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PEN클럽 공모전 참가글] 내 그릇은 작지만 쓸모있고 싶다

in #kr-pen6 years ago

집안 일이라는 것은 정말 끝도 없다.
음식 만들기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청소, 설거지, 빨래 등등의 일들은 창조적이 아닌, 모든 것을 그저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이라 해도 해도 티도 안난다. 하면 당연하고 안하면 표나는 일...

또한 이런 여러 집안 일 중에도 사람마다 잘 하는 것,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이 다 다를 것이다.
나는 모든 집안 일에 젬병(전병(煎餠)'에서 유래한 말로 형편없는 것을 속되게 이름)이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설거지를 제일 싫어한다.
직장에서 하루 종일 테이블 앞에 "서서" 일을 하다보니 싱크대 앞에 서서 하는 설거지가 진절머리나게 싫은 것이다. 그래서 식기 세척기를 애정한다.

일요일 아침이다.
어제 저녁 식기 세척기에서 깨끗하게 씻겨지고 뽀송뽀송 마른 그릇들을 꺼내 각각의 종류별로 포개어 모아 놓는다.
그리고는 그릇들이 찬장으로 들어가기 앞서 작은 생각이 들어 사진 한 장을 찍어보았다.

0322180850.jpg

1-2년 전 미니멀 라이프가 유행할 당시 많은 그릇들을 정리했다.
종류도 줄이고 수량도 줄이고 기본적으로 쓰는 것만을 남겨놓았는데도 아일랜드 위에 한 가득이다. 좀 많다 싶다.
네 식구 살면서 이 많은 그릇이 필요가 있을까 싶으면서도 딱히 더 이상은 버릴 것들을 고를 수 없다.
이건 이럴 때 써야하고 저건 저럴 때 써야지.

그러다가 문득 이런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그릇이 반드시 클 필요가 있을까?" 하는...

'그 사람 참 그릇이 크더라' , '그 사람은 그릇이 작아서 못 쓰겠어' 라고들 말한다.
사람을 그릇의 크기에 비교를 한다.
사람의 인격이라 말하기 보단 마음의 크기를 말하는 느낌이도, 특히 좁은 의미로는 포용력을 지칭하는 느낌이다, 내게는.
하지만 이것마저도 내 그릇의 그 절대적인 크기보다는, 나를 판단하는 그 사람의 주관적인 경험에 좌우되는 편협함이 있긴 하다.
큰 그릇을 가지지 못한 평범한 사람의 궤변이겠지만 이제는 모든 그릇들이 반드시 다 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밥을 담는 오목한 밥그릇, 국을 담는 국 사발, 냉면 그릇, 지름이 각각 다른 많은 접시들, 약간 오목한 접시, 장담는 종지,
음료수를 마시는 컵만 하더라도 커피잔, 쥬스잔, 텀블러 등 그 종류가 많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용도에 따라 맞게 사용하고 있다. 식탁 위에는 밥그릇, 국그릇, 반찬 접시, 간장 종지 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먹는다고 컵 없으면 밥 그릇에 물 마셔도 되고 국 대접에 밥 먹어도 되지만 괜히 어색하고 조금은 불편하다.

그럼 나는 어떤 그릇일까, 어떤 그릇이어야 할까 생각해본다.
그리 크지도 않고, 뛰어나게 아름답지도 않고, 있으나 없으나 싶은, 멋진 장식장에는 들어갈 수 없는, 항상 찬창 안에 놓인 아주 아주 평범한 밥 그릇 하나이지 않나 싶다.
크기도 크지 않고 가장 흔하고 생각없이 막 쓰는 그런 밥그릇...
있을 땐 소중한 걸 모르지만 막상 없으면 아쉬운 그런 밥그릇...

하지만 내 그릇의 쓰임새는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나를 아껴주고 잘 써주는 가족들이 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직장이 있다.
스팀잇이라는 찬장에서도 작은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
언제 어디서건 때와 용도에 맞는 흔한 그릇으로 쓰이고 싶다.

일요일 아침, 별 것 아닌 그릇에 대한 생각으로 시작하는 지극히 평범한, 하지만 또 중요한 하루를 맞이했다.


@kimthewriter 님이 열어주신 [제1회] PEN클럽 공모전에 참가하기 위해 쓴 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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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아껴주고 잘 써주는 가족들이 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직장이 있다.
언제 어디서건 때와 용도에 맞는 흔한 그릇으로 쓰이고 싶다.

화려하지도 않고 크지도 않더라도 그에 걸맞은 용도가 있고 좋아하고 찾아주는 그릇...
많은 걸 생각하게 해주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아줌마의 잡생각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잘 읽었습니다

좋은 결과 응원할게요 ㅎㅎ

실은 저두 참가했어요

늘 남의 글 심사만 하다가 심사를 당한다고 생각하니 뭔가 기분이 이상해요 ㅎㅎ

공연히 망신 당하는 건 아닌가 싶구요

@sunghaw 님의 글, 잘 읽고 왔습니다.
저는 좋은 결과를 바라지 않아요 ㅎㅎ 주제와 분수를 알거든요 ㅎㅎㅎ
@sunghaw 님의 글은 심사와 상관없이 항상 멋진 글이세요~

언제나 좋게 봐 주시는 거 알아요
그래서 늘 고마운 마음 가득이예요

그릇 이야기 재미나요.
저도 굳이 큰 그릇일 필요가 없다고 봐요.
깨지기 쉽잖아요^^

자기 다운 그릇
자기 빛깔 그릇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거든요^^

저희 집에는 남편이 빚어 만든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그릇이 몇 개 있습니다. 그것이 젤 소중하죠~

그릇에서 느낄 수 있던 자아성찰의 시간이 되었네요. 플로리다님 뿐 아니라 이 글이 모든분께 다가가는 그 순간 쓰임받게 될 멋진 일기라 생각됩니다 !!

스팀잇에서 멋진 분들을 많이 알게되서 참 좋아요~

밥 그릇이야말로 가장 기본적이며, 본질에 충실하고 그래서 그 어떤 그릇보다 더 많은 사람에게 닿아 배를 불리우는 고마운 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달팽이님은 밥 그릇이 맞으십니다 :)

봄들판님, 반갑고 감사합니다~^^
깨지지 않는 철밥그릇이 되어야 할까요? ㅎㅎㅎ

목적을 갖고 보면 막연히 보던 물건에서도 통찰 비슷한 느낌을 받게 되던데.. 그릇을 보면서 스스로를 돌아보셨군요. 좀 비약하면 가끔 티비에 나오는, 도공이 망치로 부수어버리는 찌그러진 그릇도 놓아두면 자기 자리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네, 나이들수록 느끼고 있습니다

크아~ 플로리다님 너무 좋은 글입니다...
이번주도 즐거운 한주 되세요:)

감사합니다. 멋진 한 주 만드세요~^^

플로리다 달팽이님의 글은 항상 미소지으며 읽게 됩니다. 그릇들을 보며 써내시는 그 글... 읽는 이들은 참 행복합니다^^

잠시나마 소소한 행복을 느끼셨으면 그걸로 제 임무 완성이지요 ㅎㅎ 감사합니다.

종지인 저도 어딘가에 필요할것으로 믿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여기는 취침 시간이네요^^

개털님은 고려청자이시지요~^^

과찬이십니다. 고려 청자는 바로 @floridasnail 님이시죠. 은은한 비취를 드러내는... 국보급이시죠.^^

전 다행히 설거지를 좋아해서 거의 전담해서 맞고 있답니다 ㅎㅎ

그릇에 대해 여러가지 표현을 하셨군요.
잘 읽었습니다~

복받으실거예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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