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여행의 기록

in #kr-pen6 years ago (edited)


짧은 여행을 했다. 

흘러가는 시간이 야속하면서 바람을 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는데 막상 집밖으로 나가기가 쉽지 않은 요즘이었다. 그러다 조치원에서 김연수 작가의 강연이 열린다는 게시글을 봤고 그리 끌리지도 않았으면서 무작정 기차표를 예매했다. 오기와도 같은 결정이었다. 그리고 그제, 강연 시간에 임박해 조치원에 떨어지는 기차를 탔다.

조치원역에 내렸을 땐 이미 어둠이 깔려 있었다. 역 앞으로 이어진 높지 않은 건물들 1층에 식당, 카페, 옷가게 같은 것들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근처의 로터리 때문인지, 생경하면서도 정감이 가는 아주 묘한 분위기였다. '역전앞'이라는 단어가 있다면, 조치원역 앞의 풍경을 말하는 걸 거라고 생각했다. 


강연장은 추웠다. 강연 시작 10분 전쯤 도착해 가만히 앉아 있으니 발이 시려 올 정도였다. 추워서 다리를 떨고 있었는지 옆사람에게, 진동이 느껴지니 주의해 달란 식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목도리를 코밑까지 두루고 김연수 작가가 무대에 오르길 기다렸다. 

노란빛의 바지를 입은 작가가 무대 위로 오르자 객석에서 함성이 나왔다. 나는 그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봤다. 아주 오래전, 나는 김연수 작가의 팬이었다. 그랬던 것 같다. 한 번, 그의 강연에 간 적이 있었다. 수줍게 싸인도 받고 함께 사진을 찍었었다. 그 이후로 작가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진 속 모습을 오래 간직하고 있었다. 무대 위로 등장한 작가의 얼굴은 내가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사진 속 얼굴은 6~7년 전의 것일 테니까. 


당시 강연의 주제는 '쓰는 사람'에 대한 것이었다. 그때 나는 글 쓰는 삶에 대해서 조금의 동경 같은 걸 품고 있었고 그래서인지 강연을 듣고 그 울림이 길었다. 그때 나눠 준 강연 자료를 지금까지 갖고 있을 정도다. 

김연수 작가가 2014년에 낸 <소설가의 일>을 읽고 나서 나는 그 자료를 특별하게 생각하게 됐다. 그 책에, 강연 때 받은 자료가 한 챕터로 들어가 있던 것이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책을 읽으며 강연 자료를 꺼내어, 어떤 부분이 달라졌는지 확인해 봤다. 편집자나 작가가 책을 만들면서 어떤 부분을 고치는지 살펴보는 일이 퍽 즐거웠었다.


이제 나는 김연수 작가가 어떤 책을 내고 어떤 소설을 쓰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무관심한 독자가 되었지만(과연 독자라 할 수 있을까), 또다시 뭔가를 기대하며 강연장을 찾았다. 이번 강연의 주제는 '우리 모두 스토리텔러가 됩시다'였다. 

처음엔 다소 뻔한 듯한 주제라고 생각했는데 강연 끝부분에 가서는 부끄럽게도 눈가가 촉촉해지고 말았다. 강연의 요지는 이거였다. 


인생에는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과 이루지 못하는 것이 반복되는데, 이루지 못한다 해서 '불행'해지는 것은 아니며 이는 단순히 '실패'한 것일 뿐이다. 또 만약 원하는 것을 이룬다 하더라도 '행복'에 가닿을 수는 없다. 단지 그 일을 이룬 순간을 '만끽'하는 것이 중요하다. 
'헹복'은 우리가 원하지 않았는데 이루어진 것들에 있다. 말하자면 우정이나 공기 같은 것. 어느 순간 우리 곁을 지켜 주는 것들, 인식하지 못했지만 옆에 있었던 것들. 행복은 그런 것들에 스며들어 있다. 
스토리텔러가 되기 위해서는 시간을 견디는 일이 필요하다. 세상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우리에게 강요되는 세상의 이야기(세상의 법칙), 다른 하나는 세상의 요구와는 상관없거나 그에 반하는 나만의 이야기다.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려면 먼 시간을 내다보고 현재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현재 불행이라 여겨지는 것들을 죽기 전의 내가 바라본다고 생각해 보자. 


김연수 작가는 여러 예를 들며 현재의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질지는 먼 미래에 가서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중 재밌었던 건 안평대군의 몽유도원도 이야기였다. 1447년 안평대군은 도원을 여행한 꿈을 꾸었고 그 꿈을 기록하고 안견에게 그림으로 그리게 했다. 안평대군은 꿈에서 박팽년과 함께 도원에 갔고 신숙주와 최항이 어느 순간 뒤에서 나타났다고 묘사돼 있다. 

1453년, 계유정난이 일어나 안평대군이 희생되고 신숙주와 최항은 당시 수양대군의 편에 섰다. 이에 반해 박팽년은 수양대군이 난을 일으키고 왕위에 오른 후에도 단종의 복위를 추진하다 죽는다.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지 모르지만, 1447년 안평대군이 꾼 꿈이 1453년이 되어 그 의미를 드러낸 셈이다. 

이후로 신숙주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1475년, 신숙주는 눈을 감으며 자신의 삶을 성공한 인생으로 규정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500여 년이 지난 지금, 그의 이름은 나물 이름으로 불린다. 잘 쉬어 버리는 나물에 신숙주의 변절자 이미지를 덧입힌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오래 전 강연장을 찾았던, 지금보다 어린 내 모습을 떠올려봤다. 이유도 모른 채 억눌려 있던 나를. 주저했던 나를. 

그러다가 그때부터 뭔가를 쓰면서 나를 다듬어 왔다면 지금 내 모습은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좌절감이 먼저 들었지만, 이내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6~7년 전 쓰는 삶에 관해 이야기 들었던 그 하루가 한참이나 지나서 나를 또 다른 이야기의 세계로 이끌었다고.


늦은 밤 집으로 돌아와 그 시절 김연수 작가와 함께 찍은 사진 파일을 찾아봤다. 지금보다 예닐곱 살 어린 내 얼굴에 풋풋함이 가득했다. 나는 싸인 받은 책을 들고 김연수 작가 옆에서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사진 속 나는 모든 게 어색했다. 블러셔를 과하게 발라 볼이 빨개져 있었고 억지로 미소를 지은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또 모든 게 좋아 보이기도 했다. 지금보다 앳되고 통통한, 순해 보이는 얼굴이.

언젠가 또 후회할 거야? 사진 속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지금으로부터 수년이 지난 내 모습을 떠올려 보고 싶었는데 아득하기만 했다. 


그저 내가 좀 더 느리게 읽고 쓰길 바라고 좀 더 진중한 자세로 삶을 관조할 수 있기만을 바란다. 

짧은 여행의 기록이다. 


어쩌면 우리가 원하는 그런 세계는 절대로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지 못할지도 모르고, 이 병은 낫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고 이 불안을 모두 떠안겠다. 그리고 정말 우리가 원하는 세계가 오지 않는 것인지 한 번 더 알아보겠다. 이게 현대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윤리가 아닐까. 자신의 불안을 온몸으로 껴안을 수 있는 용기, 미래에 대한 헛된 약속에 지금을 희생하지 않는 마음, 다시 말해서 성공이냐 실패냐를 떠나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태도. -<소설가의 일> 51p


내가 <소설가의 일>에서 유일하게 밑줄을 쳐 놓은 구절이다.


Sort:  

성공과 실패보단 지금 집중하고 있는 이 일의 과정에서 행복을 찾아야 겠군요... 행복해지기 위한 조언을 받은 것 같아서 마음 한 켠이 따뜻해집니다 :)

그렇게 느끼셨다니... 감사합니다. 저를 돌아보면서 다짐하려고 쓴 글에 공감해 주시니 제 마음도 따뜻해졌어요^^

'조치원' 학교생활을 했던 곳이라 좀 더 반가운 마음 가득 글을 읽게 되었네요~ 강연을 들으러 다녀오셨다니 '짧은 여행'에 담긴 열정이 느껴집니다! 어느 정도의 만족감을 갖느냐에 따라 스스로의 행복이 따라오는 것을 몸소 느끼게 되는 요즘입니다~ 강연내용 기록하고 함께 나눠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조치원, 왠지 모르게 정감 가는 곳이에요. 학교 생활도 즐거우셨을 거라고 상상해 봅니다. 행복은 아마도 자기가 노력하지 않는 이상, 찾아오지 않는 것 같아요. 모든 게 내 마음가짐에 달렸다고 생각해 보니, 옆에 있는 것 중 소중하지 않은 게 하나도 없더라고요. 글 읽고 공감해 주시고 댓글까지 남겨 주시니 정말 행복합니다^^! 감사해요~

행복은 제 옆이나 발밑에 있을수 있다는 걸까요 :) 읽고 보니 저는 불행하지는 않은것 같아요. 그래서 더욱 안심하고 도전하고 실패할수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멋진 말이에요. 더 안심하고 도전하고 실패할 수 있다! 우리 모두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봅니다.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상이라는 선물이 주어졌는데 겁내고 가만히 있기엔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까지는 겁내기만 했지만요.
항상 행복한 지금을 만끽했으면 좋겠어요. 댓글 감사해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애플포스트님의 글이 저에게 또다시 깊은 울림을 줬네요
팔로 하고 자주 들르겠습니다. 좋은글 부탁드립니다 ^ ^~

제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혼자 다짐하는 느낌으로 쓴 글에 많은 분이 공감해 주셔서 놀랐고 감동했네요. 저도 팔로 하고 자주 들러 보겠습니다. 감사해요^^

충청도 조치원은 아버지 고향이라 참 친근합니다.
날이 풀리면 조치원엘 가보고 싶네요…

조치원과 연이 있는 분이 많네요. 정말 느낌이 좋은 곳이었어요. 강연장 주소가 세종시로 시작해서 신도심 어디쯤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지도에서 찾아보니 조치원역 근처였어요. 더 반가운 마음으로 다녀왔답니다ㅎ 댓글 남겨 주셔서 감사해요. 반갑습니다^^

인생에는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과 이루지 못하는 것이 반복되는데, 이루지 못한다 해서 '불행'해지는 것은 아니며 이는 단순히 '실패'한 것일 뿐이다. 또 만약 원하는 것을 이룬다 하더라도 '행복'에 가닿을 수는 없다. 단지 그 일을 이룬 순간을 '만끽'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독 마음에 와 닿는군요~ 좋은 글 잘 보았고 감사드립니다~^^

글 읽어 주시고 댓글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마트컴님 블로그에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 긍정의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는 글 잘 읽고 있습니다. 만끽하는 삶 응원할게요!

개인적으로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작가에요. 그런데 이 책은 나오자마자 바로 샀답니다. 읽으며,,, 아... 난 소설가로 살 수 없는 걸까??? 라는 생각을 했더랬죠.

댓글 감사합니다. 블로그에서 보니 이미 소설가로 살고 계신 것 같은데요. 종종 들르고 응원하겠습니다^^

아직은 반만 소설가랍니다. ㅠㅠ 자주 뵈어요. ^^

작가를 통해 떠나는 추억여행같은 느낌이 들어서 좋았습니다.
감성이 매우 풍부하신 분 같네요^^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방법이 머나먼 시간에서 현재를 바라보기라는 견해는 참 마음에 와닿습니다.

'작가를 통해 떠나는 추억여행' 후, 지금 하는 사소한 고민과 주저함 같은 게 먼 미래엔 별것 아닐 거란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 보자고 다짐했네요. 글 읽어 주시고 댓글 달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도 김연수작가님의 팬이였던 적이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지금이 다시 김연수작가님의 호흡으로 세상을 살아야할때가 아닌가 싶네요.
참,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김연수 작가님의 팬이셨었군요! 저희 둘 모두 과거형이네요. 좋아했던 것에 더는 관심이 가지 않을 때도 있는데 또 언젠가는 엄청시리 좋아지기도 하더라고요. 저는 이번 강연을 계기로 김연수 작가님의 소설을 다시 읽어 보려고 하고 있어요.
'지금이 다시 김연수 작가님의 호흡으로 세상을 살아야 할 때'라는 말에 동감합니다. 느리고 섬세한 호흡으로 세상을 느껴 보려고 해요. 글 읽어 주시고 댓글 달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치원 경찰서 길 건너편에서 시작하는 시장 골목은 많이 변했을테고 면사무소 앞 춘천닭갈비와 근처 이바돔레스토랑도 당연히 없어졌을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 '행복'과 '만끽'을 구분하지도 못하고 있네요....

조치원에서 한 시절을 보내셨군요. 행복, 만끽이 구분하지 않은 상태로 살면 '행복+만끽'이 되지 않을까요? sadmt님의 '행복+만끽' 하는 삶 응원합니다.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Coin Marketplace

STEEM 0.20
TRX 0.14
JST 0.030
BTC 67657.28
ETH 3498.77
USDT 1.00
SBD 2.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