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티나는 인간

in #kr-diary6 years ago (edited)

일전에 우리 둘째를 예뻐하는 80대 할아버지가 있다고 쓴 적이 있다. 놀이터에서 우리 둘째를 보면 이뻐해 주시는...

사흘 전에 모르는 번호로 연락이 왔길래 받아보니 그 할아버지였다. 나에게 번호를 달라한 적이 있는데 그때 나는 그 할아버지의 번호를 받지 않아서 누군지도 모르고 조심스레 여보세요~ 하니 놀랍게도 그분이었다.

운전 중이라 나중에 연락 드릴께요... 하고 끊고는, 그때 한국 가신다 했는데 아직 안가셨나? 커피 사주실라나? 아님 밥 사주실려나? 갖은 김칫국을 마시며 즐겁게 둘째를 데리고 집으로 가서 다시 전화를 드렸다.

몇가지 인사치례가 오간 후 미적대는 할아버지...

'대화에서 용건을 뺀 나머지말을 다 하고 난뒤 난처해했다.’
김애란, [풍경의 쓸모] 中

지금 어디냐는 말에, 나는 그다음 나올 말에 대한 나의 받아들임의 시간을 벌기 위해, 둘째 데리러 학교에 와 있고 첫째 마칠 때까지 기다려서 첫째까지 데리고 집으로 갈 거라는 거짓말을 했다.

할아버지의 용건은 이러했다. 아들 놈이 용돈을 보내주기로 한 날이 훨씬 지났는데 미안하지만 이틀 후엔 확실히 보내주기로 했으니까 몇 만페소만 빌려달라고 했다. 만페소가 20만원 정도 되는 돈인데 몇만페소라면 2만페소인가 3만 페소인가...ㅠㅠ

순간 너무 당황스러워 나는 전화를 끊어버리고 말았다. 어떡해 어떡해... 나중에 할아버지께는 밧데리가 다되서 그랬다고 하면 될 일이고... 급하게 신랑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신랑은, 할아버지가 힘드신가보구나... 하며 한숨을 쉬더니, 그래도 오죽 하셨으면 이제까지 그 점잖으시던 분이 그런 부탁을 하셨겠냐고, 니가 생각할 때 그동안 우리 애들 예뻐해 주시고 너한테 잘한만큼, 딱 그만큼, 용돈 드린다 여길 액수만큼 드리고 그냥 까먹으란다. 그런 부탁 안하시면 좋겠지만 이미 한 부탁인데 못빌려준다 하면 앞으로 어떻게 보겠냐고 불편해서...

하나같이 맞는 말이었다. 순간적으로 짜증이 확 밀려왔지만, 일단은 전화가 끊겨 황망해 하고 계실 할아버지를 떠올리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할아버지... 죄송해요 밧데리가 다되서 끊겨 버렸어요. 이제야 켜져서 전화드려요... 제가 신랑한테 용돈을 받아써서 많이는 못빌려드릴거 같아요. 지금 제가 만페소 정도는 여유가 되는데... 이거라도 빌려드릴까요?

그게 어디냐며, 이틀 후엔 꼭 돌려줄테니 빌려달라고 했다. 스타벅스에서 만나자는데 도저히 얼굴을 뵐 수가 없을거 같아, 지금 둘째 밥을 먹여야 해서 일하는 아이를 보내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고 돈을 보내드렸다.

마음이 시끄러웠다. 아무리 애들 이뻐하고 나를 좋아해 주셨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나한테 돈을 빌려달라는 부탁을 할 수가 있을까 라는 생각부터 시작해서, 그래... 오죽했으면 나한테 그런 부탁을 하셨을까 하는 생각까지... 며칠동안 지나다니며 마주칠까봐 조마조마했다.

내가 두려운 것은, 돈을 갚아야 하는 할아버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아버린 한 인간의 민낯을 기억하는 일이었다.

약속한 날이 하루가 지난 오늘 그 할아버지에게서 또 전화가 왔는데 아직 돈이 안들어와서 돈을 못 갚을거 같다고, 다음주에는 꼭 갚을 수 있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천천히 주셔도 되니 괘념치 마시라고 했다.

앞으로 전화가 오면 받지 않을 생각이다.

나중에 돈을 돌려주실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아이들을 이뻐하시는 그 순수함이 깃들었던 그분과의 관계에, 채무관계가 끼어들었다는 사실이 불쾌했다. 그리고 그럴 필요까지 없는, 내 마음 속에 일었던 연민의 감정에 당황스러웠다. 인사를 하거나 하지는 않았으나, 몇 번 마주친 적 있는, 그 분 아들의 얼굴을 기억해 내고, 그들의 사사로운 가정사에 대해 궁금한 마음을 가졌던 그 ‘잠시’의 기억이 찝찝했다.

나의 베프가 매일 농담삼아 You look so rich 라고 이야기 하곤 한다. 그게 사실인가보다ㅋ 뭐 빈티 나는거 보다는 부티 나는게 좋겠지. 긍정의 힘으로 이 찝찝하고 당황스런 기분을 이겨내 보자. 그날 이후 나를 ‘부티 누나’라고 부르는 신랑에게 전화를 했다.

나: 오늘 일찍 와 나랑 맥주 한잔 하게...
신랑: 오~ 부티누나가 맥주로 되겠어? 와인을 마셔야지?
나: 아 그럼 와인 사오든지...
신랑: 안돼 손님 와있어서...

맨날 이런 식이다ㅜ 근데 사진은 분명히 바로 찍었는데 왜 다들 누워 있는 것일까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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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친한 친구사이에도 돈 문제가 끼이면 불편해지는 데... 정말 불편하셨겠어요..
정말 남편분의 대답이 정답인데..ㅎㅎ 짜증이 몰려오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인듯.ㅎ
아이가 받은 사랑. 그 사랑에 보답하는 선물 하셨다고 생각하시구.. 좋게 생각하시길~~ 저번 글에 이어 또 레드썬!을 외치게 되네요.ㅋㅋㅋ
좋은 일 하셨으니 언젠가 누구에게라도 보답을 받으실 거에요!!

네 저도 그리 생각하고 있어요. 어제 미안하다 전화 하신걸로 봐서는 늦게라도 돌려주실 듯 해요. 근데 자주 그러실거 같아서ㅜㅜ 그게 두려워요ㅜㅜ

아...읽는데 제가 다 당황스러워요
하필 그 할아버지는 왜 그런 부탁을...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동안의 친절과 호의도 의심이 가려고 하네요
앞으로 전화가 오면 북키퍼님 생각처럼 받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아마 좋은 일들은...기억은 이전 만남까지였나봐요...

ㅠㅠ 모든 친절에는 값이 있나봐요. 아 정말 너무 당황스러워요...

'친절에도 값이 있다'는 말이 넘 슬프게 다가오는...ㅠㅠ

복잡한 마음을 훤히 보여주셔서 소설 읽는 것 같았어요. 저는 낯선 전화 혹은 오랫동안 연락 없던 이가 갑자기 전화로 연락해오면 왜인지 모르게 꺼려져요. 그 전화를 받기까지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려요. 그럴때면 뭔가 난처한 상황이 생길 것 같은 섣부른 생각을 왜이렇게 자주 하는지 모르겠어요. 북키퍼님같은 상황... 정말 난처한 상황이네요 ㅠ

글을 쓸까말까 고민했어요. 뭐 돈 20만원 가지고 저러나 할까봐ㅠㅠ 그런데 돈이 아니라 그 다른 무언가를 건드리는거 같아서 힘들었거든요. 공감해 주시고 답글 주셔 감사해요..

제가 다 불쾌하고 찜찜하네요....
맥주든 와인이든 들이키고 불편한 마음 날려버리시길.....흐윽...

지금 맥주중 ㅋ 불쾌하고 찝찝한 이마음,,,, 알아주셔 감사해요 야야님 ㅠ

알것 같아요. 그게 어떤 마음인지...
페소면 북키퍼님 필리핀이신거죠?

맥주한잔 하고 안좋은 마음 날려버리자구요~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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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필리핀요 ㅎㅎ 감사해요 이해해 주셔셔. 건배~~!

그돈 있어도 살고 없어도 살지만 좋은 감정을 가지고 계셨던 분이 갑자기 그러셔서 많이 당황하셨겠어요~ 요즘 사회가 그렇다보니 괜히 그동안의 호의도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 되네요...
시원한 맥주한잔 하시고 훌훌 털어버리세요~^^

그돈 있어도 살고, 없어도 살고... 그말이 와닿네요.. 돈이 문제가 아니네요. 참 복잡합니다....

참 찜찜하면서도, 할아버지께 죄송스럽고, 여러모로 복잡한 감정이 느껴집니다. 정말 난처하네요..

정말 난처한 상황이예요. 저는 그저 잊으려고 노력 중입니다.

맥주는 하나만 드세요... 종류별로...
더는 불편해지지 말아야 할텐데요...

종류별로 다 마시면 돌아가셨을뻔 ㅎㅎ

살면서 나도 한 번쯤 그렇게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게 꼭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더라도요. 그저 이웃에 불과했던 이에게 민낯을 드러내고 곤란한 요청을 하게 되는... 그런데 저도 참 나쁜 게, 북키퍼님의 번호를 받아갔다는 대목에서부터 아들이 어쩌고는 다 거짓말이고 그저 계획된 일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구요. 세상이 사람을 못 믿게 하는 건지 그저 제가 사람을 못 믿는 건지 모르겠네요.

그냥 자상하고 좋으신 할아버지였는데 이번일로 인해서 저도 좀 그래요ㅜ

저 같아도 당황스러웠을 것 같아요. 좋은 관계일수록 더더욱 돈거래는 소액이라도 안하는게 좋은것같아요..;;저도 큰돈은 아니었지만, 돈에 대한 태도 때문에 감정이 틀어진적이 있어서..

흠... 그만한 관계라면 어느정도 받아 들이겠는데.. 훅 들어와서 벌어진 일이라 당황 스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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