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끄적임] 내 기억 속의 시詩를 찾아서 [2018.04.28]

in #kr-diary6 years ago (edited)

[이 일기는 [제1회] PEN클럽 공모전에 출품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요새 문득 문득 떠오르는 시詩가 하나 있다.
내용은
어떤 할아버지가 그의 삶을 회고해보니
그동안 인생에 수많은 폭풍우를 맞이하며 힘들었는데
나중에 돌아보니 결국 그 길이 그에게 있어 최선의 길이었음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소설은 조금 읽었지만 솔직히 시詩와는 친하지 않다.
저 시詩가 들어있던 시詩집도 선물받은 거였다.
군대에 있었을 때. 누나이자 후배인 미묘한 관계의 여인으로부터.

어차피 내 기억만으론 한계가 있다.
생각난 김에 한 번 찾아보기로 했다.
일단 어렴풋이 생각나는 책의 제목은
"지금 아는 것을 그때도 알았다면"
뭐 이런 비슷한 거였다.
내가 물으니 구글신은 답하셨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류시화"

인터넷 교보분고엔 이 책의 목차가 올라와 있음을 알아내었다.
OK. 이제 고지가 바로 저 앞이다. ㅎㅎ
목차에는 총 5개의 큰 무리가 있고, 각 무리에는 십여개의 시詩가 실려있었다.
그리고 내 기억 속에 내가 찾는 그 시는 책의 앞부분에 있었다.

세상 참 편리하다.
제목을 검색하면 누군가가 올린 그 시詩를 바로 볼 수 있다.
"행복해진다는 것" 이건가? 제목부터가 좀 아닌 것 같은데.
"어느 17세기 수녀의 기도" 이건 딱 봐도 아니고.
"내 인생의 신조" 이건가? 아니네.
"만일", "두 사람", "잠시 후면", "젊은 수도자에게", "무엇이 성공인가", "도둑에게서 배울 점" 모두 패스.
그럼 2번째 무리에 있을까?
"그런 길은 없다" 느낌이 좀 오는데? 그런데 아니네.
"75세 노인이 쓴 산상수훈" 오~ 노인이란 공통점. 하지만 아니네.
"난 부탁했다", "여행", "자연주의자의 충고", "내가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셨을 때", "잠 못 이루는 사람들" 패스.
"나는 세상을 바라본다" 이건가봐! 그러나 또 아니었다.
"무덤들 사이를 거닐며" 이것도 아니고, "인생의 황금률" 이것도 아니고...

책의 초반이 아니었을까?
3번째, 4번째, 마지막 5번째 무리까지 나아갔다.
몇 가지 그럴듯한 제목이 역시 허탕으로 돌아온 후 마지막 무리에서 비슷한 시詩를 찾아냈다.

다른 길은 없다 -마르타 스목
(중략)
그러므로 기억하라.
그 외의 다른 길은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을
자기가 지나온 그 길이
자신에게는 유일한 길이었음을
(후략)

비슷하다. 그런데 아닌 것 같다.
이 시詩에는 뱃사람, 할아버지, 폭풍우의 이미지가 없다.
아닌가? 내 기억이 잘못된 것일까?


1999년 초여름.
난 일병이었고, GOP에서 철수 후 페바 생활에 적응해가던 시기였다.
어쩌면 이 시詩집이 든 소포는 훨씬 전에 받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실히 기억나는 이미지는,
햇살 뜨거운 날, 소대의 매트리스를 말리기 위해 뒤 뜰에 잔뜩 쌓아놨었고,
그 아래, 덥지만 아늑하고 비밀스런 공간에서 저 시詩집을 읽고 있었다.
처음엔 'J는 왜 이런 책을 보냈을까' 하는 의구심도 있었지만,
읽다보니 확실히 이 시詩집의 내용은 나의 현 상황을 합리화시켜줄 훌륭한 (마약같은) 도구였다.
'왜 내가 최전방 말단 보병으로 이 고생을 하고 있을까?'
'그래 지금 내가 가는 길이 내 인생에 꼭 필요한 길이어서 그럴꺼야'


2018년 봄.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게, 역시 '현 상황을 합리화시켜줄 훌륭한 (마약같은) 도구'일까?
그래서 이 시詩가 문득 문득 떠오르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아니 그런 것 같다.
6개월 뒤 내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 지 모른다는 불안감.
한 때는 나름 엘리트의 길을 간다 자부했었는데, 어느새 많이 뒤쳐진 것 같다는 불안감.
이런 불안감을 중화시켜줄 명분. 변명. 합리화.


내 기억은 불완전하다.
어쩌면 내 기억 속의 시詩는 여러 시詩와 이미지가 혼합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그 시詩는 어찌되든 상관없다.
나는 그저 불안함을 잠재울 희망과 확신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내 미래를 볼 수 없다.
나는 어떤 길로 가야할까.

나는 내 바로 앞도 볼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루 하루,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 뿐이다.
불안하든, 확신하든, 할 수 있는 건 이것 뿐이다.
라고 되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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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thewriter님이 dj-on-steem님을 멘션하셨습니당.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연결되용~ ^^
kimthewriter님의 [접수] 제1회 PEN클럽 공모전

...
  • 두번의 이사하는 날 / mimistar
  • 내 기억 속의 시詩를 찾아서 / dj-on-steem/li>
  • 머리하던 날 / perspector
  • 유통기한이 지난 차를 마시면서: 일기에...

    zzing님이 dj-on-steem님을 멘션하셨습니당.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연결되용~ ^^
    zzing님의 1등 발표의 순간이네요^^

    ...cowboybebop
    song1
    mipha
    choim
    stylegold
    ioioioioi
    epitt925
    dj-on-steemsonga0906
    hersnz
    soohyeongk
    jaeseokyu
    dorian-lee
    dmgpol09
    f...

    오, 이 길이 유일한 길이었죠. 맞아요. 그래요. 내 선택을 나는 사랑해요.

    자신의 선택에 대한 자부심!
    다른 길에 미련을 두지 않는, 강철 멘탈이신 것 같습니다 ㅎㅎ

    저도 어느 길이 맞는지 고민될 때가 많아요. 그래서 사주를 보러 간 적도 있는데 ㅋ 사실 제 삶이니 누가 방향을 알려주는 것도 이상하고, 결국 사주 보고 와서도 제가 하고 싶은대로 하게되더라구요.
    dj님도 어떤 방향으로 가시던 그 방향에서 또 좋은 일들이 생기실꺼예요!

    "내가 가는 모든 길이 좋은 길"인가요 :)
    참맑음님이 가시는 길에도 좋은 일 가득하길 바랍니다. (땡볕으로 가진 마시구요 ㅎㅎ)

    zorba님이 dj-on-steem님을 멘션하셨습니당.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연결되용~ ^^
    zorba님의 [2018/4/29] 가장 빠른 해외 소식! 해외 스티미언 소모임 회원들의 글을 소개해 드립니다.

    ...enerva 뉴욕 dj-on-steem/td> DC 근교 hello-sunshine DC

    zorba님이 dj-on-steem님을 멘션하셨습니당.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연결되용~ ^^
    zorba님의 [2018/4/30] 가장 빠른 해외 소식! 해외 스티미언 소모임 회원들의 글을 소개해 드립니다.

    ...enerva 뉴욕 dj-on-steem/td> DC 근교 hello-sunshine DC

    자신앞에 놓여있는 길을 차근히 가다가 뒤돌아 보면,
    아 맞다! 내가 잘 지나 왔네 라고 할 겁니다.
    그렇다고 지금 가는 길이 옳바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으니...

    일기 투어 중에 들렸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글에서 나는 치약 냄새는 어떤 의미일까요? ^^;;)

    다른 일기에 단 댓글이 왜 여기에.ㅠㅠ

    그렇지요. 계속 가야겠지요. 안 간다고 뭐 해결되는 것도 아니니까요. 산다는 게 다 그런거니까요. 불안한 것도 마음의 문제이고 마음고쳐먹는 것은 사실 어려운게 아닌데 그게 실상 제일 어렵지요. 그러니까 마음고쳐먹는 연습을 계속 해야지요. 항상 평정한 마음을 잡도록요. 그리고 뚜벅 뿌벅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 뿐이지요.

    네 마음을 다스리는게 제일 어렵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어떻게 보면 번뇌하는 모습 자체가 인간이 살아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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