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 봄』 p.1  노랑 파프리카 죽

in #kr-diary6 years ago (edited)

내 세상의 전부같았던 침대를 빠져 나왔다. 움직일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너무 누워있어서 그런 것인지, 더 누워있으라는 신호인지 알 수 없다. 어제 미처 먹지 못한 엄마의 죽은 노오랗다. 노오란 파프리카를 갈아 넣었다고 한다. 어젯밤,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귀가 어두운 아빠를 애타게 부르며 믹서기 사용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하시는 걸 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내가 나서면 엄마에게 잔소리를 하게 될테고, 그러면 아빠는 나를 잡아 먹으려고 하실테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투명인간이 되어 마법의 양탄자같은 침대 위에 누워만 있었다. 늘 그런 식으로 모두가 잠든 시간 편의점에 가 컵라면이나 핫도그같은 것으로 한 끼를 떼우다가 탈이 난 것이다.

월요일부터 아프기 시작했는데 금요일인 어제나 돼서야 병원에 갔다. 3일이면 나을 줄 알았는데... 2년 전에 깨진 어금니가 불편하다고 식사를 하실 때마다 말씀하시면서 치과에는 가지 않으시는 아빠를 닮은 탓인지. ‘도저히 안되겠을 때’ 움직이는 것은 시험공부를 할 때나, 일을 구할 때나, 배가 아플 때나 똑같구나. 스트레스성 위염에 장염이라고 했다. 장염 앞에도 그럴싸한 수식어가 붙었던 것 같은데 여기에 적을 줄 알았더라면 한번 더 물어볼 걸 그랬지.

집에 돌아오는 길, 죽 전문점 앞을 지났다. 굶든지 죽을 먹으라던데... 내가 죽을 끓이기는 싫었다. 아픈데 내가 먹을 죽까지 끓이려니 처량해서가 아니라 주방에 서는 것이 싫었다. 죽을 끓여줄 사람... 엄마가 어떻게든 끓여주려고 하시겠지만 두팔 걷고 말리고 싶다. 못먹겠다고 거절하는 것도, 억지로 먹는 것도 편안한 일은 아니기에. 죽 전문점에 들어가 1인분을 주문해 거기서 먹었다. 아파트 단지 바로 앞이라선지 홀은 텅 비어있고 가끔씩 포장주문한 것을 가지러 오는 손님뿐이다. 우리집이야말로 여기서 1분 거리인데... 그래도 집에서 먹기는 싫으니까.

집에 와 드디어 약을 먹고 쉬고 있는데, 한바탕 믹서기 대소동을 벌이신 엄마가 죽을 먹으라고 방문을 두드리시는 소리에 놀라서 깼다. 엄마의 목소리가 예전처럼 고왔더라면, 내 심장이 조금은 덜 뛰었을까. 죽 먹고 왔다고, 그건 나중에 먹겠다는 말을 전하며 내가 걱정한 사람은 엄마가 아니었다. 몸이 불편한 엄마가 딸을 위해 열심히 죽을 끓였는데 먹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며 나를 괘씸해하고 엄마 대신 상처를 받으실 아빠였다.

어제 미처 먹지 못한 엄마의 죽은 노오랗다. 노오란 파프리카를 갈아 넣었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냄비 뚜껑을 열자마자 파프리카의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제 쓴 믹서기는 파프리카 찌꺼기를 사방에 묻힌 채 거기 그대로 꽂혀 있었다. 엄마, 이거 어제 쓰신 거 아니예요? 하니 아니라고, 오늘 아침 김밥을 말 때 쓴 거라고... 하신다. 대꾸할 힘도 없어 그냥 설거지통에 넣었다. 나는 왜 아직까지 엄마에게 상식을 요구하는가. 체념해야할 것을 하지 못하는 내가 불행을 자초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노랑 파프리카 죽은 달았다. 생각보다 맛이 있어 잔뜩 겁을 먹었던 것이 미안했지만, 파프리카의 날 것 그대로의 맛이 부쩍 남아 있었다. 과일도 먹지 말라던 의사의 당부가 떠올랐다. 밥은 끓이다 만 것인지, 물을 아주 적게 넣은 것인지 밥알은 살아있는데 겉만 불은 것이 오히려 리조또에 가까운 모양새다. 파프리카 간 것에 밥을 비벼 먹는 기분. 물을 더 넣고 이 죽을 살려볼까 하다가, 물을 넣으면 양이 더 많아진다는 두려움에 관두었다.

어제 식당에서 남겨온 죽이 있는데 엄마 죽을 앞에 두고는 차마 먹을 수 없다. 굶든지 죽을 먹으라고 했으니 오늘은 굶어야지. 엄마에겐 미안하지만, 저 죽을 먹었다간 더 아플 것 같아요. 아빠가 맛있게 잡수시겠지..?

KakaoTalk_20180707_175906286.jpg

Sort:  

지금은 좀 나아지셨나요.
속상하네요.
스필님이 아픈 것도, 파프리카 죽도..

예전 엄마의 맑은 목소리, 요리 솜씨, 야무지게 살림을 하시던 손에 대한 기억이 더 아프고, 속상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모든 것은, 모든 사람은 변하는 거겠죠. 가족이라면 그 변화하는 모습까지도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참 어려울 것 같아요..

봄님..ㅠ
글 속에서 느껴지는 아픔에 마음이 무거워져요
견디다 견디다 병원에 가셨군요
속을 싹 비우고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에빵님 말씀처럼요..
얼른 싹 나으시길 바라요!!

뜰님! 원래는 뽀송뽀송한 글을 쓰려고 했는데 쓰다보니 또 이렇게 ㅎㅎㅎ 얼른 나아서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기운 낼게요! 고마워요, 뜰님 :)

위염에 장염,, 고생고생하셨네요. 혼자서 죽집에서 아프고 힘없는 모습으로 앉아 있는 모습을 떠올리자니, 맘 한 켠이 아련하고 짠해옵니다. 그래도 굶지 말아야 합니다! 어떻게든 몸조리해서 얼른 백퍼센트 컨디션을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위염, 장염에 부엌의 죽 흔적을 보고 마음의 염증까지 도진 듯하네요. 때론 참 어려운 말입니다. '가족'이라는 말 말예요.
힘내세요. 봄볕처럼 떨쳐내세요!^^

아프시면 안되는데..
전 예전엔 속탈이 나면.. 그냥 계속 무시하고 먹다보면 낫곤했는데..

최근에 장기간 안 좋은 이후론.. 뭐든 조심하게 되네요..

검진 결과와 다르게 이전과 다르게 속이 간헐적으로 불편하기도 하고..

<결론은.. 건강은 건강할 때 챙기셔야합니다!!>
'노오랗' 라이언이...

침대에게 화이팅을 전합니다. 주인님 잘 보살피거라!

이 글이 또 3일전이니... 이제는 괜찮아지셨는지 모르겠네요~~
한번씩 아픈거야 어쩔 수 없지만 오래 가는 건 정말 좋지 못해욧!!!
저도 나이먹으니 언제부터인가 조금만 아파도 바로 병원을 찾게 되더라구요.ㅎㅎㅎ
얼릉 나으셔서 비도 오는데 마실 가시옵소서.. 음악들으면서 비 맞는 느낌이 참 좋답니다.

봉필(봄필이라 썼다 느낌이 안살아서....)님이 파프리카처럼 쌩쌩했는데 죽처럼.....널부러졌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그림인가요....어머님께서 만들어주신 파프리카죽....그림 보여드리면 좋아하실듯...느낌...있습니다...앞으로 자주 그리는 걸로...!! 그리고 "노오란 50알의 죽알....." 너무나 딱떨어져서...소오름...때밀힘도 없을 듯....ㅠㅠ....

아프셨군요 ㅠㅠ 주말이 되어서 조금 털고 일어났는지 모르겠네요. 속 아플땐 그냥 굶는 방법이 괜찮으니 넘 괘념치 마시고 푹 쉬세요~~ 얼른 나아서 산티아고 길 걸어야죠!!!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괜찮아지더니 이번엔 웬일인지 오래가네요. 굶거나 죽이나 먹고 있는데 살은 안빠지니 억울합니다...

그러게요. 남들은 아프고나면 반쪽이 된다하던데, 저는 아플때 기력회복해야 한다고 넘 많이 먹어서 살이 더 찌는 현상이 기이하죠. 이번 기회에 눈꼽만큼만 빼자고요! ㅎㅎㅎㅎㅎㅎㅎ(웃어도 되요?) 웃어야 힘이 나죠? 웃으면 배 아플랑가요? 아! 웃으면 주름이 깊게 집니다. ㅠㅠ

(웃어도 되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웃으면 주름이 깊게 집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메가님이닷! 잘 지내세요?~~ 중국어가 마지막인 메가님 블로그에 들락날락했다죠! ㅋ

네 ㅎㅎ 요즘엔 할말도 없고 하늘이 맑아 그냥 암생각 없이 자연을 즐기고 있어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괜찮아지더니 이번엔 웬일인지 오래가네요.>

우리 모두가 알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차마 입 밖에 꺼내고 싶지 않은 그것..

바로 <나이> 때문입니다..

혹시 마음은 괜찮으신가요... 왠지 몸이 아프셨다는 말씀을 들으니 요즘 마음이 불편하신것은 아닌지 걱정이(이만저만..)되네요... 살이 안 빠졌다는 말씀에 그래도 한시름 놓습니다...(살 빠지면 진짜 심각한 거거든요...)

마음과 몸은 연결되어 있는데... 혹시 스프링님이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 때문에 마음이 불편해지시는 건지... 정말 뻔한 말인데.. 해결하지 못 할 일이라면 걱정해도 소용이 없고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불혹을 가까이 살아오면서.. 뭐하고 살았는지 참 한심스러울 때가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나름 그 시간 속에서 얻은 교훈은 있는거 같아요..

그 중에서 저는 네가지를 가슴 속에 담고 살려고 하는데요..

  1. 절대 남의 눈치 보지 말자. (내가 아닌 모습으로 사랑 받느니 나로 미움 받는게 낫다)

  2. 걱정하지 말자.(걱정한다고 해결되는 일은 없다. 아까운 내 시간과 몸만 상한다)

  3.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지 말자. (내일 갑자기 죽을지도 모르는게 인생이다. 현재도 충실히 즐기면서 미래를 준비하는 방법도 분명 존재한다)

  4. 후회하지 말자. (지나고 나면 그때의 내가 후회되기 마련이지만 사실 매순간 그때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 당시 나도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나도 그럴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었다. 매순간 사실 우리는 나름 자신을 위한 최선의 선택을 했다.)

'말자'를 가슴 속에 담고 사시는 군요. 제 마음 속엔 '미자'가 있습니다. 껄껄ㅋ

쏠메님 와이프님 성함이 미자시군요...^^

컥. 미자~ 진짜 그렇다면 더 반전일텐데요ㅋ 전 오미자를 즐겨 마십니다.ㅎ

오미자양의 부군, 쏠메님이시군요..

잘 챙겨드시고 얼른 싹 나으시길요.🙏

아프지마세요 ㅠㅠ.. 얼른 회복하시길 ㅠ

Coin Marketplace

STEEM 0.30
TRX 0.12
JST 0.033
BTC 64093.86
ETH 3123.80
USDT 1.00
SBD 3.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