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면서 그림이고, 음악인 소설 < 마르그리트 뒤라스 - 모데라토 칸타빌레 >

in #kr-pen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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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그리트 뒤라스 - 모데라토 칸타빌레

오늘 이야기할 작품은 프랑스 유명 작가인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입니다.
실은 책에 대해 하나하나 짚어가며 소개를 하려 했는데요.
전에 쓴 독후감을 보니 책을 읽고난 후의 느낌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것 같아 그 글로 대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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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메르 가에 이르렀을 때, "어쨌든 이번엔 잘 기억해둬" 하고 안 데바레드가 말했다.
"모데라토, 그건 '보통 빠르기' 로라는 뜻이고, 칸타빌레는 '노래하듯이'라는 뜻이란다. 쉽지?" 27p



(1958) 마르그리트 뒤라스 - 모데라토 칸타빌레 18.02.22~02.23 정희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뒤라스의 소설 연인에만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다. 이 책은 연인을 빌리던 와중 손에 잡혀 덤으로 빌려왔다. 요즘은 생각지도 않은 덤이 원래의 것보다 좋았던 적이 많다. 사은품으로 받았던 샴푸도 그렇다.

각설하고, 손에 잡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손을 뻗게 된 것은 '모데라토 칸타빌레'라는 음악 용어 때문일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음악과 관련된 뭔가를 보면 마음이 동한다. 하다못해 문구점에 뒹구는 피아노 모양의 싸구려 장난감만 봐도 그렇다. 그것은 음악을 한다는 알량한 자부심 때문일 테다.

자꾸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새는 것은, 아직 이 작품을 제대로 마주하기가 두려운 탓이 아닐까. 지금까지 말을 뱅뱅 돌렸지만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은 소설이었다는 것이다. 빨리 읽고 치워버릴 요량으로 시작된 독서가 이토록 깊게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게 될 줄은 몰랐다. 이 소설을 읽고 나서야 그간의 독서는 취향도 줏대도 없었음을 알게 됐다.

처음 읽었을 때는 아무 감정이 없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약간의 찌르르한 느낌뿐, 큰 감동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계속 소설이 맴돌았다. 손 닿는 대로 책장을 펴 여기저기 두서없이 읽었다. 모든 부분이 다 좋았다. 모든 구절에 무언가가 숨어있다. 어릴 적부터 생각했던 것. 좋은 예술은 끝나고 나서 생각할 거리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여러 생각과 감정이 폭풍처럼 몰려왔다. 뒤라스라는 여인은 나를 삼킬 듯이 강하게 다가왔다.

여성의 소설이라는 게 무엇일까. 여러 여류 작가의 책을 읽었다. 하지만 한 번도 여성의 소설이라는 생각을 하진 못했다. 이 소설을 읽고서야, 아니 연인과 모데라토 칸타빌레 두 권의 책을 읽고 나서야 여성의 소설이라는 게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언제 어떻게 깨질지 모르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이유 없이 눈물이 흐르는 것들.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섬세함.

이 소설은 금기처럼 시각화된다. 마치 그 풍경을 그리는 것조차 죄가 되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묘사가 이어지지만, 금기에서 오는 매력을 거부하지 못하고 이내 그 풍경을 떠올리게 된다. 닿을 듯 닿지 않은 손, 이상하리만큼 화창했던 날씨, 저 먼 동네에 있는 고급 저택, 싸구려 카페, 2층의 피아노 교실. 정확한 지명조차 모르는 곳이지만 늘 가던 곳인 양 익숙하게 그려진다. 그리고 그것은 내 안에서 하나의 확실한 풍경으로 남는다.

독서가 끝나고, 또 다른 형태의 독서가 시작된다. 작품에 대해 찾아보며 새로 깨닫게 되는 것들이다. Diabeli piano sonata op.168 no.1장을 듣는다. 빠르기는 Moderato Cantabile. 아이가 소설 속에서 흥얼거리던 소나타 멜로디가 실체로 다가올 때, 엄청난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왜 이 곡을 이 소설을 읽을 땐 듣지 못했을까, 혹은 이 소설을 읽기 전에 왜 이 곡을 몰랐을까 하는 때늦은 후회도 인다. A A B A' 형식의 곡. B 파트에서는 조성이 Minor로 바뀐다. 장조의 편안하고 아름다운 멜로디는 라메르 가에 살고 있는 그녀의 삶일까? 단조의 B 파트는 싸구려 카페에서의 앤일까? 그 다음 이어지는 A'는 다시 쇼뱅을 등지고 라메르 가로 돌아가는 그녀일까? 알량한 무기를 내세워 상투적 분석을 해봤다.

이 짧은 소설에서 느껴지는 강한 힘은 어떤 말로도 쉽게 표현하기 힘들다. 너무나 확실한 소설을 만나면 오히려 말이 적어진다. 문득 나도 이런 강렬한 사랑의 소용돌이에 몸을 내던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변할 것 없는 단조로운 일상에 내 몸을 맡겨보고도 싶다.



아이는 창문 쪽으로 고개를 약간 돌렸다. 아이는 삐딱하게 앉은 채 바닷물에 반사된 햇빛이 벽에 그리고 있는 일렁이는 물결 무늬를 곁눈질하고 있었다. 오직 엄마에게만 아이의 두 눈이 보였다.
“웬 창피람, 녀석도 참....” 엄마가 들릴락말락 말했다.
“4박자요.” 아이는 꼼짝도 않고 귀찮다는 듯 말했다.
눈동자에서 머리카락이 황금빛 춤을 추고 있는 것만 빼면 그날 저녁 아이의 눈은 거의 하늘과 같은 색이었다.
“언젠가는” 하고 엄마가 말했다. “언젠가는 저 애도 그걸 알게 될 거고, 주저 없이 말할 거예요. 반드시 그렇게 될 거 예요. 저 애가 원치 않더라도 너무나도 잘 알게 될 거예요.” 74p


“말씀드렸듯이, 전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가끔. 그럴 때면 저 아이 방으로 가서 오래오래 저 애를 바라본답니다.”
“다른 때도 그런가요?”
“다른 때도 그래요. 여름이라 길에는 산책하는 사람들이 좀 있거든요. 토요일엔 특히 많아요, 이 도시에서 자기 자신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탓이겠죠.” 88p


그 사내는 자기도 모르게 갔던 길을 되돌아올 것이다. 그는 목련꽃, 철책, 그리고 멀리서 보아도 여전히 불이 밝혀져 있는 전망창을 다시 본다. 오후에 들은 노래를 또다시 흥얼 거리며, 입 안을 맴도는 그 이름을 더 크게 부르리라. 그는 지나갈 것이다.
그 여자는 이번에도 그것을 알고 있다. 가슴 사이에 꽂은 목련꽃은 완전히 시들어버렸다. 한 시간 만에 한여름을 겪어 낸 것이다. 사내는 곧 정원을 지나쳐 더 멀리 갈 것이다. 그가 지나갔다. 안 데바레드는 가슴에 꽂은 꽃을 비틀어대는 끝없는 몸짓을 계속하고 있다. “안은 듣지 못했어요.”
그 여자는 활짝 웃으려고 해보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10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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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관심있던 분야가 아닌데 재밌게 읽었어요. 글을 잘쓰시네요~

과찬이십니다. 실은 독후감 노트에 적어논 글이라 일기같은 글이에요. 꺼내 보이려니 쑥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외람되지만 오래전 쇼팽의 녹턴 1번을 듣다가 그 보다 더 먼 날의 이별이 생각나 시를 쓴 적이 있습니다. 어쩐지 그런 느낌이 드네요.

덕분에 쇼팽 녹턴 1번을 틀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스팀잇에서 그 시를.. 볼 수 있을까요?
음악을 듣고 시를 쓴다니 참 멋있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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