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미학
@umkin께서 폭력의 미학에 대해 글을 써달라는 댓글을 남기셨다. 특정 주제로 글을 부탁 받은건 이제 2번째 있는 일이다. 진지한 말씀이셨는지 농담인지 알 방법도 없고, 농담이었다면 이렇게 사설을 남기고 있는 것도 참 우스운 일이 되니 아주 조금의 진심이라도 담아서 말씀하셨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렇다면 @umkin께서는 어떤 의미에서 폭력의 미학이란 말씀을 하셨을까? 롹 스피릿을 가진 분이시니, 반항아의 저항을 지켜보는 것에서 오는 쾌감을 표현하길 원하셨을까? 아니면 원초적인 폭력에 대한 욕구, 볼링공이 굴러가서 핀들을 시원하게 날려버리는 모습에서 쾌감을 느끼는, 실은 사람의 머리통을 한방에 깨버리고 싶은 원초적 야성을 우회적으로 해소하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길 바라셨을까? 의중은 알 수 없으나, 아마 내 글을 여러번 읽어주셨으니 내가 얼마나 정신 나간 사람인지 아시리라 믿고 @umkin께서 생각하셨던 내용과는 전혀 관계 없을 지도 모를 글을 시작한다.
생물인 이상 생물적 본성을 넘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인간은 동물 그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동물 이상이 된다는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가? 이에 관해서는 다양한 생각들이 있고, 일부는 인간은 이미 동물 이상의 존재라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은 영원히 동물 이상이 될 수 없다. 인간과 다른 동물을 비교하는 잣대는 본성에 기인한다. 인간은 동물적 본성을 이겨낸 존재로, 이겨내야만 하는 존재로 보는 시각. 하지만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본성을 넘을 수 없다. 만약 인류가 사멸하고, 인류가 만들어 낸 기계가 문명을 이룩하는 사회가 온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사멸하기 전에 기계에 새겨놓은 본성, 그 본성에 따라서 기계들은 문명을 건설한다. 기계들이 자기 자신들에게서 인간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 계속해서 발전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 모든 씨앗을 인간이 남겨놓은 이상, 그들은 본성이라는 인과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스스로의 본성을 이해하고 본성조차도 이용할 수 있다면, 본성을 이용하려는 의도조차도 본성에 따른 것일지 몰라도, 조금이라도 더 생물적 본성으로부터의 자유에 도달하는게 아닐까.
그렇다면 폭력이라는 원초적인 욕구는 조금이라도 원시인에 비해 고상해진 현대 인류에게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무엇이 폭력인가를 정의해야 한다. 폭력의 일차적인 정의는 무력을 통해 상대에게 상처 입히는 행위이다. 때로는 수식어를 통해 개념을 확대하기도 한다. 하지만 표면에 가려, 수단이 아닌 목적을 엿볼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폭력의 목적은 대상을 원하는 바를 쟁취하는 것에 있다. 눈물을 흘리며 비통한 심정으로 수제자를 말로 꾸짖는 스승의 언어적 폭력도 제자가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지 못 한 사실을 바로잡기 위한 폭력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언어적 폭력이란 단지 비유에 지나는게 아니라, 뜻하는 바를 새의 지저귐에 비해 더욱 명확하게 나타낼 수 있는 언어를 지닌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폭력의 형태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단순히 폭력이라는 어휘가 지닌 강압적인 이미지만을 차용한 별개의 표현이 아니라 표현의 연장선에 속하는 것이다.
유명한 해와 바람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보자. 나그네의 옷을 벗기기 위한 해와 바람의 태도, 바람은 무식하게 강압적인 태도를 보였고 해는 부드러운 강함을 보인 이 이야기에서 태양이 한 행동은 무엇에 속하는가? 만약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지 않았다면 나그네는 외투를 벗을 일이 없었다. 그리고 태양은 나그네를 따스함으로 감싸겠다는 숭고한 목적 대신 바람과의 내기에서 이기겠다는 목적으로 나그네가 외투를 벗게 만들었다. 일종의 물리력까지 행사했다고 할 수 있는 태양은 인류에 걸맞는 형태의 새로운 폭력에 대한 좋은 예시다.
광고 또한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다. 광고는 소비자에게 소비를 촉구하는 하나의 강압이다. 단순히 불특정 다수에게 제품을 노출하는 것에서, 쿠키를 수집하고 표적을 명확하게 하고 소비자의 구미에 당길 제품을 내비친다. 데이터 분석 기술이 더욱 발달하면 단순히 소비자의 구미에 당길 제품을 내비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제각각의 소비자들에게 맞춤형 광고문구를 노출할 것이다. 지금도 "~ 제품을 보았기에 추천함"과 같은 문구를 통해 개인들에게 제각각의 제품이 노출되고 인간관계를 위한 SNS에서조차 "~와 친구이기에 추천하는 인물"과 같은 방식으로 다른 이용자를 노출시킨다. 각각의 목표는 소비자의 입맛에 맞는 제품을 통해 소비를 촉진하고, 이용자가 흥미를 느낄 다른 이용자와의 관계를 형성하며 그 공간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도록 만들기 위함이다. 이 또한 폭력의 연장선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인용한 이솝우화의 이야기에서 해의 폭력은 아름다운 폭력일까? 나그네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 원하는 바를 쟁취한 해의 부드러운 폭력은 과연 아름다운 폭력이었을까. 결과는 알 수 없다. 나그네는 외투를 벗었기에 죽을 지도 모른다. 가령 내기에서 이기기 위한 해의 폭력에 의해 흘린 땀에 의한 탈수가 나그네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현대 사회에서 물리적 폭력을 가장 효과적으로 억누르는 수단이 바로 책임의 소재를 묻는 것이다. 아직 그 이상의 폭력에 대해서는 명확한 법률이 제정되어 있지 않지만.
그렇다면 양육와 교육은 어떨까? 필연적인 자유의 박탈인 양육와 교육 또한 하나의 폭력이다. 개인의 가능성에 대한 폭력이다. 열려있는 가능성을 잡아 끌어 제한한다. 교육자의 폭력을 이야기 했더니 흐름에서는 벗어나지만 소개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학교에서 교사에 의한 물리적, 정신적 폭력이 정당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고 그냥 내가 겪고 느낀 바를 공유하고 싶다. 나에게 인상적인 폭력을 가한 2명의 선생이 있는데 1명은 당시 교사에게 주어진 규정을 지키며 체벌했다. 교사에 의한 체벌에 야성이 담기지 않아야 한다는 이유로 신사적인 체벌을 위한 규정이 있었다. 그리고 교사 중 하나는 시의 행과 연을 구분하여 완벽하게 암기하도록 했는데 틀린 문장부호, 띄어쓰기의 숫자만큼 체벌을 가했다. 규정을 지키는 체벌이었지만 필연적으로 체벌 횟수가 많을 수 밖에 없었으니 선생의 손은 망가졌다. 피를 흘리며 붕대를 감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체벌을 가해야 했던 이유를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리고 다른 교사는 내가 희귀난치성질환자라는걸 알고 있었다. 나와 내 가족들은 학교에 이를 알리는 일을 원치 않았는데, 배려는 곧 차별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 어떤 사고가 있을지 모르기에 담임교사에게 이를 알렸다. 중,고등학교 6년간 병원을 2번 밖에 가지 않았을 정도로 건강하니 괜찮을지 모르나 한번 다치면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기에 안전을 기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담임교사는 내 일탈에 야성을 보였다. 엎드려 있는 나를 발로 차고 뺨을 때렸다. 규정을 지키고, 스스로도 힘들어한 체벌을 가한 교사, 규정을 어기고 마구 휘두른 폭력을 보인 교사 중 나는 후자를 더 존경했다. 스톡홀름 신드롬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지만, 그 문제는 아닌 것 가다. 그 교사가 야성을 드러낸건 단 한번 뿐이었다. 3년 중 2년을 담임으로 1년을 과목 교사로서 만난 그 교사가 야성을 드러낸건 그 날 단 하루였다. 하지만 규정을 지키는 체벌을 가한, 스스로도 힘들어하며 눈물을 흘린, 자신의 손이 망가질 때까지 학생을 교정하기 위해 노력했던 교사는 항상 규정을 지켰다. 규칙적으로 이어지는 규정을 지키는 체벌, 그래서 나는 규칙을 세우는 일에 있어 항상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규칙을 지키는 교사에게서는 나에게 대한 걱정을 엿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성을 잃은 교사에게서 나는 나에게 대한 기대감을 엿보았다. 물론 폭력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정당화 될 수 없다는 말에는 공감한다. 하지만 당시에 그 교사는 나에 대한 기대감과 실망감을 표할 수 있는 그 어떤 방법도 없었다. 지금 교직에 계신 분들도 비슷하다고 알고 있다. 그래서 교사들의 폭력을 옹호하는 입장이란, 폭력에 대한 옹호가 아닌 마음을 표할 수단에 대한 정당화라 할 수 있다. 이 점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교사들의 폭력을 옹호하는 입장과 격렬하게 반대하는 입장의 화합은 없다. 폭력의 정당성이 아닌 목적에도 주목해야 한다. 규정을 지키는 교사는 학생들에게 시의 행과 연, 띄어쓰기와 문장부호를 외우길 원했고 그를 위해 폭력을 휘둘렀으나 나를 발로 찬 교사는 내가 정도를 걷길 바랐다. 내 가능성을 최대한 존중하는 방향이란 것이다. 야성을 드러낸 교사를 내가 조금 더 존경한다는 이유로 조금의 변호를 보태보자면 강압에서 벗어나는 행위를 모조리 일탈로 규정하고 폭력을 행한건 아니다. 그 교사는 나를 믿었고 내가 요구하면 야간자율학습에 참여하지 않게 해주었다. 밤새도록 전화통화를 하고 학교에서 자고 있어도 특별히 폭력을 휘두르진 않았다. 그렇기에 더욱 통보 없는 일탈, 스스로도 정당하지 않다고 여겼기에 통보하지 않은 일탈에 대해 교정의 필요성과 배신감을 느꼈던게 아닐까.
잠깐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갔지만 '아름다운 폭력'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폭력이란 지양해야 할 일이라는 원론적인 입장을 떠나서 양육과 교육이라는 자유에 대한 폭력을 배제하고는 인간 사회가 성립할 수 없으며, 더 나아가서 인간이라는 개체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에 순응한다면 존립을 위한 최소한의 폭력은 배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폭력의 형태보다는 목적이 중요하다는 사실도. 당신은 당신이 하는 모든 일에 사사건건 개입하고 당신이 해야 할 일을 지시하고, 당신이 시킨 일을 수행하는 모든 과정, 걸음걸이까지도 간섭하지만 물리적 폭력이 없다면 그 정신적 폭력이 물리적 폭력보단 낫다고 할 수 있는가? 폭력의 목적은 개인의 가능성을 크게 제한하지 않아야 한다.
목적 다음은 수단이다. 사회에서는 흔히 함부로 목소리를 높이고 원하는 바를 주장하는 사람을 이기적이라 하지만, 나는 그 사람은 멍청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솝 우화에서 바람과 같은 사람이다. 해도 원하는 바를 달성하기 위해 나그네에게 폭력을 가했으나 나그네는 이를 폭력으로 느끼지 않았기에 해의 의도에 저항하지 않았다. 나그네의 상황에 대한 이해, 자신의 재주에 대한 이해가 있기에 가능한 폭력의 형태였다. 지성에서 나타나는 폭력의 힘이다. 나그네는 태양의 강요에 의해 외투를 벗은 것이지만 나그네에게 특별한 스트레스를 주진 않았다. 나그네는 강풍 후에 쬐는 따스함에, 감사한 마음으로 외투를 벗었다.
종합하면 아름다운 폭력이란 상황과 사람에 대한 명확한 인지, 그리고 자신의 욕구를 명확하게 알고 있는 상황에서 상대의 가능성을 해치지 않으며 상대에게 최대한 많은 선택지를 제공하는 상황에서 자연스레 상대의 행동을 유도하는 폭력이다. 글을 마무리 하며 @umkin께서 바란 글은 폭력에서 오는 카타르시스에 대한 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지만 내가 원래 이렇다.
의도에서는 많이 빗겨간 글이겠지만 재밌게 읽으셨기를.
깊게 생각하게 만드는 글과 저의 생각의 테두리 밖의 생각을 잘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폭력이란 의미상으로는 상대방을 보다 나은 길로 이끈다는 의미로 장기적으로 볼 때, 선의를 가지고 있나요? 그렇다면 아름다운 폭력이란 단어는 바라보는 즉 그 폭력을 당하는 사람의 시각에서 보는 부분이라면 미래의 가치라는 생각이 들고, 폭력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현재의 감정과 자신의 행동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있어야 하는 현재의 가치라고 생각됩니다. 오늘 더 생각을 해봐야 겠군요. 좋은 글 올려주어서 감사합니다.
제가 가진 자유에 대한 관념이 일반적인 관념보다 넓은 편이기에, 자유에 대한 억압의 범위도 일반적인 기준보다 넓게 잡았습니다. 선의를 가지고 있고 상대방을 보다 나은 길로 이끈다 해도 여전히 폭력은 폭력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비교적 아름다운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될 수 있겠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자유에 대한 이해가 넓은 분들이 부러울 때가 많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잘 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폭력에서 오는 생각에 대한 기존의 생각과 편견을
어느정도는 생각하게 해주는 글이네요....
폭력이라는 단어가 물론
마냥 좋다는건 절대로 아니지만
님 말대로 가지치기가 필요하듯이 일정부분은
좋든 싫든 폭력이 가해져야 할 수밖에 없는게
씁쓸하기도 하면서도 인정해야 겠다고 생각합니다.
잘 보고 가요
P.S
님께서 다신 댓글 중에서...
동감합니다.
통제광이 말하는 폭력의 미학이로군요.
폭력의 미학이 아니라 아름다운 폭력으로 글이 변질되었지만... 다른건 다 통제해도 내 문장은 통제를 못 합니다.
크~ 글이 독자에게 주는 폭력에 대한 다양한 생각의 울타리를 벗어나게 하는, 아름다운 폭력에 많은 자발적 새디스트들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잘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이를 키우다 보니 중간에 양육과 교육의 문단이 관심있게 잘 봤습니다.
이 또한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조금 다른 시선으로 한번쯤 봐라봐야겠네요^^
아이에게 부모가 제시하는 길 외의 선택지를 남겨놓지 않는다면, 이도 아이의 자유에 대한 폭력이라 할 수 있겠죠.
철학은 역시 '개념' 정리인 듯 합니다. 어떻게 개념을 잡고 생각을 전개하느냐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지는 듯 하네요. 폭력의 개념을 광의로 규정해서 생각해 보면 폭력 아닌 것이 없을 듯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
본문에서도 그렇다고 써두었죠. 힘을 최대한 아름답게 쓰기 위해 노력해야합니다.
네~ 최대한 아름답게~ 가즈앗!!! ^^
안녕하세요 킴리님.
아름다운 폭력은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대상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되겠군요.
와우~ 무작정 던진 주제를 이렇게 장황하게 적어주시다니 수고하셨습니다. ~
맞아요 제가 던진건 폭력의 카타르시스! 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사실 이는 개인의 성향따라 달라지는 이야기인것 같고 훨씬 더 좋은 이야기가 나왔네요!
아름다운 폭력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는 글입니다. 리스팀합니다~^^
장황한건 단점 아닙니까 ㅜㅜ
에이~ 엄청난 능력이죠`!! kmlee님의 글은 뭔소리지하다가도 읽다보면 재밌어지는 그런 글입니다 ㅋㅋ
재밌게 읽어주셨다니 다행입니다. 글감 주셔서 감사합니다ㅋㅋ 제가 글감에 고파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때는 체벌이 당연한걸로 받아들여져서...(요즘같으면 난리나겠죠) '패서라도 대학보내면 좋은학교' 이런 인식도 있었고요. 학교폭력 그런것도 없었어요...선생들이 더 패니까...
좋은점은....음...유격이 고등학교 체육시간보다 쉬웠어요 정도랄까요...
기발한 체벌법들을 하나하나 얘기하면 몇시간동안 술마시면서 썰 풀수 있습니다 ㅎㅎㅎ
체벌보다 혹독한 언어 폭력도 있지요. 체벌은 절대 안 하면서 학생들에게 망신 주고, 차별하던 교사가 있었는데 학생들이 가장 싫어하던 선생이었습니다. 차라리 뺨 때리고 발로 차는게 낫겠더라구요.
폭력이라는 것이 굉장히 넓은 의미에서 볼 수 있군요...
광고까지도 폭력이 될수 있다니
희귀난치성질환이 있으신지도 몰랐네요...
그리고 야성을 드러내며 때린 교사를 더 존경하셨다고해서 놀랐는데
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나'를 위한 폭력이라도 느끼신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