츄리닝(겐) #1. 로저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in #kr-pen6 years ago (edited)

A summary in English is to be found at the end of thi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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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을 좋아한다. 물론 다른 분야에서도 고전을 선호해서인지, 고전 추리물을 특히 좋아한다. 그래서 별도로 시리즈를 써보기로 했다.

하나의 포스팅에서 다룰 단위는 대부분 단일 에피소드 급으로 구체적일 것이다. 장르 특성상 비평이라기보다는 흥미로운 점, 배경과 정보 등을 자유롭게 다루고, 필요에 따라서는 부분을 발췌해서 한글로 옮기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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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주자는 가장 유명한 추리소설 중 하나인 로저 애크로이드 살인사건(The Murder of Roger Ackroyd)이다. 그 명성 때문에, 처음 접하고는 오히려 실망하는 독자가 나오게 되기도 하겠지만 여전히 역대급 추리소설로 꼽히고 있다. 아마 추리 장르에 관심이 있는 독자 대부분은 아가사 크리스티(아무리 미국식으로 해도 '애거서'라는 발음은 아니다.)의 이 대표작을 이미 읽었으리라 여겨지지만, 혹시 앞으로 읽을 계획이 있어서 스포일러를 원치 않는 분들은 이하 글을 보지 않기를 권한다. (물론, 주요 포인트를 알고 읽어도 충분히 흥미로운 책이다.)


로저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은 1926년에 영국과 미국에서 출간되었는데, 지금은 흔해졌지만 당시에는 새로웠던 '화자가 범인'인 소설로서 충격을 주었다. 그런 설정을 일종의 '치트'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또 한 명의 유명 추리 작가 도로시 L. 세이어즈(Dorothy L. Sayers)가 '완전히 허를 찔린 것을 인정하라'며 변호에 나서기도 했다.

소설의 화자는 온화하고 이성적인 느낌을 주는 의사 셰퍼드이다. 그는 8살 연상의 누이 캐롤라인과 단둘이 살고 있는 독신자로, 유독 소문에 밝고 수다스러운 누나를 약간 부끄러워하는 느낌을 준다. 물론 결말에 가서는 그의 모든 독백과 감정이 자신의 범죄 은폐를 위한 것이었음이 드러나게 된다. 로저 애크로이드의 뛰어난 점은 이러한 초반 '떡밥'들이 다 회수가 잘 되었다는, 그러니까 던져둔 힌트들이 다 '말이 된다'는 점이다.

가령 아래와 같은 대목을 따로 떼어놓고 보면 범죄 현장을 떠나는 장면으로 읽힐 여지가 매우 크지만, 소설을 처음 읽을 때는 간과하기 십상이다. 이미 초반부터 범인이 누군지 알려주지만, 독자는 등잔 밑이 어두운 식으로 그 정보를 흘리게 되는 것이다.

It was just on ten minutes to nine when I left him, the letter still unread. I hesitated with my hand on the door handle, looking back and wondering if there was anything I had left undone. I could think of nothing. With a shake of the head I passed out and closed the door behind me.
내가 그를 떠난 시간은 막 9시 50분이 되어갈 때였고, 편지는 여전히 읽히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내가 마무리하지 않은 것이 혹시 있을지 몰라서 망설였지만 그런 것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머리를 흔들며, 내 뒤로 문을 닫고 나갔다.

그 후 로저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은 크리스티의 여러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단골 연극 소재가 되었으며, 1939년에는 그 유명한 오슨 웰즈(Orson Welles) 감독이 라디오로 연출하고 극중 두 주연, 그러니까 탐정 포와로와 의사 셰퍼드 역을 직접 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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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80년대에는 BBC4 라디오에서도 크리스티의 거의 모든 소설이 드라마화 되었는데, 대표작 로저 애크로이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시리즈에서 포와로 역을 주로 맡은 존 모팻(John Moffat)은 BBC의 TV 드라마 '미스 마플(Miss Marple)' 시리즈의 한 에피소드에서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한 조연급 배우이지만, 라디오로 방영된 포와로 시리즈에선 만년 주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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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도에는 영국 ITV에서 제작하고 데이빗 수셰(David Suchet)가 주연한 포와로 시리즈의 일부로 로저 애크로이드... 에피소드가 방영되었다.

'화자가 범인'인 사실이 너무나도 유명해서인지, 이 드라마는 반전 요소를 아예 포기하고 셰퍼드의 일기로 나레이션을 구성하여 상당히 다른 각도로 극을 진행시킨다. 책의 독자들로부터는 실망스럽다는 반응이 많이 보이나, 어쩌면 책의 명성과 구성 때문에 이러한 각색이 불가피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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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V 드라마의 로저 애크로이드...

TV 드라마화, 또는 영화화된 작품의 경우 [Jem TV] 시리즈에서 차차 다뤄보기로 한다.

내가 생각하는 로저 애크로이드의 흥미 포인트는 범인 셰퍼드와 누이 캐롤라인의 관계이다. 캐롤라인은 마을에서 제일가는 참견쟁이로, 그 어떤 소문도 놓치지 않고 꿰고 있는 인물이다.

크리스티는 이 캐롤라인에서 미스 마플의 캐릭터를 고안해냈다고 암시한 바 있다. 이 단역이라면 단역인 캐릭터에서, 크리스티의 탐정으로 포와로와 쌍벽을 이루는 미스 마플이 탄생한 것이다.

셰퍼드는 누이를 입이 가볍고 경박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듯한 표현을 자주 하지만, 사실 캐롤라인은 보기보다 속이 깊은 사람이다. 그녀는 동생을, 마음이 매우 약하고 따라서 돌봄이 필요한 사람으로 파악하고 있다.

주로 심리분석적으로 접근해서 사건을 해결하는 포와로 역시 같은 생각이며, 셰퍼드의 나약함을 그 범행 이면의 근원으로 보고 있다. (픽션 속의 모든 탐정들은 어느 정도씩은 다 심리에 착안해서 수사하는데다가, 굳이 따지자면 브라운 신부야말로 심리분석에 더 많이 의존하는 탐정 캐릭터이겠지만, 심리분석을 명시적으로 내세우는 일이 가장 잦은 탐정은 포와로일 것이다.)

포와로는 셰퍼드 남매 앞에서 애크로이드의 살해자에 대한 생각을 길게 표현한다. 물론 범인이 누군지 확신하기에 가능한 행동이다. 하지만 평소의 포와로라면 사건의 모든 실마리가 풀린 후에나 관련자들을 전부 모아놓고 길게 해설하는 것을 즐기기에, 이는 상당히 보기 드문 장면이다.

또한 이 부분이야말로, 이 소설 중의 범죄 심리에 대한 가장 자세한 묘사가 아닐까 한다. 해당 부분을 한글로 간단히 옮겨두고, [츄리닝(겐)]의 첫 회차를 마친다.


'Let us take a man - a very ordinary man. A man with no idea of murder in his heart. There is in him somewhere a strain of weakness - deep down. It has so far never been called into play. Perhaps it never will be - and if so he will go to his grave honoured and respected by everyone. But let us suppose that something occurs. He is in difficulties - or perhaps not that even. He may stumble by accident on a secret- a secret involving life or death to someone. And his first impulse will be to speak out - to do his duty as an honest citizen. And then the strain of weakness tells. Here is a chance of money - a great amount of money. He wants money - he desires it - and it is so easy. He has to do nothing for it - just keep silence.
한 남자가 있다고 합시다. 매우 평범한 사람이죠. 마음 속에 살의 따위는 전혀 없어요. 그러나 매우 깊은 속에 나약한 기질이 있죠. 아직까지는 활성화된 적이 없어요. 어쩌면 영영 잠재해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럴 경우에는 모든 이들의 존경과 존중을 받으며 무덤까지 갈 수 있겠죠.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는 어려움에 처하게 되죠. 아니, 그 정도도 아닐지 모릅니다. 그냥 우연히 어떤 비밀을, 누군가의 삶과 죽음을 결정할 만한 비밀을 알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의 첫 충동은 그걸 밝히는 것이죠. 정직한 시민으로서의 임무를 하기 위해서요. 그런데 그때, 그 나약한 기질이 티가 나게 됩니다. 돈이, 그것도 아주 큰 액수의 돈이 생길 기회가 왔기 때문이죠. 그는 돈을 원해요. 아주 갈망합니다. 그리고 이건 너무 쉽단 말이죠. 그 돈을 얻기 위해 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침묵을 지켜주는 것 외에는.

That is the beginning. The desire for money grows. He must have more - and more! He is intoxicated by the gold mine which has opened at his feet.
이게 시작입니다. 돈에 대한 탐욕은 점점 커져요. 그는 더 받아내야 합니다, 더! 그는 발 아래 펼쳐진 금광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죠.

He becomes greedy. And in his greed he overreaches himself. One can press a man as far as one likes - but with a woman one must not press too far. For a woman has at heart a great desire to speak the truth.
그는 탐욕스럽게 변합니다. 그리고 그 탐욕 속에서 그는 무리수를 두게 되죠. 상대가 남자라면 원하는 만큼 밀어붙일 수 있겠지만, 여자는 너무 몰아붙이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여성에게는 마음 깊이 진실을 말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죠.

How many husbands who have deceived their wives go comfortably to their graves, carrying their secret with them! How many wives who have deceived their husbands wreck their lives by throwing the fact in those same husbands' teeth! They have been pressed too far. In a reckless moment (which they will afterwards regret, bien entendu) they fling safety to the winds and turn at bay, proclaiming the truth with great momentary satisfaction to themselves. So it was, I think, in this case. The strain was too great. And so there came your proverb, the death of the goose that laid the golden eggs. But that is not the end. Exposure faced the man of whom we are speaking.
아내를 속인 남편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비밀을 갖고 무덤까지 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반면 남편을 속인 아내들은 그 사실을 남편에게 대놓고 들이댐으로서 인생을 망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요! 너무 코너로 밀려서 그런 겁니다. 찰나의 무모한 순간에 (물론 나중에는 후회하죠.) 보안이라곤 내던져버리고, 추궁하는 이에게 진실을 선포하며 일시적으로 엄청난 만족감을 느낍니다. 이 경우에도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해요. 부담감이 너무 컸던 겁니다. 그래서 당신네들의 속담, 그러니까 황금 알을 낳는 거위 상황이 펼쳐진 것이죠. 그러나 그게 끝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이 남자의 정체가 폭로될 위기가 온 것이죠.

And he is not the same man he was - say, a year ago. His moral fibre is blunted. He is desperate. He is fighting a losing battle, and he is prepared to take any means that come to his hand, for exposure means ruin to him. And so - the dagger strikes!'
그리고 그는 더 이상 과거의, 한 1년 전쯤의 그 남자가 아니에요. 그의 도덕심은 무뎌졌습니다. 그는 다급해요. 지는 싸움을 하고 있고, 폭로는 패가망신으로 이끌 것이기에, 손에 잡히는 것이라면 무슨 수단이든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죠. 그래서 칼을 휘두르게 됩니다.

[...]

Afterwards, [...] the dagger removed, he will be himself again, normal, kindly. But if the need again arises, then once more he will strike.'
그 후에 칼이 사라지면, 그는 다시금 정상적인, 친절한 모습으로 돌아가겠죠. 하지만 다시 필요하게 되면 그는 다시금 공격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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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em fest 가즈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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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언제죠 근데ㅋㅋ

데빌메이크라이

제가 처음 읽었던 아가사 크리스티 소설이어서 더욱 더 애착이 가는 작품이네요. 좋은 포스팅 감사합니다

제 경우는 네메시스였습니다. 간만에 기억해낸...ㅎㅎ 후딱 써서 방금 오타수정도 더 했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 글을 옮긴 부분을 읽으니 대부분의 범죄자들의 심리가 아닐까 생각되네요! 처음부터 나쁜사람 어디있겠어요 어휴... 한순간인것 같습니다 ㅜㅜㅎㅎ 제이미님의 글은 항상 잡지책 한 부분을 읽는것 같다니깐요?ㅎㅎㅎ 신기해신기해

ㅎㅎ 인디구님의 댓글은 목소리 같아요. 감사합니다.

아가사 크리스티 추리소설로 유명하지요. 추리소설작가는 심리학을 공부해야겠어요...

네, 학술적인 의미로 거론하는건 아니지만 분명히 필수요소죠.

읽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너무 오래 되어서인지 가물 거립니다. 아가사 추리소설과 홈즈는 거의 다 본 것 같기도 한데...

잘 읽고 갑니다.

다른 소설보다 좀 더 쉽게 잊히는 것 같긴 해요. ㅎㅎ 감사합니다.

I love Poirot and Agatha Christie, I also love watching old episodes of the us show 'murder she wrote' :)

Same here. Oh, I know those old murder, she wrote episodes used to be on British television sometimes. Didn't actually watch any of them, though. I'll give them a try s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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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매번 이런글을 쓰시는지°°°°
한번 만나뵙고 쉽네요 정말 ㅋㅋㅋ ... 전 대충써도 밤에 잠을못자는데 ㅎㅎㅎ 굿밤요~~ 잠많이 자야 피부미인~~

감사합니다. 저는 8시간 이상 꼭 자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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