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끄적임] 앞 집 할머니 할아버지, 안녕히... [2018.08.01]

in #kr-diary6 years ago (edited)

이 집에 이사온 건 2009년에서 10년으로 넘어가는 한겨울이었다. 아내의 로망이었던 "마당 넓은 집"으로 이사를 오긴 했는데, 이것 저것 집과 마당에 대해 배워야 할 게 많은, 그런 초보 시절이었다. 수리가 안되어 시장에 오랫동안 나와있던 집에 어느 낯선 동양인 부부가 이사왔는데, 동네 사람들은 친절히도 대해주었다. 앞 집 할머니 할아버지 부부는 특히 더 그랬다.


[2016년 1월 24일. 눈이 40cm정도 왔을 때]

2010년 2월 7일은 미국의 슈퍼볼 44회 경기날이다. 그리고 2월 5-6일에는 메릴랜드에 기록적인 폭설이 내렸다. 대략 1m 정도는 왔을게다. 군인 시절을 떠올리며 눈삽 하나로 겨우겨우 사람다니는 길 하나 뚫어놨을 때 앞집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우리집을 방문하셨다. 손에는 작은 선물을 들고. 미국에선 이렇게 선물을 들고 새로 이사온 집을 방문하는 게 환영하는 방식이란다.

두 분은 둘 다 선생님이셨다가 은퇴 후 주거지로 80년대 초반에 이사오셨고, 우리가 이사온 집에 전에도 가끔 놀러 오셨다며 변한게 없다고 하셨다. (그 변함없는 70년대 스타일에 집이 오랫동안 안팔렸던 것...) 나에게는 길 만들어 줘서 고맙다고 하셨다. 그렇게 잠깐 얘기 후에 집으로 돌아가셨다. 슈퍼볼을 봐야 한다며...

그렇게 시간이 흘러 눈도 녹고 봄이 왔다. 날이 풀리니 할머니는 산책을, 할아버지는 조깅을 즐기시는 걸 알게 되었다. 동네에서 할머니의 별명은 미스 스마일 이었다. 호리호리한 몸으로 가볍게 사뿐사뿐 걸으며 지나가는 차와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미소를 보여주셨다. 지나가며 우리 안부를 물어보실 때도 보면 얼굴에 미소를 따라 주름이 져 밝고 친근한 모습이셨다. 할아버지는 큰 키와 그에 걸맞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참 부지런히도 조깅을 하셨다. 그렇게 하루 하루가 지나갔다. 그동안 우리 집은 어른 2명 가족에서 4인 가족으로 사람이 늘었다.

몇 년이 지났을까. 어느 날 부턴가 할머니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이리 좋은 날이면 산책 다니실만도 한데, 어쩐지 너무 조용했다. 어쩌면 우리가 인지하기 훨씬 전부터 부재중이었을지도... 그렇게 우리는 우리만을 생각하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을 때, 어느 날 산책다니는 다른 할머니에게 앞 집 할머니 소식을 들었다. 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렇게 아무런 전조도 없이 미스 스마일은 떠나가셨다.

이후 할아버지의 조깅은 돌아왔다. 한동안 할아버지의 조깅은 계속되었는데, 다른 점이 있다면 뛰는 모습에서 긴 팔과 다리가 왠지 덜커덩 거리는 느낌이 난다는 것이었다. 어느 늦가을 낙엽을 치우다가 우리는 길 가에 떨어진 휴대폰을 하나 주웠다. 적힌 이름을 보니 앞 집 할아버지 거 였다. 그 전화기를 전해드리러 앞 집에 가서 노크를 했다. 할아버지께서는, 그동안 잃어버린 것도 몰랐다며 고맙다고 하셨다. 할아버지 등 뒤로 집은 너무 적막했고, 할아버지의 표정은 공허했다. 어쩐지 그렇게 느껴졌다.

그리곤 다음해 봄 부턴 할아버지의 조깅도 볼 수가 없었다. 한동안 앞 집에는 세워진 차가 아무것도 없었다.


엊그제 일하는데 아내에게서 문자가 왔다.
"앞 집에 화환 들어가. 돌아가셨나봐"

이 집에 이사온 지 9년 하고 반 정도가 지났다. 근 10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우리 집은 애가 여럿 늘었고, 왼쪽 오른쪽 그리고 앞 왼쪽 집은 모두 주인이 바뀌었다. 조만간 앞 오른쪽 집 주인도 바뀔 것 같다.

앞 집 할머니의 미소와 할아버지의 조깅하는 모습을 이제 더이상 못 볼 것 같다. 하지만 혹시 모른다는 희망도 사실 약간은 있다. 장례식에 초대받거나 한 건 아니어서 확인한 바는 없으므로. 혹시 진짜 돌아가셨고, 장례식도 치뤄졌다면... 아쉽다. 마지막 가시는 길에 예의 정도는 표하고 싶었는데. 환대해주셔서 고맙웠다는 말 정도는 드리고 싶었는데... 하긴.. 나는 내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가시는 길도 같이 못했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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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사람 사는 동네의 맛 아닌가 싶어요.. 닭장 같은 아파트가 아니라.. 마을에서 사는 사람들 말이죠...

저희도 이제 하나둘 집들이 채워져 가는데.. 아직 인사 못 드린 집이 많네요.
가을에는 (지금은 너무 더워서.. 암것도 못 하겠다는..) 골목 잔치라도 해야 할까봐요. :)

저희도 여기서 오래 오래 살고 싶은데.....

물리적 거리가 너무 가깝지 않아서 정서적으로 가까울 수 있는걸까요... 오래오래 살건데 천천히 알아가면 되죠~

아... 할아버지 핸폰은 응급용으로만 사용하셨나보네요. T^T
갑자기 영화 UP이 생각났습니다. 슬프다....

앞집 할아버지도 그 할아버지처럼 마지막엔 즐거운 일 하고싶었던 일 해보고 가신거였으면 좋겠습니다

참... 글을 읽으면서 담담하지만 슬픈감정이 드네요..
한국과 다른 문화 차이일까요?
잠깐이지만 미국에서 살아봤지만 이런 경우는 못겪어봐서 문화차이인지 단정지을수는 없지만...
한국에서는 누가 돌아가시면 부조를 바라는 거건 같이 고인의 명복을 빌어 달라는 명목이건간에 가깝지 않은 지인들에게도 연락 돌리는데, 이웃사촌이라는 말도 있는데 미국에서는 왕래가 없는 집이었으면 모를까 인사도 하고 하는 사이라면 소식 전해주실수도 있었을텐데... 소식듣고 가시는 길 배웅이라도 했더라면 왠지 이 글이 이렇게 슬프게 와닿진 않았을것 같네요...
안타까운 소식 듣게 되어 안타깝습니다.
낯선 곳에서 받는 환대가 많은 힘이 되었을텐데...

두 분만 사셔서 아마 다른 가족들은 여기 이웃들을 신경 못썼을 것 같아요. 병원이나 다른 지역 요양원에서 가셨다면 더더욱 그러겠죠.
마음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렇겠네요... 그래서 미국이나 캐나다의 노부부들이 홈스테이를 제공하는경우가 많은 것같기도 하네요. 저도 캐나다 있을적에 홈스테이 했었는데 자식들은 거의 찾아오는 경우는 못봤고 두분이서 계시는게 조금 안쓰럽게 보였네요..
멀리서 댓글 로나마 위로의 말 전해드립니다.

좋은 이웃의 죽음이 먼친척의 부음보다 어쩔땐 더 가슴이 아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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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아무래도 Out of sight, out of mind라는 격언이 딱 이경우겠죠.. (맞죠? 아..아닌가? ^^;)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 주신 분들이네요.
마지막 사진이 이쁜데 포스팅 다 보고 나서 그런지 쓸쓸해집니다.

제가 올린 글과 사진을 제대로 음미해주신 것 같아 고맙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오.. 김광석 형님 소환인가요 ^^

오 눈치 채셨군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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