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의 노트] 감독하지 않는 감독

_{광주518 댄스필름 '봄날' 스틸 이미지}

감독의 노트는 저의 단편영화 '봄날'(2018)의 제작 과정을 담은 에세이 시리즈입니다. 2018년 5월 18일, '봄날'을 온라인을 통해 제한적으로 공개 상영할 예정입니다.

1 - 기획 - 『광주 518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 댄스필름 × 소년이 온다
2 - 구상 - 『맛있는 고기를 찾아서』 : 레퍼런스 보유하기
3 - 섭외 - 『감독하지 않는 감독』 : 수화통역사와의 만남
4 - 촬영 - 『촬영장은 전쟁터』 : 헌팅부터 촬영까지
5 - 홍보 - 『누가 봐줄까?』 : 예고편과 포스터
6 - 상영 - 『봄날 온라인 상영』 (스팀잇에 한해서 5월 18일부터 5일동안)

_{감독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장항준 감독)}

감독하지 않는 감독

자주 쓰는 용어는 직업을 대변한다. "충!성!" 이라고 외치는 직업은 대개 군인이다. "스트라~잌!"이라고 외치는 직업은 야구 심판이며, 무조건 "바꿉시다!" 라고 외치는 직업은 안철수다.(응?) 영화감독 하면 어떤 용어가 떠오를까. 촬영장 한켠에 앉아 모니터를 마음 졸이게 쳐다보다가 외치는, 감독의 상징적인 멘트, "오케이! 컷!" 이 금방 떠오른다. 그런데 나는 "오케이! 컷!"을 한 번도 외쳐 본 적 없고, 촬영장에서 커다란 모니터를 구경해본 적도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나를 감독이라고 부른다.


'감독'이라는 단어를 곰곰 들여다보면 뭔가를 직접 수행하기보다는 '누군가를' 감독하고 지시하는 모양새가 떠오른다. 지휘자가 직접 바이올린을 연주하지 않듯이 감독도 어떤 요소를 조율하고 결정하는 역할이 중요해보인다. 그러나 여태껏 내가 만들었던 영상은 1인 제작 시스템이었다. 특별한 철학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똥인지 된장인지 모른 채로 혼자 북치고 장구쳤다. 엄밀히 말해서 난 누군가를 '감독' 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봄날≫ 촬영장에서도 가장 난감했던 순간은 출연자와 스탭이 내게 '감독으로서의' 결정을 요구할 때였다. 그럴 때마다 대충 떠넘기기 일쑤였다. 나는 감독하지 않는 감독이었다.


댄스필름을 찍겠다고 덤볐지만 춤에 대해 전혀 모르는데 어떻게 무용수를 감독해? 살아있는 배우를 앞에 두고 촬영해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어떻게 촬영 스탭을 감독해? 나도 다 처음인데, 내 스스로를 감독하기도 벅찬데, 내가 뭘 누구를 감독하냐고. 그래서 나는 감독을 소설 책에게 위임했다. 출연자와의 첫 미팅때마다 나는 서점에서 감독님을 구입해서 건네주곤 했다. 감독님은 한강의 소설책 ≪소년이 온다≫ 였다. "촬영 전까지 감독님을 꼭 완독해주시고, 당신이 느끼는 광주 518을 해석해주세요" 라고 말했던 것이 나의 유일한 요구사항이었다. 나는 여태껏 그랬듯이, 나 자신만 감독하면 될 일이었다.


어쨌든 구상을 마치고 가장 시급한 것은 섭외였다. 콘티에서 구상한대로 총 5명의 출연자가 필요했다. 그런데 댄스 필름임에도 불구하고 "저와 함께 하시죠!" 라고 내가 처음 프로포즈를 했던 사람은 무용수가 아닌 수화통역사였다.

_{≪봄날≫의 뼈대를 이루는 콘티}

저와 함께 하시죠

몇해 전 어느 독립영화제 폐막식이었다. 아, 이번에는 내 영화가 상을 받으려나? 수상 소감으로는 무슨 말을 하지? 키듴키듴.. 온갖 민망한 상상을 늘어놓으며 김칫국을 벌컥벌컥 마시며 앉아 있었다. 결과가 발표되고 이제는 익숙한 실망을 느끼고 있을 때, 무대 위에 있는 한 사람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아름다운 여배우? 땡! 무대 오른 편에서 열심히 수화통역을 하고 있던 장진석 선생님이 그 주인공이었다.


수화통역사의 몸짓과 표정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신체 언어가 갖는 본능적인 감정이 느껴진다. 특히 장진석 선생님은 그 누구보다도 풍부한 표정의 소유자였다. 댄스필름에서 배우로서 가장 중요한 것이 몸짓과 표정이다. 그렇다면 장진석 선생님은 이미 모든 것을 갖춘 배우였다. ≪봄날≫ 캐스팅에서 가장 먼저 그를 떠올렸고, 연락처를 수소문해 알아냈다. 전화를 걸었다. 장진석 선생님이시죠? 저...저와 함께 하시죠! 평소 사람 만나기 귀찮아하고 방에서 누워있기를 선호하는 나 같은 사람도 급하면 이렇게 변한다. 이럴 때면,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대쉬하는 내 자신이 무한히 낯설다.

_{수화통역사 장진석 - 518 댄스필름 ≪봄날≫ 스틸 이미지}




그렇게 첫 촬영이 시작되었다. 장진석 선생님께는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 자식 잃은 부모의 역할을 부탁했다. 그 누구라도 눈물을 왈칵 쏟게 만드는 엄마의 독백 부분이라서 쌍둥이를 막 출산한 장진석 선생님에게는 감정적으로 결코 쉽지 않은 역할이었다. 카메라를 세워놓고 내가 소설을 읽으면 장진석 선생님이 온 몸으로 번역을 했다. 나는 미리 희뿌옇게 편집해둔 518 자료영상을 빔으로 그의 몸에다가 비췄다.


아빠 잃은 아이가, 버스 위에서 깃발을 든 사내가, 밥차를 끌고 있는 광주의 여성들이 그의 몸짓과 표정 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첫 미팅때 선생님께 물었다. 보통 수화통역을 할 때 어떤 감정을 담으시나요? 그는 답했다.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고 중립적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수화통역의 원칙입니다. 나는 요구했다. 선생님, 힘드시겠지만 이번 작업에서는 선생님이 느낀 감정을 그대로 이입해 주셨으면 해요. 장진적 선생님의 마음은 그대로 영상에 담겼다. 내가 굳이 부탁하지 않았어도 이렇게 표현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국가 폭력으로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은 결코 중립적일 수는 없을 테니까. 나의 '감독'은 필요 없었다.




(4)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