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이 되기까지 #1

in #kr-diary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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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졸업한 초등학교는 영국 교외 지역에 위치한, 카톨릭 교구에서 운영하는 곳이었다. 규모가 작아 학년당 반이 하나씩 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대부분 유치원 시절부터 서로 잘 알고 지낸 경우에 해당했다. 떠나가는 이도 드물었고, 새로 오는 이는 더더욱 드물었던 것이다. 아, 나는 카톨릭 신자였던 적이 한 번도 없다. 어쩌다 보니 그 학교로 가게 되었을 뿐이다.

졸업까지 1년을 채 남기지 않은 시점에 전학해온 나는 과한 관심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 반에서 유색인종이라고는 이란계 아이 하나, 인도계 아이 하나 밖에는 없었고, 둘 다 남자아이들이었는데, 나와 마찬가지로 그 동네에서 오래 살지 않았음은 분명했다. 그들의 적응력은 운동장에서 보이는 축구 실력에 비례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둘 다 유독 열심히 뛰는 것 같았다.

아마 나는 그들보다 더 이질적인 존재였을 것이다. 일단 당시에는 한국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고, 영문 책을 읽기에는 익숙했지만 말수는 적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좋은 쪽으로 이질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아이들은 내 머리가 검은색인지, 짙은 고동색인지에 대해 말다툼을 하곤 했다. 물론 그들 중에도 검은 머리는 충분히 흔한 것이다. 단지 검은 머리는 인종별로 톤이 조금씩 다른 경향이 있는데, 언젠가 한 번 다뤄볼 만한 주제이다.

10대 시절이 행복했다는 것은 참으로 큰 축복이다. 화목한 가정 출신이라는 전제 하에는 당연히 곱게 지켜지게 되는 자존감이라는 것은 집 밖에서, 그것도 10대 시절에 가장 심하게 꺾이게 마련이다. 갈등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피해자로서의 갈등은 아니었다.

어쨌든, 나는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10대 시절이 행복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당시에는 고민 거리를 책에서 찾아내곤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다분히 일부러 그랬던 것 같다.

어쨌든, 책을 떠난 현실은 거의 매일 즐거웠다. 그 시절을 묘사할 만한 나만의 표현을 찾아보려고 했으나, 오글거려 그만두었다. 대신에, 스무 살이 되기 이전의 이야기들을 가끔 기록해보려고 한다. 한국, 영국 및 다른 곳에서 보낸 유치원,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을 시간순에 따르지 않고 풀려는 생각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면, 종교 재단이 운영하는 곳이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초등학교의 아이들은 유독 착했다.

반 아이들 중 루이즈라는 여자애는 비록 나와 단짝은 아니었지만, 웃음 코드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나를 굉장히 좋아했다. 사실 비슷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별 생각 없이 내뱉는 말에 루이즈가 꺽꺽거리면서 잘 웃었을 뿐.

루이즈는 훗날 중고등학교에 입학한 후로 엄청나게 무서운 깡패 이미지를 갖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그녀가 그렇게 될 줄 전혀 예상치 못했었다.

루이즈는 리디아라는 애와 단짝이었는데, 내가 전학을 온 시점부터 차차 그렇게 된 경우였다.

당시에는 초등학교 동창 중 같은 반으로 가고 싶어하는 아이들끼리 이름을 써내면, 거의 반영이 되곤 했다. 그러나 루이즈와 리디아는 안타깝게도, 같은 반으로 진학하지 못했다. 그 둘이 붙어 다니는 것을 루이즈와 리디아네 부모님이 싫어했기 때문이다. 각자, 상대편의 아이가 자신의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끼친다고 믿고 있었던 듯 했다. 양가 부모님의 그러한 우려가 근거 있었던 것인지 몰라도, 결국 루이즈는 중고등학교에 진학한 후로 문제아가 된 반면, 리디아는 평범한 학생이 되었다.

어쨌든 초등학교 졸업 즈음에 그 둘이 서로 껴안고 펑펑 울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게 뇌리에 남아 있다. 내 경우는 그렇게까지 친구에 대한 애착을 표현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상당히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아, 물론 나도 중고등학교에 같은 반으로 진학한 단짝 친구 레베카가 있었지만,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자.

엄청나게 연한 나머지 투명해 보이기까지 하는 파란 눈이 루이즈의 매력이었다. 오동통한 볼살 때문에 항상 눈을 가늘게 뜬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자라면서, 그녀는 점점 전형적인 체구가 큰 여자로 변모해갔다. 중고등학교에서는 루이즈와 반이 갈리면서 더 이상 가깝게 지내지는 않았지만, 길에서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하곤 했다. 어쩌면 중고등학교에 입학한 후로, 루이즈와 안다는 사실이 큰 방어막이 되었을 수도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가령 루이즈가 중고등학교에서 사귄 친구들 중 나를 싫어하는, 루이즈보다도 훨씬 커다란 주근깨투성이 여자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대놓고 내게 시비를 걸지 못한 데에는 내가 루이즈의 친구라는 사실이 하나의 이유로 작용했을 수도.

루이즈와는 대조적으로, 리디아는 굉장한 미인이었다. 염색을 하지 않았는데도 레몬색에 가까운 머리카락을 하고 있었다. 예쁘기도 하지만 순수해보이는 얼굴이었다. 피부톤이 차분했더라면 더 예뻤을 텐데, 확연한 핑크색을 띄고 있어서 항상 어디서 헐떡이며 뛰어온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지금도 미스테리인 점은 그녀가 중고등학교에 입학한 후로 그다지 인기를 끌지도, 남자친구가 생기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꼭 시녀처럼 비위를 맞춰주는 여자아이 둘을 데리고 다녔는데, 아마 그녀의 관심사는 그 이상 나아가지 않았던 것 같다.

루이즈는 리디아와 그렇게 친해지기 전에는 다른 친구, 클로이와 단짝이었었다. 어떻게 보면 루이즈와 리디아가 갑자기 너무 죽이 잘 맞는 바람에, 클로이는 거의 버림받다시피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왕따를 시켰다거나 한 것은 아니고, 자연스레 멀어지게 된 경우였다. 클로이는 감정 표현을 좀 쑥스러워하고 말을 조용조용하게 하는, 예쁘다기보다는 세련되게 생긴 아이였는데, 꼭 펌을 한 것처럼 크게 부푼 곱슬머리를 기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성격적으로 클로이가 나와 잘 맞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웃지 않고 농담을 잘 하는 동시에 남의 농담에는 잘 웃는 편인데, 루이즈나 리디아보다 한층 더 어른스러웠던 클로이 역시 어느 정도 시니컬한 유머 코드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클로이는 일반 10대 소녀들에 비해 옷도 어른스럽게 입는 편이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크고 호탕한 루이즈나 귀엽고 애교가 많은 리디아에 비해, 클로이와는 별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나와 클로이는 중학생이 된 후로는 거의 모르는 사이처럼 되어버렸다.

사실 그녀와 내 사이가 어색해진 결정적인 이유가 있기도 했다. 클로이는 훗날 중고등학교에서 내가 사귄 폴이라는 애를 좋아했고, 잠시 사귀기도 했다고 들은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중요한 사실인데, 한 번도 확인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내가 열 셋 정도의 나이 때부터, 남자친구의 전 여자친구를 전혀 신경쓰지 않았던 성격이었다는 점에 흠칫 놀라게 된다.

루이즈와 리디아, 클로이는 그래도 일종의 삼총사였다. 그리고 나는 그들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으면서 다른 아이와 유독 가까운, 그런 포지션이었다. 원래는 한 명 더 루이즈네 그룹에 있었는데, 리사라는 애였다. 리사의 경우, 내가 전학해온 후로 서서히 루이즈네 그룹에서 적극적으로 왕따를 시킨 경우였다. 그 이유를 꼽아보자면 3분의 1 정도는 리사의 잘난 척, 3분의 1은 루이즈 그룹의 질투, 그리고 나머지 3분의 1은 리사가 급격히 살이 찌게 되면서, 평소에 그녈 아니꼬워하던 몇몇 아이들이 감정에 솔직해지기 시작했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리사는 꼭 미국 아이처럼 태운 피부에 중간톤의 금발, 파란 눈의 소유자였는데, (적어도 체중이 불어나기 전까지는) 뭐랄까 여자보다는 남자아이들에게 더 인기가 있는 아이였다. 크게 심각하진 않았지만, 리사는 아마도 나와 그나마 갈등관계 비스무리한 것을 형성한 유일한 초등학교 동창일 것이다. 물론 졸업까지는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루이즈네서 너무 박대하면, 그나마 상대를 해주는 사람이 나와 내 단짝 친구였다.

그다지 가깝지 않아서 타격감도 없을 만했던, 리사와 나의 어정쩡한 관계는 중고등학교에서 재편성이 된다. 다시 정상 체중으로 감량하고 다시 만난 그녀와 내 갈등은 다행히도(?) 남자친구 문제와는 무관했다. 그런 것을 보면, 아마도 그녀와 내 취향은 확실하게 달랐나 보다. 한 번도 다툼으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자존심을 상해하는 경우는 특이하게도 체육 시간에 주로 발생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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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이 예전에 그 동굴 스토리 주인공 아니에요?ㅎㅎㅎ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네, 아니에요. ㅋㅋㅋ

이넘의 기억력이란.ㅠ

ㅋㅋㅋ제 3자 입장에서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문제기도 하죠. 폴도 다른 글에서 언급한 적이 있고...ㅎㅎㅎ

재밌네요 ㅋㅋ

감사합니다. ㅋㅋ

재밌네요!
다음편도 기대됩니다^^

감사합니다! ㅎㅎㅎ

역시 이누님 외국에서 좀 배우신분이었어ㅋㅋㅋㅋㅋ
근데 리디아 이분... 남친 있나횰?

최근엔 연락 안해봤어요. ㅋㅋㅋ 근데 어릴 때부터 진짜 애 같고 이성에는 관심이 없더라구요. 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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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며칠 만에 와서 마나마인 필진은 제외인건가 했네요. ㅎㅎㅎ

다음 이야기도 기대할께요~ㅎㅎ

감사합니다. ㅎㅎㅎ

그냥 여자친구들 얘기인데 뭔가 다이나믹 하네요. ㅎㅎㅎ 글재주가 다르신듯

ㅋㅋ아마 학창 시절에 공부의 압박이 없었기 때문에 인간관계에 치중할 수 있어서...일 듯요. 말씀 감사합니다. ㅎㅎㅎ

꿀잼 ㅋㅋㅋㅋㅋ
중학교에 올라가도 따로 교복이 없었낭??

아, 오히려 저 초등학교가 교복이 빡셌음. 카톨릭 학교라 ㅋㅋ

중학교서도 교복 있긴 했는데 좀 느슨...하기도 했고 최대한 교복같지 않게 교복을 입는 분위기;;

고등학교로 올라가면 포르셰를 탄 딜란이 나오나요? -.-+

ㅎㅎㅎㅎㅎ 제 경우 고등학교는 또 다른데서 다녀서...분위기가 또 확 바뀌게 되죠.

엌ㅋㅋㅋ 형 영쿡이었어? ㅋㅋㅋㅋㅋ
왜 난 미쿡으로 알고있었지 ㅋㅋ
이 정보 첫공개지? 그래야 내가 덜 민망해 ㅋㅋ

여러 곳에서 살았음.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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