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예쁜 머뭇거림의 시간

in #kr-pen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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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남자애가 있었다. 같은 학원에 다니는, 웃는 얼굴이 아주 해사하고 예쁜 애였는데, 은근히 수줍음이 많아 말수가 적었다.

그 애는 그의 샤이함을 지적하는 선생님 앞에서도 말없이 화사한 미소만 지어 보여 선생님을 전투 불능 상태에 빠뜨린 것은 물론 교실의 모두를 노예로 만들었었는데, 희한하게도 무려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종종 그 얼굴이 맥락 없이 떠오르곤 한다.

느닷없이 웃는 얼굴 밝힘증을 고백하려는 건 아니고, 사실 그 애의 말하는 분위기가 좋았다는 얘기를 꺼내려다 서론이 길어졌다.


샤프심이 떨어졌다든가, 지우개를 빌릴 때라든가, 서로 아는 친구 얘기라든가 어쩌다 한 번씩 얘기를 나눌 때가 있었는데, 그 애가 입을 떼기 직전의 수줍은 머뭇거림이 무척 사랑스러웠다.

단어 하나하나를 골라 정성스럽게 문장을 말하는 느낌이랄까.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말을 참 예쁘게 했다는 이미지만이 남아있다. 그런 분위기로 말을 하는 사람을 좋아하게 된 건 필시 그때부터인 것 같다.


그때도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고, 짓궂게 내 별명을 불러대며 놀리던 개구쟁이들이 있었다. 날 울리기 위해서라면 마음에 없는 말도 사력을 다해 던져서 상처 주던 녀석들.

세월이 흘러 지금 나는 말을 험하게 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본심은 그게 아니라는 걸, 제대로 된 표현 방법을 배우지 못해 어색해서 그런다는 걸 아는 나이가 됐지만, 가끔은 말에 온전한 마음을 담아 예쁘게 말하는 사람이 그리울 때가 있다.

과하지 않게, 담백하게, 솔직하게 말하는 그런 사람. 본심과 다른 말은 결국 본심과 다른 마음을 전한다는 걸 아는 사람. 험한 말은 상처가 되고, 말에 삐뚤게 담긴 마음은 결국은 쏟아져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걸 아는 사람.

마음을 말로 가지런히 정리하는 예쁜 머뭇거림의 시간을 가진 사람.


아무튼, 결국 난 미소 천사 그 애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한마디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그 당시엔 '천사는 모두의 천사'로 남겨놔야 한다는 뭔가 이상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난 몇 년 후 꾸준히 날 별명으로 놀려대던 짓궂은 한 녀석의 고백을 받아주었다.

입이 험한 사람은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 첫 번째 계기라면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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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련한 이야기군요.

네, 소중한 추억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예쁜 머뭇거림의 시간이란 표현이 너무 좋네요... 배작가님은 언어의 연금술사!!

강철의 연금ㅅ.....
아..아니 언어의 연금술사이고 싶습니다. ㅋㅋ
오늘도 감상해주시고 평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에드워드 엘ㄹ..흠흠 왠지 합장을 하고 싶어지는.. ㅋㅋㅋㅋ

모두의 천사님은 지금 어디에 계실까요..
배작가님만의 천사가 되었음 어땠을지...
다음 스토리가 있는지도 궁금해요
짓궂은 그 녀석에 대한? ^-^

천사군은 SNS에서 찾아봤었는데 어느새 아저씨가 다 되어 있더군요 ㅎㅎ 저만의 천사로 하기에는 뭔가 눈부신 존재였는데....
(대체 왜 이런 이미지가 생겼는지는 모르겠어요ㅋㅋ)

짓궂은 그 녀석은... 스토리가 있긴 한데 너무 꼬꼬마때 이야기라 왠지 부끄럽네요. ㅎㅎ 기회가 된다면 풀어보겠습니다. ^^

오..천사님도 세월의 직격탄을 맞으셨군요...ㅎㅎ
갑자기 피천득님의 인연이라는 수필이 생각나요...
세 번째는 아니 만나면 좋았을 것을....이란 내용의 그 수필이요..^^;;

와~ 은근 비슷한 상황의 작품을 잘 떠올려 주셨네요 ^^
그 인연을 회상하는 필력의 차이는 피천득 선생님이 넘사벽이시지만요 ㅠㅡㅠ ㅎㅎ
ddllddll님 덕분에 오랜만에 다시 찾아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해요 ^^

짱짱맨 호출로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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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요 짱짱맨~!

온전한 마음을 담아 예쁘게 말하는 작가님에게 짖궃게 굴었던 게 아닌가 반성을..ㅜㅜ 대신보팅으로다가..

아뇨 ㅎㅎ 전혀 짓궂지 않으셨고, 전 짓궂게 구는 사람도 좋아합니다 ㅎㅎ 언제나 유머러스하신 마법사님, 늘 찾아주셔서 감사해요. ^^

시작하는 첫 문장을 보고서 역시 작가님이시구나 했습니다ㅋㅋ

'본심과 다른 말은 결국 본심과 다른 마음을 전한다'라.. 저는 지금도 가까운 사람에게 말 하는 게 너무너무 어려워요.

혹시나 상처를 주고 받게 될까 진심도 되려 많이 숨기게 되고, 한참을 돌리고 돌려서 꺼내 놓는 말들이 결과적으로 더 나쁜 상황을 만드는 걸 알면서도 고쳐지지가 않으네요~

오늘도 큐레이팅 슥-
사진예술 잘 보고 갑니다 :D

사실 거북님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것 같아요.
저 역시 그런걸요 ㅎㅎ 가까운 사람들한텐 더더욱 맘에 없는 소리를 하게 되죠.

그런데 뭐 내가 그렇게 비뚤게 굴어도 남아주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본심 다 헤어려주고 이해해주는 그런 사람들이요. 잠깐 어긋나더라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주는 사람들. 그런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으면 그들에게 고마워 하며 살면 되는 거 아닐까요. 일부러 고치치 않아도 있는 그대로의 거북님을 아껴주는 사람이 이미 있으시잖아요?^^

저도 수줍음이 많아요.
그래서 머뭇거리구요.
웃는 것도 이쁜데 ㅎㅎ
믿을 수 없죠?^^

아뇨? 왜 못믿나요~ 이미 느끼고 있는데요 ^^
댓글 하나도 곱게 수 놓는 것 처럼 단어 하나하나를 골라서 달아주시는 분들이 많지 않아요~
그 이음매가 순하고 부드러운 걸 보면 얼마나 머뭇거리시고 망설이는 시간을 가졌을지 모를 수가 없는걸요.
그리고 미소 예쁘신 건 이미 프사에서 확인 했습니다! ㅎㅎ

표현에 익숙하지 않은 남자아이는 좋아하는 여자아이의 관심을 얻기 위해 반대로 행동하기도 하죠.

저의 경우 그것이 마이너스라는 것을 깨닫는데 1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 것 같습니다. ㅎㅎ

표현에 익숙하지 않은 시기에 사람들은 변화구를 많이 던지지만, 대부분의 상대는 그 변화구를 받아낼 능력이 없는 것 같아요.
둘이 싸인(?)이 맞아야 변화구도 변화구가 아닌 스트라이크가 될텐데 말이에요. ㅎㅎ
깨달으셨으니 이제 직구만 던지시려나요? ^^

어릴 적 이야기 입니다. ㅎㅎ
지금은 행복하게 가정을 이루어 잘 살고 있습니다. :)

직구를 익힌 사람의 아름다운 결말이로군요 ^^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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