 같은 뜻으로 이해하고 있었는데요~
그게 아니었군요! 수양이 더 많이 필요한가봐요!
ㅋ 저처럼 받아들인 사람이 있다니 동질감 상승! ㅋㅋ 전 죽는 날까지 수양이 늘 모자랄것 같아요 ㅋㅋ 출근길에 이 글 한 번보고 마음잡고 있어요 ㅋ 오늘도 춥네요. 좋은 하루보내세요!
짱짱맨 호출에 응답하여 보팅하였습니다.
선 리스팀 후 정독^^ 요즘 눈이 아파요 ㅜㅜ
어헝 저도 자주 그래요. 보팅후 정독.
이번 글은 써놓고 보니 참 길고 재미가 없어요 ㅠ ㅋ 레이븐님 눈건강을 위해 그낭 넘기시는게 좋을지도 ^_^
저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공감할 내용입니다. 아예 나와 다른 종족이라고 생각하면 상대에 대한 기대치도 낮지요. 다름에 대한 태도는 어쩌면 상대에 대한 기대치에서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ㅎ
감정에 대한 통찰이 점점 더 예리해진다는 느낌입니다. 세심한 감정의 결을 가진 고물님에게 아주 적합한 시리즈라는 생각이 다시 한 번 드네요^^
기대없이 사람을 만나기. 이 말이 예전에는 허무하게 다가왔는데 최근에는 그토록 따뜻한 말도 없는 것 같아요.
솔메님 응원덕에 아무거나 더 편안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적인 저의 감정 시리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_^
사회생활을 하면서 내스타일이 아닌사람과 만날때, 저는 엄청 무관심한 편인데 권위를 가진 사람들은 그 무관심조차 허락을 하지 않더라구요.
관용은 구성원 모두가 배풀어야지 나혼자 관용을 가져서는 절대 관용적인 사람이 될수 없을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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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이님과 구두로도 살짝 이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ㅋ
맞아요 사실 상대방의 태도에서 기분이 나쁠 때가 많아요. 무관심도 허락하지 않는 권위주의 ㅠㅠ 여전히 거슬려요 무관용에 무관용으로 응대할테다 한다니깐요 ㅋ
뼈아프지만 어떤 조건을 달지 않고 관용적인 사람이 되어버려고 해요. 저를 위해서 ㅋ 얼마나 갈지는... ㅋㅋㅋ
저도 항상 그런 생각을 하고 살아요. '역시 사람은 한명한명 다 달라', '사람이 백명이면 생각도 백개야' 하는 마음을 품고살면 웬만한 일은 그냥 무난무난하게 넘겨지더라구요 ㅎㅎ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와 너무너무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간간히 밀려오는 짜증'까지도 없어지는 그날이 제가 완전히 관용적인 사람이 되는 날일것같습니다.ㅎㅎㅎ
문득 달라서 화가 나는 것도 좋게 생각하자면 아직 사람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남아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갑자기 드네요 ㅋㅋ
그래도 역시 정신적 평화를 위해서 무난무난하게 넘기는게 최고인것 같아요. 저도 네츄럴 본 느껴지는 짜증마저도 사라지는 그 날이 오기를 기다려야겠어요 ㅎㅎㅎㅎ
아무리 관용적이라 해도 굳이 매일 보며 스트레스 받는 건 힘들 거 같아요.
맞아요- 그게 최고죠 ㅠ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내키지 않지만 맨날 봐야하는 사람이 생기니깐요. 인생을 산다는 건 어쩌면 멘탈훈련일까란 생각을 부쩍 하고 있어요.
관용의 의미에도 위계(넓이와 깊이)가 있겠죠. 조금씩 자신이 아는 만큼 실천해나갈 뿐이죠.
여튼 옛날물건님은 갬성 롤러코스트 매력덩이
ㅎㅎ그렇겠죠 관용의 의미에도 관용을 가져도 될까요? ㅋㅋ
갬성 롤러코스터 매력덩이라니 ㅋㅋㅋ 부끄럽슴당
넓은 의미로는 '배려'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마음이 배려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배려는 자존감하고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고요. 자존감이 높은 사람일수록 배려심이 많다고 생각해요. 오늘도 좋은글 고맙습니다. 파이팅!!!
오늘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그들의 다름에 타격을 받았는데요. 자존감 높은 제가 배려심을 발휘해야겠어요...ㅋㅋㅋㅋㅋ :D 아니면 자본주의의 배려심을 발휘해보도록... ㅋ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D 나하님도 화이팅!
그냥 속으로 욕하고 가즈아~ 합시다. ㅎㅎ 꼭 그걸 한 마디 해야 하는 대표가 관용적이지 않은 걸로!
저도 쫌생이라 그런지 마음 속 욕을 해도 분이 안풀리더라고요ㅋㅋㅋㅋ 회사에서 관용은 기대하지 않는 걸로 정리했습니다. 가즈아~ 하고 싶은데 아직 내공이 부족합니다요 ㅠㅠ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