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tif] 사랑의 묘약 #2

in #kr-pen5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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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약으로 번역되는 elixir의 사전적 정의는 제조된 약이기도 하지만, 넓게 보면 효험이 있는 것은 다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번 회차에 다룰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A Midsummer Night's Dream) 속의 사랑의 묘약은 제조된 것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즙이라는 점, 그리고 트리스탄과 이졸데처럼 복용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 부위(이 경우에는 눈꺼풀)에 떨어뜨리는 것이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요소 때문에 한여름 밤의 꿈 속에서 등장하는 '묘약'은 애초에 묘약이 아니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문학과 문화에서 보는 사랑에 빠지게 하는 효능이 있는 그 무엇임은 분명하기 때문에 사랑의 묘약 편에서 다루기로 한다.

펠릭스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의 한여름 밤의 꿈 서곡 및 부수음악. 32분 경에 나오는 축혼 행진곡은 극중 인물들의 결혼식을 축하하는 음악으로, 현대의 결혼식에도 자주 쓰인다.

한여름 밤의 꿈사랑의 묘약 #1에서 다룬 트리스탄 이야기가 유럽에서 유행한 후로 수 세기나 지난 시점인 1595년 쯤의 작품으로, 그때쯤에는 사랑을 얻게 해주는 마법의 액체, 묘약의 개념이 이미 문화적으로 깊게 뿌리내렸음을 알 수 있다.

단, 이 작품에서는 어떤 초자연적 힘을 가진 사람보다는 아예 요정이라는 일종의 인격체를 내세워서 그 비법을 상정하고 있다. 요정의 왕과 왕비, 그리고 그들이 부리는 요정들이 등장하며, 그들이 사용하는 사랑의 묘약이란 오늘날 팬지로 알려진 꽃의 즙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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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에 피는 종의 팬지꽃. 흰색과 보라색을 함께 띠는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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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량해서 여러가지 색을 띠는, 우리에게 보다 익숙한 팬지

셰익스피어가 이 꽃을 임의로 정한 것은 아니다. 팬지는 매우 오래 전부터 사랑을 받아온 꽃으로, 바이올렛(Violet)이라고도 불리며, 사랑에 앞서 생각 또는 기억이라는 의미가 부여되기도 했다. 팬지라는 이름은 파스칼의 저서 제목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불어 pensée(팡세)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Hamlet)에서는 오필리아(Ophelia)가 팬지꽃을 뿌리며, '생각'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또한 팬지는 속어로 여성스러운 남성을 뜻하기도 하는데, 이는 의외로 오래된 모욕성 표현으로 엘리자베스 1세 시대부터 찾아볼 수 있다.

팬지(또는 바이올렛)의 또 다른 이름으로 Love-in-idleness가 있는데, 말 그대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태(idleness)에서의 사랑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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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지(바이올렛)을 주 원료로 한 향수 광고,. 메이저 브랜드는 아니지만 오래 전부터 유래된 상품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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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카피 너에게 주문을 건다


그럼 이만 한여름 밤의 꿈의 대략적인 줄거리를 보기로 하자.

아테네의 처녀 허미아에게는 라이산더라는 연인이 있다. 둘은 혼인하고 싶어하지만, 허미아의 아버지는 딸을 드미트리우스에게 시집 보내려고 한다. 허미아와 라이산더는 함께 도주하기로 하고, 숲에서 밤을 보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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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시먼스(John Simmons) 作 허미아와 라이산더(Hermia and Lysander)

고전 문학에서 이러한 도피 장면이 등장하면, 항상 중시되는 부분이 있다. 비록 두 연인이 도피하는 중이지만 혼인하기 전이기 때문에, 꼭 적당히 떨어진 곳에서 잠을 자도록 하는 것이다. 한여름 밤의 꿈의 혼란은 여기에서 빚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허미아의 아버지가 고집하던 상대 드미트리우스가 두 연인을 쫓아서 이 숲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뒤를 쫓는 또 하나의 여인, 헬레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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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리트리우스와 그의 뒤를 쫓는 헬레나, 인쇄판의 삽화

헬레나가 드미트리우스의 옛 연인임은 대사를 통해 드러난다. 드미트리우스가 허미아와 결혼할 생각을 품으면서, 헬레나를 버린 것으로 보인다. 헬레나는 드미트리우스를 잊지 못하고 쫓아다니고 있다. 그리고 허미아와 라이산더가 도망친 것을 드미트리우스에게 알려준 것 역시 헬레나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드미트리우스가 자신을 다시 봐주기를 기대했다고...

요정의 왕 오베론(Oberon)이 이 연인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도 헬레나 때문이다. 헬레나가 드미트리우스에게 순종적인 개처럼 붙어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고, 드미트리우스는 매우 잔인하게 그녀를 떨쳐버리는 장면이 오베론의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드미트리우스는 일명 나쁜 남자가 아니라 실제로 인성이 좋지 못한 캐릭터에 가깝다. 헬레나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를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드미트리우스는 헬레나에게,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이를 따라 밤에 위험한 곳까지 온 그녀의 정조를 담보해줄 수 없다는 식의 발언도 하지만, 헬레나는 굴하지 않는다. 그러자 드미트리우스는 헬레나가 숲 짐승들에게 잡아먹혔으면 좋겠다고까지 말하고는, 그녀를 놓아두고 황급히 허미아와 라이산더를 쫓아 달려간다.

그리고 이 때문에, 오베론은 심복 퍽(Puck)을 시켜서 잠든 남자의 눈꺼풀에 팬지 꽃즙을 떨어뜨리도록 한다. 문제는 퍽이 드미트리우스가 아닌, 일찍이 잠든 라이산더를 발견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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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여름 밤의 꿈(1935) 中

꽃즙의 효능은 일어나서 처음 눈에 들어온 상대와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허미아와 떨어진 곳에서 잠든 라이산더는 잠을 깨자마자, 드미트리우스에게 버려진 후 숲을 헤매는 헬레나를 발견하고 그녀를 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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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스머크(Robert Smirke) 作 헬레나에게 고백하는 라이산더(Lysander declaring his passion to Helena)

이 장면을 보고 퍽은 다시 드미트리우스를 찾아서 눈꺼풀에 꽃즙을 떨어뜨리고, 그 결과 라이산더와 드미트리우스 둘 다 헬레나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헬레나는 허미아를 포함한 세 사람이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하고, 이 장면을 본 허미아는 헬레나가 라이산더를 빼앗아 갔다고 생각하게 된다.

두 여인은 험한 말을 주고 받는데, 여기에서 두 캐릭터의 외모가 표현된다. 원래 두 남자의 사랑을 받던 허미아는 키가 작고 검은 머리의 브루네트의 전형이며, 드미트리우스를 사랑한 헬레나는 큰 키와 흰 피부를 가진 블론드의 전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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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여름 밤의 꿈 中(1999)

이 혼란을 본 요정의 왕은 다시 심복에게 명령해서, 라이산더와 허미아, 드미트리우스와 헬레나를 서로의 근처로 이끈 후에 잠에 빠뜨린다. 여기에서, 원래 연인이었던 라이산더와 허미아는 상관 없지만, 드미트리우스는 팬지꽃의 즙, 사랑의 묘약의 효능으로 인해 자신이 버렸던 헬레나를 사랑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두 쌍의 연인들이 극의 결말에 결혼식을 올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라이산더와 허미아, 드미트리우스와 헬레나만 이 '사랑의 묘약'의 혜택(?)을 본 것은 아니다. 요정의 왕 오베론은 자신의 부인이자 요정의 여왕인 티타니아(Titania)와 싸움을 한 상태이다. 그는 그녀의 눈꺼풀에 꽃즙을 떨어뜨려서 숲속에 흘러들어온 어느 떠돌이 배우와 사랑에 빠지도록 하는데, 설상가상으로 그는 당나귀의 머리를 쓴 모습으로 뒤바뀌어 있다. 당나귀(ass)를 바보, 멍청이 등의 의미로 이해하는 현상은 상당히 오래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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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 머리를 쓴 보텀(Bottom)이라는 배우와 사랑에 빠진 티타니아, 영화(1935) 中

네 연인과 별개로, 오베론과 티타니아의 싸움은 중요한 주제이다. 이는 젠더 간의 싸움이기도 하고, 배우자에게 성적 방종을 허용하기 싫었던 두 사람 중에서 아내의 패배로 보이기도 한다. 애초에 둘이 싸운 이유는 용모가 아름다운 한 소년 시종을 누가 차지하느냐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원작과는 다른 각도에서, 체코 지역에서는 한여름 밤의 꿈이 정치적인 풍자의 의미를 강하게 가진다고 하는데, 당나귀의 머리를 한 사내에게 온갖 정성을 쏟는 요정의 여왕 씬이 그 절정을 이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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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론과 티타니아 삽화

드미트리우스와 헬레네의 결말은 다소 찜찜하다. 본인의 의지대로라면 드미트리우스는 헬레나를 계속 거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드미트리우스가 사실은 마음 속에 헬레나에 대한 사랑이 남아 있었다는 해석도 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결론을 읽는 하나의 방식일 뿐, 이렇다할 근거는 없다.

여기에서 사랑의 묘약이라는 개념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가능하다. 만일 상대방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그의 감정을 내가 원하는 대로 조정하고, 자연적인 감정 상태와는 달리 영원히 지속 가능하게 할 수 있다면, 과연 그 방법을 택할 것인가? 뜻대로 되지 않는 남의 감정과 자유 의지를 제어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이토록 노골적으로 표출되어 왔다는 점은 흥미롭다.

묘약이란 영생과 연금술, 또는 사랑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설정된 개념이었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한동안 현실로 받아들여졌던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중세부터 근대 초에 이르기까지, 평민들이 마을의 마법사나 마녀에게 주로 의뢰한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남에 대한 저주, 또는 남의 사랑을 차지하는 방법.

사랑의 묘약이라는 것은 영생이나 연금술보다는 무해하고 가벼운 것처럼 보이지만, 자연을 거스르고 남의 의지를 조종하는 '신의 영역'에 속하는 개념이라는 점에서는 상당히 무거운 주제일지도 모른다. 마법으로 사랑에 빠진 드미트리우스와 결혼한 헬레나 캐릭터는 행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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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sndbox: This article is the fifth of my series on the classics of literature, history and philosophy; it is a project around which I wish to build a community. This particular post is on Shakespeare's A Midsummer Night's Dream, focusing on the particular form of love potion featured in the come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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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록달록 개량 팬지꽃은 사진 첫 인상이 마치 강아지 얼굴같네요^^
영화 한여름밤의 꿈(1999)의 키큰 근육질남자(드미트리우스?) 는 크리스챤 베일 같이 생겼네요^^
(디클릭 꾹~~)

네 그 배우 맞아요. ㅎㅎㅎ

1로 끝나는게 아니었어 ㅋㅋ. 한여름밤의 꿈 이야기는 잼있게 잘 읽었습니다. 복잡 미묘한 흐름과는 달리 뭔가 너무 허무하게 순리대로 끝나 버린게 다소 아쉽기는 하네요 ㅎ

ㅋㅋㅋㅋ2가 있으니 1이었죠. 이 주제는 3이 끝입니다. ㅋㅋㅋ

저는 그 순리대로(?) 끝난게 참 찝찝해요. 마법에 걸려서 낚인 남자는 불쌍한 듯;;

1999년 작품에서 한참 멈춤.......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형 요즘 진짜 왜 그래...'손절' 대파 보고 옴 ㅋㅋㅋㅋㅋ

이번주 코노 준비하면 몬티가 머리채 씹는거 때려치운답니다...

녹음ㄱㄱ

머리채 당첨...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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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이제 묶고 잘거임ㅠ

지옥을 부른다.

제이미님 오랜만~~~
요즘 급피곤한 상태로... 그 재미없는 농담도 잘 못하네요
글은 나중에 머리가 맑을때 ..
사진은 음 좋구요 ㅋ, 감기는 아직도 궁금.. 지금은 괜찮겠죠
아직도 안괜찮으면 큰일~~~ 보클은 좋은습관.
맑을때 들리죠^^

누구시죵...

님바라기...

친구는 10년만에 만나도 그때 그시절 같더라~~
그 친구맘은 모르겠고 내맘은 그렇더라..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크리스쳔 베일 참 젊었네요. +.+
근데 운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어서 그런지 지금도 그리 늙어 보이진 않아요.

아주 최근 모습은 잘 모르겠지만, 저게 20년 전이니 이질적이긴 하네요. ㅎㅎ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기 때문에 '묘약'이라는 탈출구가 필요했으리라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그런 욕망들 중에서 한쪽이 남에 대한 저주라니 ㅜㅜ 난 지금까지 살면서 저주한적이 있나? 생각보겠되었습니다. ㅋㅋㅋ

ㅎㅎ 굳이 저주를 의뢰하는 경우는 그것이 곧 자신의 이익으로 직결되기 때문이었으리라 생각해요. 현대보다 단순한 상속법이나 더 직접적인 경쟁도 배경이 되었을 것이고...근데 뭐 인간이란 자신의 생존이 걸리지 않은 상황에서도 단순한 질투 등의 이유만으로 충분히 해를 가할 수 있다고 생각되니...모를 일이죠.

아~~ 그냥 저놈이 잘나가서 싫어서 저주. 의 개념만 생각했는데. 자신의 이익과 직결 되는 저주라면 그럴수 있겠네요... ㅋㅋ 참 생각이 짧다는... ㅋㅋㅋㅋ

음...그리고 상대방이 나를 먼저 저주했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겠죠. ㅎㅎ 중세 말~근대 초에 제일 마녀사냥이 극심했는데, 농사를 망치는 경우와 자본의 격차가 벌어지는 경우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할 때이니까요. 미신이라는게 그렇게 쉽게 없어지는 게 아니기도 하고...

엄훠........잘 읽다가 중간에 다 벗구 있는거 보고 깜놀.....제이미님 취향......알겠어염...............ㅋㅋ

저 향수는 우리 @mipha가 쓰면 세상 모든 여성들을 적으로 돌릴 수 있겠군! @mipha 얼릉 써줭~~

뭐 그냥 다 가렸구만...욱사마님과 비슷한 관전 포인트를 찾으시다니ㅋㅋ안 그래도 방금 늅좐님의 행적 보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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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미파형은 왜...

헐...ㅋㅋㅋㅋ 언제 보셨...쿨럭쿨럭..

?무슨 향수요? 글안읽어서 뭔지 모름

ㅋㅋㅋㅋ 글을 읽으라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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