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 육체에 다른 이의 정신이 깃든다면, 그건 나일까? - 존 말코비치 되기 (Being John Malkovich , 1999)

in #kr-movie6 years ago (edited)

내 육체에 다른 이의 정신이 깃든다면, 그건 나일까?
ㅡ 존 말코비치 되기 (Being John Malkovich, 1999)

요즘엔 집에서 블루투스 스피커를 켜고 맥주를 마시며 영화를 보는 게 더 좋은 것 같다. 최근, 가장 인상깊게 본 영화는 내가 4살 때 개봉한, 존 말코비치 되기다. 지인의 추천으로 언제 꼭 봐야겠다고 생각한 숙제같은 영화였는데, 심오한 사색에 빠져들고 싶은 날 드디어 봤다. 그 전까지 보지 않았던 이유는, 표지의 영향이 컸다. 지금 삽입한 표지는 그나마 괜찮은 편. 처음 마주한 표지는 이거였다.

정장이든 원피스를 입은 사람이든, 대머리의 남자가 달린 가면을 저마다 얼굴에 씌워놓고 있는 섬뜩한 모습.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이 표지와 비슷한 장면이 엔딩 장면과 함께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 무표정한 대머리의 남자는 제목에 등장하는 이름, '존 말코비치'다. 신기한 건 정말 이 배우의 이름이 '존 말코비치'라는 것. 게다가, 사실 이 분의 비중이 큼에도 불구하고 네이버 영화에 <존 말코비치 되기>를 검색하면 주연에도 뜨지 않는다. '펼쳐 보기'를 클릭해야만 조연으로 나온다.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회사 7과 8층 사이에 있는 조그마한 비밀 문에 들어가면, 배우 '존 말코비치'의 머릿속으로 15분간 들어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방관자로서 존 말코비치의 1인칭 시점을 지켜볼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연습하거나 크게 반복해서 소리치면 행동을 바꿀 수도 있다. 전화를 받게 하는 작은 행동부터, 사랑에 빠지도록 하는 큰 결정까지.

환상적 요소가 가미되었듯, 영화의 도입부도 기괴하다. 그러므로 초반에 꺼버릴까 생각했던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좀 참고 보면, 몰입해서 볼 수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존 말코비치는 서서히 자신을 잃어버리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존 말코비치가 되기 위해 돈을 지불하며 줄을 서기까지 한다. 즉, 이 영화는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이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허영 가득한 욕망을 알 수 있을뿐더러, '나의 육체에 다른 이의 정신이 깃든다면, 그건 나일까?'를 생각해볼 수 있는 의제를 던진다.

제목을 보고 대부분의 사람이 이렇게 답할 거라 생각한다. 당연히 아니라고. 맞다. 누군가가 나의 정신과 행동을 조종해서, 내가 원하지 않는 쪽의 길을 걷는다면 더더욱 그러할 테고. 나는 이 의제를 조금 더 일상으로 끌어와서 생각했다. 누군가가 나의 정신을 조종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임으로, 다른 이의 생각이 담긴 주장을 계속해서 듣고 그게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다면, 그건 나일까?로.

선과 악의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하기 힘들듯, 다른 이의 생각과 내 생각 사이의 중립을 유지하기도 힘들다고 생각한다. 그간 내가 생각해 왔다는 것들이, 알고 보면 아주 예전 다른 이의 얘기였을지도 모르므로. 즉, 내가 그렇다고 생각한 주장이 사실 누군가에게 설득당해 바뀌었던 얘기였다고. 그렇다면 내 생각은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 정하기 모호해진다.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을 복수 전공하며, 미디어의 힘을 깨달았다. 대중의 여론을 조작할 수 있음은 물론, 프레임을 형성하고 뜨거운 의제를 만들 수 있는 힘까지. 최근 페이스북 SNS에 달린 이상한 댓글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조회수를 위해 이상한 얘기를 해대는 인플루언서까지.. 점점 타인의 생각 속에서 자신을 굳건히 지키기 어려워지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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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덴티티의 문제에서 중간이란 없는거죠.
이 영화가 이런 내용이었군요.
볼 영화는 많은데 시간은 참 빨리 가네요..ㅎ

모피어스김님, 안녕하세요! 아이덴티티의 문제 :) 맞습니다.
시간이 빨리 가고 계시다면, 무언가에 집중하고 계신가보아요.
저는 요즘 보고 싶은 영화가 없어 고민입니다 ㅠㅠ.. 댓글 감사해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

스파이크 존스의 상상력과 연출력은 볼 때마다 놀랍니다. 무려 이게 20년 전 영화라니요... 전 이 영화하면 항상 궁금한 게 왜 하필 그 수많은 영화배우/셀럽들 중 '존 말코비치'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ㅋㅋㅋㅋ

맞습니다. 이터널 선샤인의 각본을 쓴 찰리 카우프만의 작품이기도 합니다 :) 저도 오, 이게 20년 전 영화라고? 라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저랑 같은 생각을..! 존 말코비치 ㅋㅋㅋ 보다보면 귀엽더라고요. 정말 왜 존 말코비치를 쓴 건지 궁금해지네요. 읽어주시고,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해요!

다른 이의 생각이 담긴 주장을 계속해서 듣고 그게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다면, 그건 나일까?라고 묻는다면 확실히 아니라고 이야기하기도 힘들것같아요.
어차피 사람이라는 게 계속해서 주위, 혹은 어딘가와 커뮤니케이션을 하며 바뀌어 가는 동물인지라.. 모든 사람의 인생에는 다른 사람의 철학들이 조금씩 개입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ㅎㅎ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 저도 처음엔 ksc님과 같은 생각을 했었다가, 그럼 도대체 어디까지가 진정한 나의 철학일까 ㅠㅠ 라는 생각에 적어봤어요.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댓글도요 :)

오, 글 재미있게 읽었어요. 영화 리뷰 많이 해주세요 :)

글을 재미있게 읽었다는 말이 가장 좋습니다 :) 영화 리뷰가 에세이보다 소통의 수가 적어 고심하고 있었는데.. 만두님 덕에 계속해서 올려야겠어요 :) 팔로우 했습니다! 읽어주시고,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드려요!

오 이런 영화가 있었나요? 기괴하다고 하신걸 봐서 편하게 보는 영화는 아닐것 같지만 아이디어는 정말 기발한것 같아요.

맞아요. 장면을 보면서도 계속해서 곱씹었던 영화에요. 보면서도 자꾸 뒤로 감기를 누르며 기괴한 장면을 다시 보려고 했던 ㅋㅋㅋ 아이디어 기발합니다! 1999년에 나왔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요. 댓글 감사합니다 :)

어떤일이든 중립이 제일 힘든거 같아요. 자신의 힘이나 사회적인 지위가 적당히 높아야지만 가능하다고 생각되네요

맞아요 ㅠㅠ 여유가 있어야 중립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아요. knowkorea님, 항상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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