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넋담수첩] 가깝지만 먼 곳, 의식의 흐름.

in #kr-pen5 years ago (edited)


엄마는 외할머니가 쓰려졌다는 연락을 전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큰 외삼촌이 곁에 계셨냐 물었다. 그러하다는 답이 왔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이 몇 번째인지 모르게 할머니는 큰 아들이 곁에 있을 때 그러하셨다. 몇 년 전부터는 치매 증상도 보이셔서 더 고집을 부리신다 하신다. 곁에 계신 큰 외숙모의 고충이 멀리서도 느껴진다.

며칠 전 근처에 사는 작은 외삼촌댁에 엄마가 동치미를 들고 가셨다. 근처라고 해도 외가가 있는 전라남도에 비한 것이지 한강을 건너이다. 맛있게 비운 누나의 동치미가 끊길 때마다 아쉬워했다는 동생의 말을 올케에게 돌려서 들은 엄마는 놓치지 않고 동생의 것까지 김치를 담그고 보냈다. 엄마의 동치미는 내가 먹어봐도 세계 최고다.

교대 근무에도 외삼촌 내외는 엄마를 우리 집으로 데려다주셨다. 몇 달 만에 보는 외삼촌은 그대로 삐쩍 곯아있었다. 당신의 어머니, 나의 외할머니에게 물려받은 당뇨로 인 한 것이었다. 당뇨에 죄악이라는 술 담배를 물고 사는데 안 그럴 이유가 없었다.

외할머니가 쓰러진 이유는 저혈당 쇼크였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광주 근처 사시는 이제는 퇴직하신 큰 외삼촌이 곁에 계실 때 할머니는 쓰려졌다. 엄마 아버지 나이도 계산이 되지 않는 시점에 TV에서는 우리나라 평균 수명 이야기가 나왔다.

세살 더 사셨구나. 외할머니가 지금까지 살아계신 건 순전히 근처에 사는 자식들 덕이구나 생각했다. 혼자 계실 때 쓰러지실 때도 할머니 댁 곳곳에 위치한 CCTV로 자식들이 발견하곤 신고하곤 했다고 엄마에게 들었다. 그런 경우는 한 번뿐이었다고도 들었다.

할머니와 곁에 있는 큰 며느리, 큰 외숙모와 요새 자주 다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외숙모의 고충이 멀리서나마 느껴진다. 내가 어릴 때는 몰랐던 말할 수 없는 고충을 앉고 사신 외숙모였다. 그렇게 삼여년 을 어떻게 사셨는지 모르겠다. 내가 지금 이곳에 쓰지 못하는 공백보다 더 한 것을 아이였던 나는 몰랐다.

명절의 어릴 때 같은 군내에 있던 외갓집은 가깝고도 멀었다. 고속도로가 잘 뚫려있지 않던 그 시절 전라도 땅 끝의 그곳으로 명절 당일에 온전히 있으려면 연휴 2박 3일은 모자랐다. 3박 4일은 투자해야 갈 수 있었다. 그 중에 1박은 차에 붙들려 있어야 했다.

경부, 호남고속도로 그 외에는 선택할 고속도로는 없었다. 고속도로는 고속이라는 이름을 뺏어야 할 판이었다. 뺏어가는 건 통행료 뿐이니, 국도로 차를 돌리는 게 현명했다. 아빠는 전국의 도로를 다 아는 것 같았다. 전국의 도로 곁이 화장실이었다. 그만큼 멀었다.

그보다 더 먼 곳은 외갓집이었다. 지금은 고개도 뚫려 있고, 고속화도로도 나 있어 2-30분이면 갈 거리지만 그때도 4-50분이면 충분히 갈 거리였다. 할아버지가 안 계신 큰 집, 우리집에 작은할아버지가 곱게 한복을 차려입으시고 차례를 모시고 할아버지께 세배를 하고, 집성촌이니 동네 어르신들에게 세베 드리며 동네 한 바퀴 돌아도 정오가 안 되었다.

큰 아들로서 할 일 다 했으니 이제 처가에 갈 만도 한데, 차가 없는 것도 아닌데, 도통 갈 생각을 안 했다. 그렇게 해 넘어갈 때쯤 외갓집에 가면 어머니 형제들은 많지 않았다. 그것도 가는 길이 멀다 하여 반나절이면 길을 나섰다. 그때마다 나는 뒷자리에서 눈물을 훔쳤다. 가끔씩 보는 외사촌 누나들과의 시간이 짧았으니까. 그래서 이곳에서 만난 형, 누나의 인연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기회가 닿으면 시골에 혼자라도 가려고 했다. 그 이전에는 추석, 설날 그 외의 이벤트가 아니면 갈 일이 없었다. 1박2일이 걸려 꼭두 새벽에 시골에 닿았을 때, 어떻게 아시는지 할머니는 차가 서는 곳까지 마중을 나오셨다. 그때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는데 지금에서는 그럴 수 없다는 걸 느낀다. 그래서 더 짠하다. 등은 굽어 가슴은 땅을 보고 있는데, 눈은 우릴 보고 계셨다. 그래서 더 보고 싶다.

외할머니가 올해 몇이지? 엄마에게 물었다. 그리고는 할머니는 올해 몇이실까 다시 물었다. 아직도 생각이 난다. 군대 가기전에 할머니, 외할머니 보러 시골에 갔던 때를. 두 분 모두 자고 가라 하셨는데, 멀고도 멀다 느껴 인사만 하고 돌아섰다.

지금도 생각난다. 할머니 댁 마을 앞 정자에서 논이 양옆에 있는 그 길을 걸어가는 손주를 끝까지 바라보고 계셨던 할머니와, 작은할아버지의 모습을.

일병 물이 빠질 때쯤, 포대 본부 점호를 마치고, 차량 일조점호를 하고 있었다. 79호 이상무!를 외칠 때 수송부 행정반 고참이 수송부 연병장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본부로 올라가라'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인데 그런 연락이면 직접하면 더 효율적이지 않겠냐?'는 지금에서 드는 생각이다.

이상무!를 외칠 때도 잠이 안 깬 일병을 포대장과 행보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본부로 올라가면서부터 예상했던 얼굴이지만 막상 대 하고 나니 울음부터 쏟아져 나올 판이었다. 포대장님은 행보관님의 옆구리를 찔렀다. 행보관님 입에서 예상했던 답이 나오자 나는 와락 앉고 울어버렸다. 보고싶다 이ㅇㅇ중사님.

이야기 하다보니 너무 멀리 왔다.

외할머니는 일주일 입원하셔야 하나보다. 나와는 피가 섞이지 않은 증조 외할머니는 올해가 100세라고 하더라. 그 할머니와도 추억이 많은데 다 기억하시려나. 가까이 사는데도 멀고도 먼 거리이다. 군대 가기 전 할머니, 할아버지 어르신들 뵈러 갈 때가 오래인데, 지금은 그 거리가 멀고도 멀다.

무엇이 그 거리를 더 멀게 만드는 것일까.

지금에는 없고 그때는 있고, 지금에는 있고 그때는 없는 그것이 보고 싶다.

군대 시절 할머니를 보내고 온 주말에 내무실 tv앞에 앉아 자연스레 고정되어 있던 음악채널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오는데 혼자 많이 울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 다행스럽게도.

올해가 할머니가 가신지 십년하고도 일년이 되었다는 걸 알았다.

십 년하고도 일 년 전에는 그 어떤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단 몇 번이었지만 할머니, 외할머니를 뵈러 갔었는데, 지금은 어떠할까. 그때도 느꼈지만, 지금도 그러하다. 그 하루의 만남은 열흘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외할머니는 갈 때마다 빨리 올라가라 하셨다. 올라가는 길이 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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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고맙습니다.

외할머니께서 당뇨땜에 편찮으신가봐요 병원다녀오시고 언넝 쾌차하시길 바랄게요 ~ 외할머니와의추억이 있으셔서 부러워요 ^^

감사합니다!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오래 사실 것 같아요.

저도 할머니와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멀고 머네요.
지금은 찾아뵐 수도 없지만, 그리운 것이 단지 그분들 뿐이겠습니까?
엄마, 아빠라도 자주 뵈러 가야할텐데, 제주도 이사오고 나니 멀고 머네요.ㅜㅜ

할아버지 두분을 못 뵈어서 할머니들에 대한 기억이 더 많이 남는 것 같아요. 말처럼 쉬우면 좋겠지만 마음 그것이 어려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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