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조절에 관해

in #kr-psychology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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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 이미지 by @gamiee

감정을 애써 무시하려 하고 억누른다면 어떤 식으로든 탈이 나게 마련인 것 같습니다. 특히 머리가 아프거나 속이 더부룩하다거나 뒷목이 뻐근하다거나 해서 병원에 가보아도 별다른 원인을 찾기 힘든 경우, 신체적 증상이 억눌린 감정과 밀접한 관련성을 보이고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를 신체화(somatization)라고 표현하는데요. 무시되고 억눌린 감정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 한 구석에 켜켜이 쌓여서 우리의 삶을 저해하기 쉽습니다. 몸을 아프게 할 수도 있고 충동적이거나 그릇된 판단을 내리는 데 일조할 수도 있죠.

돌 전후의 아이조차 자기 마음대로 안 되거나 뭔가 마음에 안 들면 성을 냅니다. 뭔가 마음이 불쾌한데 그걸 자각할 능력이 아직 미발달돼 있고, 불쾌함을 감당할 재간이 안 되니 버럭 성을 내거나 들고 있던 물컵 같은 것을 던져서 불쾌한 마음을 흘려보낸다는 것이죠.

아이는 어떤 식으로든 이렇게 불편하고 불쾌한 감정을 표현합니다. 동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위협 상황이 지나간 이후 몸을 심하게 부르르 떤다든가 하는 식으로 불안과 공포를 흘려보내는 동물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나이를 먹어갈수록 노골적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미워도 밉지 않은 척해야 하는 경우가 많고, 화가 나는데 오히려 친근한 척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본래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다 드러내는 것은 사회화 과정에서 허용되지 않습니다. 아이가 울면 보통 '뚝' 그치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죠. 어릴 때부터 감정은 억지로 누르거나 감춰야 하는 것이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받게 됩니다.


감정에는 사실 많은 정보가가 담겨 있습니다. 소개팅을 나갔는데 애프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될 때 어떻게 하나요 남자분들? 이 여자와 함께 한 시간이 내게 쾌와 불쾌 중 어디에 더 가까웠는지 살펴보지 않나요. 어색하기도 했지만 뭔가 즐겁고 유쾌했다면 또 만나자고 말하겠죠. 반대로 어색하고 불편한 마음이 컸다면 두 번째 만남은 성사되기 어려울 것이고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상태에 대한 이런 정보뿐만 아니라 정서를 유발한 자극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죠. 암호화폐 가격이 지옥문을 두드리고 있다 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스팀잇에 쓸 글을 작성하는 동안 몰입을 경험하고 이 몰입 경험이 쾌에 가까운 어떤 것이라면 이 사람은 앞으로도 스팀잇에 글을 자주 써야겠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감정은 현재 상황에 대한 평가와 관련된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죠. 일요일만 되면 다음날 출근할 생각에 심하게 우울해진다면 현재 직장에 대한 불만족감이 크구나 생각해 볼 수 있겠죠.

감정에는 이처럼 많은 정보가가 담겨 있기 때문에 의사결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감정을 잘 활용하면 한 사람의 욕구가 무엇이고 그 욕구의 우선순위가 어떻게 되는지 세분화할 수 있죠. 욕구라고 표현했는데 가치라고 바꿔 말해도 별 상관이 없을 듯합니다. 점심에 어떤 메뉴를 선택할지 결정하는 것에서부터 어떤 배우자를 선택하고 삶에서 어떤 방향성을 갖고 살아가느냐에 이르기까지 감정은 의사결정 및 판단의 중요한 자료가 됨으로써 한 사람의 일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사회화 과정 자체가 감정친화적이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감정을 드러내기보다 감추는 것이 사회생활에서 득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사실 이해관계가 얽혀 있을수록, 감정을 상대방에게 오픈하는 것이 꺼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에 관한 많은 정보가가 감정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타짜들이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죠.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기 때문에 감정을 감추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가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이면 보통 '힘내', '괜찮아질거야'라고 말하기 쉽죠. 이는 위로의 말이기도 하지만 힘들어하는 상대방이 경험하고 있을 부정적인 감정들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상담일을 하는 저도 내담자의 부정적 감정과 직면하는 것은 부담스럽습니다(슬픔은 그나마 낫습니다. 분노 같은 감정은 제가 상담 경력이 일천하다보니 마주칠 때마다 당혹스럽죠). 하물며 상담을 업으로 삼고 있는 저도 이럴진데, 일반인은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슬픔이나 분노가 부담스럽거나 당혹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감춥니다.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기 싫다는 것이죠.


이처럼 감정을 무시하거나 억누르는 것의 적응적 이점이 분명 있습니다. 조직 문화가 강한 곳에서는 특히 그렇겠죠. 하지만 감정을 표현해도 되는 곳에서까지 이런 전략을 취하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하루에 쓸 수 있는 에너지의 양은, 개개인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일정합니다. 보팅파워 같은 거죠. 쓰면 쓸수록 줄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면 복구됩니다. 그런데 감정을 무시하거나 억누르는 것에는 상당한 에너지가 소모됩니다. 다른 데 쓰여야 할 에너지까지 끌어오니 그 정도가 지나친 경우 일상생활을 저해할 수도 있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여자친구에게 이별 통보를 당한 남성을 떠올려 봅시다. 슬픔과 분노를 비롯한 여러 감정이 뒤엉킨 혼돈의 감정덩어리가 이 사람의 직장 생활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먹고는 살아야 하니 출근을 하고 업무를 시작해 보지만 감정덩어리를 뒤로 밀쳐 놓는 데 에너지를 다 쓰다 보니 주의집중도 안 되고 일이 손에 잡힐 리가 없습니다.


무조건적으로 감정을 무시하거나 억누를 것이 아니라

"살면서 느끼는 매 순간의 정서를 자각하고, 그 정서가 우리에게 주는 정보를 읽어 그 의미를 잘 파악하며,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적절하게 반응하여 대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서 조절 코칭북, 35쪽.

말이 어려운가요?

어느 날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갔는데 집안 분위기가 냉랭하고 뭔가 싸합니다. 평소와 다르게 아내가 인사도 하지 않고 아이 밥 먹이는 데만 열중합니다. 남편은 그 분위기를 감지하고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뭔가 불안한 느낌이기도 하고, 힘들게 일하고 왔는데 인사도 없는 아내 모습에서 서운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일단 서운함보다는 불안함에 무게를 두어 무엇이 자신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인지 빠르게 두뇌를 회전시킵니다. 어제 자기 전에, '설거지 해놓고 출근할게'라고 말했는데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 때문에 화가 났나? 아니면 아이가 하루 종일 칭얼대고 보채서 기진맥진한 상태인가? 아니면 산처럼 쌓여 있는 설거지 더미에 아침부터 살짝 화가 났는데 아이가 칭얼대고 보채서 화에 기름을 부었나? 뭘까??? 어리둥절한 상태로 여러 가지 가설을 세워 보지만 마땅한 답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남편은 일단 쌓여 있는 설거지를 다 하고 방 청소를 하기 시작합니다. 아내가 아이 밥을 만들기 위해 부엌 쪽으로 자리를 뜨자 하던 청소를 멈추고 잽싸게 아이 전담마크를 실시합니다. 평소보다 훨씬 더 마음챙김해 가며 아이의 욕구 파악에 공을 들입니다. 아이도 평소보다 호응이 좋은 아빠의 반응에 신나 합니다. 아내가 아이에게 밥을 먹이는 동안 남편은 저녁을 만들고 상을 차리기 시작합니다. 아내는 밥상에서 하루 동안 힘들었던 일을 얘기하기 시작합니다. 적극 경청과 감정 반영을 시전합니다. 하루가 무사히 지나갑니다. 다들 눈치채셨겠지만, 이 사례가 제 얘기가 아니라고 말을 못 하겠네요. 과장된 부분이 있지만요. ㅎ


집에 들어가자마자 제 불안(+섭섭)을 인식하고 아내의 감정에 대한 가설을 세웠습니다. 감정을 우리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자기와 타인의 감정을 잘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식되지 못 한 어떤 것을 조절하기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감정은 자기 감정에 대한 인식보다 추론의 성격이 강할 수밖에 없지만 나중에 수정하더라도 일단 타인의 감정에 대한 가설을 갖고 들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싸한 집안 분위기와 쌓여 있는 설거지 같은 상황적/비언어적 맥락을 통해서 아내가 뭔가 화가 났다고 추론한 것처럼요.

자기와 타인의 정서를 인식하였으니 자기 및 타인의 욕구를 알아차리고 욕구의 우선순위를 정해야 합니다. 저는 섭섭한 감정도 들었지만 그것보다 아내의 화를 누그러뜨리는 것이 중요하겠다는 판단을 합니다. 아내의 감정과 감정의 기저에 있는 욕구에 우선순위를 둡니다.

"아내가 화가 난 것 같다. 여기서 판단 미스하면 2~3일은 감정적으로 힘들어지겠다. 집안을 좀 정리하고 그 다음에 상황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자." 상황이 좀 정리가 돼 가자 불안이라는 감정이 가리킨 제 욕구는 아내와의 평화적 관계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내와의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제 주요 욕구 중 하나인데, 평화적 관계에 뭔가 살짝 금이 갔음을 불안이라는 감정이 알려줬다고 여겼을 수 있죠. 아내의 화가 가리키는 아내의 욕구는, 이 역시 가설이긴 했지만 '집안일의 부담을 더는 것'과 '힘든 마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아내의 욕구에 우선순위를 두며, 그에 상응하는 행동이 따라옵니다. 아내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방안(집안일을 하고 아이와 놀아주는 것)을 찾아 실행했습니다. 이는 보다 장기적으로는 제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법이기도 하죠.

이 과정에서 섭섭함의 표현은 일단 억제했습니다. 아내의 마음이 누그러진 뒤 표현해도 늦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서를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상황과 맥락에 부적절한 표현은 표현이라기보다 '표출'에 가깝지 않나 싶습니다. 섭섭함의 표출이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판단하에 그 감정을 억제한 것이죠. 내가 이 감정을 표현했을 때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비춰질 것인지, 그리고 어떤 결과가 야기될 것인지 예측하는 능력은 정서조절 능력의 일부입니다.

어쨌든 이 사례의 경우 저녁 식사를 하며 아내의 마음을 들어볼 수 있게 되었으니 성공한 정서조절의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아내의 감정과 감정에 관한 제 가설이 맞았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납니다. 다만 제 감정을 잘 조절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아내의 감정까지 조절이 됐죠. 감정을 잘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 감정 조절의 과정이 평화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사실 임상심리전문가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처참히 정서조절에 실패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저도 사람인지라 한계와 결점과 모순이 있을 수밖에 없겠죠.


감정 조절 실패는 한 개인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감정 조절 실패로 인해 많은 분쟁과 폭력적인 양상이 야기되죠. 공교육에서 어릴 때부터 감정 수업을 진행한다면 한국 사회가 한결 유연하고 수용적인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상상도 해봅니다. 스팀잇을 지속하다 보면 이 주제가 앞으로 종종 나오게 될 것 같습니다. 이미 조현병을 다룰 때 이 주제가 자주 언급되기도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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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 조절 코칭북(초판 3쇄) / 이지영

최종 수정, 2018년 6월 26일 오후 3시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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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생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매우 흥미진진한(?) 예를 들어주셔서 재미있게 읽었어요. ㅋㅋ 집안에 들어선 순간 평소와 달리 쎄한 공기를 알아차리고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는 것. 차분히 설명해주셨지만 결국 내 감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겐 섭섭했더라도 금방 풀어질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본능적으로 한다고 생각한 것들을 이렇게 이론적으로 글로 풀어주시니 조금은 신기합니다.

와이프 팔아서 보팅 얻는 것 같아 와이프에게 미안한 마음이 좀 있네요. ㅎ 그럼에도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기분 좋습니다. 연구자들이 주로 하는 일이 보편적으로 발생하는 어떤 현상에 이름을 붙이고, 단계를 나누거나 세분화하는 것이죠. miniestate님처럼 본능적으로 되는 분들도 있지만 안 되는 분들에게는 각각의 단계를 하나하나 알려주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는 것 같아요. 어린 아이들이 양치질 처음 배울 때처럼요.

전 분석하거나 단계를 나눠서 생각하는걸 잘 못하고 약간 뭉뚱그려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서 이렇게 이론적, 단계적으로 생각해보는 연습을 하는게 필요한것 같아요. 그런 과정을 쉽게 잘 설명해주셔서 제가 감사하죠. 음... 그리고 제 글 보시면 저도 개도 팔고 아는 동생도 팔고....다 팔고 있어서...ㅋㅋㅋㅋ 아내분도 이해해주실거라 믿습니다!!

많이 팔아서 우리 모두 피라미 탈출해 봐요. ㅎ

저는 감정이 좀 둔한 편이라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그닥 불쾌감을 잘 못 느끼죠. 그러려니 넘어가곤 합니다. 만약 불쾌한 상태로 그대로 방치한다면 몸도 마음에도 병이 생기겠지요. 감정의 적절한 배설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아내분은 참 좋으시겠습니다. ㅎㅎㅎ

감정적인 자극에 대한 역치는 사람마다 다르겠죠. 좀 예민한 사람도 있고 좀 둔한 사람도 있는 것 같아요. 말씀하신 대로 감정의 적절한 표현이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와이프는.. 좋을까요? 와이프 목소리를 직접 들어봐야겠습니다. ㅎㅎ

어려서부터 감정을 절제하고 살아서인지 지금은 만성두통을 달고 삽니다.
가정의 행복을 위해 희생하는 유부남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짠해 지네요.

만성두통을 얻었지만 감정절제로 얻은 이득이 분명 있었겠지요. 저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를 얻었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일들을 대부분 내려놨습니다. 글쓰는 게 몇 안 되는 낙이네요. 참 진부한 말이지만 늘 진리인 말이 '잃는 게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는 말 같아요.

사랑하는 아내분과 아이라면 가징 큰 얻음이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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