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은 자랑이 되는가?

in #kr-pen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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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슬픔은 자랑이 되는가?"

며칠 전 새로운 몇 명을 알게 됐다. 우리는 서로 잘 몰랐다. 가볍게 시작된 이야기가 불쑥 깊어졌다. 당혹스러웠다. 이야기를 꺼낸 건 난데, 분위기가 걷잡을 수 없이 가라앉고 있었다. 그들은 삶의 투쟁을 담담히 이야기했다.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몰랐다. 애써 슬픔을 쥐어짜 냈다. 나도 이만큼 힘들었어요. 그리고 지금도 슬퍼요.

갑작스레 마주한 그들의 슬픔은 나를 붙잡고 한참 동안 놓아주지 않았다. 그들의 슬픔에 대해 생각했다. 담담한 어조로 말하던 담담하지 않은 이야기들. 그들을 피하게 됐다. 나도 그만큼 슬프다는 바보 같은 말을 계속 늘어놓을 순 없었다. 아마 그들도 알았을 것이다. 내가 슬프지 않다는 것을.

슬픔을 비교할 수 있을까, 슬픔을 자로 잴 수 있을까. 문득 슬픔에는 체급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진 작은 슬픔으로 그들을 위로할 수 있을까? 그것은 착각이고, 오만일까?

자랑처럼 내세운 나의 슬픔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는 하루다. 나의 슬픔은 자랑이 되는가. 자랑이 될 만큼 찬란한가? 자랑이 될 만큼 찬란한 슬픔이란, 그들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일까?

문득, 이 말을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 박준의 시구나.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다

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비 마중 나오듯
서리서리 모여드는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하였다

박준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중에서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당신의 깊고, 깊은 슬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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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위계를 매기는 순간 불행올림픽이 되죠. 저도 항상 경계하려고 하는데... 누군가 힘든 이야기를 하면 저도 괜시리 저의 과거를 끄집어내 조금이라도 연관 있는 기억을 소환하게 되더라고요. 실은 그렇게 힘들지 않은데.. 하는 죄책감도 들고요.

저런 상황에서 어떻게 이야기해야하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네요. 참 어려운 것 같아요. 진실된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겠죠? 앞으로는 제 불행을 얘기하는 것은 자제해보려 합니다.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타인의 큰 슬픔보다 내 손에 작은 가시가 더 아픈게 사람인 것 같아요. 태도가 중요할 것 같아요. 내 아픔좀봐줘 나 이만큼 아파 너얘긴됐고 내가 최고 아파. 이렇게 말하게 되면 상대는 그저 그 묵은 감정을 털어내는 대상이 되버릴 수 밖에 없는 것 아닐까요.

맞는 말씀입니다. 그들을 위로해주고 싶은데 정말 그들의 아픔을 내가 이해할 수 있는가? 이해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들이 떠올라 '선뜻 힘들었겠구나'라는 말을 꺼내지 못하겠더라고요. 자기 비하에 빠지지 않게 더욱 주의해야겠습니다.

슬픔이 자랑이라기보다는 저처럼 나누어 주길 조금이라도 바라는게 아닌가 싶어요 ㅠㅠ 요새 이런자란 일로 많이 힘들지만 그래도 다들 조금이라도 나누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들어오고 그러고 있네요

요즘 힘든 일이 있으셨군요. 잘은 모르지만 제게도 카인님의 힘듦이 조금이라도 나누어질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냥 들어만 주는 것, 그냥 그 감정을 이해하려 하는 것만으로도 좋은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드네요. 힘내시길 바라겠습니다! 제가 응원할게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만 서로 나누며 위로해주기위한 슬픔인데 자랑이라고 말하기엔 뭔가 남는거없는 대화가 될거같아요...

대화하는 과정에서 제가 실수가 있었음을 인정합니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슬픔을 꼭 이야기해야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 맥락에서 슬픔도 자랑이 되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요. 저도 누구보다 위로해주고 싶지만 요즘은 위로도 그냥 쉽게 할 수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네요. 힘들었겠구나라는 말 한마디면 될 것도 같은데, 괜히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시에 적힌,
박준 시인의 담담한 서정을 어찌 따라갈 수 있을까요-

제 개인적인 시선으로는,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라는 말은, 나 자신이 나의 슬픔을 자랑하기보다, 상대방의 슬픔에 대해 '당신은 충분히 자랑할 자격이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나(화자)의 인정과 용기로 와닿습니다.

당신은 충분히 잘 버텨왔고 잘 겪어왔으며 그만큼 잘 이겨냈다는 의미가
결국, 슬픔의 "자랑"이라는 표현으로 와닿기도 합니다.

저는 이 시로부터, 역설적이게도 "상대방의 슬픔을 인정하지 못하는" 나(화자)의 시선을 읽고 그래서 이 악물고 인정하려는 나(화자)의 노력을 읽습니다.

그러니 어쩌면, 슬픔의 '인정' 앞에서 체급은 무의미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같이 슬퍼한다는 것이, 그 방식이, 나의 슬픔을 같이 내어놓기보다, 그래서 재고 비교하며 나도 당신들만큼 아팠어라고 이야기하기보다, 상대방의 슬픔을 오롯이 인정해준다는 것만으로도, 당신들의 슬픔은 우리에게 충분히 내어놓을 수 있고 인정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그걸로도 괜찮을 듯하다는 생각입니다.

@홍보해

제가 이 댓글을 오늘에서야 보게 되었네요. 보고 넘길 수 없었고, 또 죄송한 마음에 댓글을 답니다.

'상대방의 슬픔을 오롯이 인정해주는 것', '당신들의 슬픔은 우리에게 충분히 내어놓을 수 있고 인정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해주는 것.' 저도 그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합니다.

막상 그 상황이 제 눈 앞에 오니, 선뜻 당신의 슬픔을 인정한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네가 뭘 아는데 그래?" 라는 질문이 두려워. 주섬주섬 얕은 슬픔을 꺼냈던 것도 같습니다.

이 댓글을 읽고나니 그럼에도, 상대방의 슬픔을 오롯이 받아들이는 것만이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벼운 글에 이렇게 깊이있는 댓글을 달아주시다니요. 잠깐 부끄러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죄송하실게 뭐 있나요. 괜찮습니다. 애초에 제가 댓글을 달 때에는 굳이 응답을 무조건 기대하며 달지는 않습니다. 이어지면 좋은 것이고, 어어지지 않더라도, 글에 대한 일종의 선물 같은 느낌으로 답니다. 글이 더 풍성해지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가벼운 슬픔이라도 슬픔을 꺼내놓는게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글이 그리 가볍게 느껴지진 않았었습니다.

저도 감사합니다.

@ab7b13님 안녕하세요. 겨울이 입니다. @qrwerq님이 이 글을 너무 좋아하셔서, 저에게 홍보를 부탁 하셨습니다. 이 글은 @krguidedog에 의하여 리스팀 되었으며, 가이드독 서포터들로부터 보팅을 받으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저는 슬픈이야기를 잘 하지 않습니다. 기분 좋은 일을 떠올리는 것으로도 모자른 인생인것 같아서요

요즘 전 슬프거나 좋지 않은 사연을 남애게.. 부모애게 조차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남에게는 좋은 사연도 잘 애기히지 않습니다....지면이 협소해서 이만.. 팔로우합니다

내용도 좋은데.. [비 마중 나오듯 서리서리 모여드는...] 이라는 표현이 너무 아름다워요...눈물 맺힘을 저렇게 아름답게 묘사해주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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