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 - 48, post# 14
웨더스비 교수 씀
현재 다루어지고 있는 내용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담에서 이루어진 한반도 문제에 대한 논의 과정입니다. 그 당시 이미 소련은 북한에서 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준비를 다 하고 있었으며 실행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최근 다루는 글에서는 한반도에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은 미국무장관인 번즈였으며.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는 번주의 주장을 몰로토프가 역으로 이용하여 미소 공동위원회를 만들어 한반도에 단일 정부가 수립될 수 없도록 여건을 만들어 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연합국 외무장관회의에서 한국문제에 대한 토의가 시작되었을때,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가 영리하게 미국무장관 번즈로 하여금 먼저 자신의 안을 보이도록 한 것을 보았다. 미국의 비현실적인 제안을 확인한 소련 대표단들은 역제안을 제시했다. 소련의 계획은 미국의 방안을 이용하여 소련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한국의 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방안을 만드는 것이었다.
몰로토프가 제출한 제안은 “산업, 수송 그리고 농업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임시정부의 수립을 요구했다. 이러한 방안은 논의의 초기에 미국이 제시한 경제적 문제에 대한 관심에 대한 응답이었다. 동시에 이 방안은 정부의 수립이 이런 실제적인 문제의 해결을 지향해야한다는 것을 규정함으로써 소련의 이익을 보호했다. 번즈의 단일 행정기구의 제안과 신탁통치를 위한 모호한 미국의 구상을 합쳐서, 몰로토프는 이러한 임시정부를 수립 함에 있어서, 한국이 소련과 미국 사령부의 대표들로 구성된 공동위원회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공동위원회 위원들이 임시정부에 대한 권고를 각각의 정부에 제출하기 전에, 그들은 한국의 “민주적 정당과 사회조직들”과 협의를 할 수 있었으며, 이 구절은 모스크바의 전략의 핵심이었다.
미국무장관은 몰로토프의 제안에 공동위원회의 권고안들은 4개국들은, 소련이 제안한 것 처럼, 5년간 지속되는 신탁통치를 구성할 4개국에 제출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만으로 응답했다. 번즈는 사생각없이 공동위원회의 구성을 수용했다. 소련이 미국과 동일한 숫자의 투표권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은 소련에 적대적일 수 있는 인사들이 포함될 수 있는 “민주적 정당과 사회조직들”의 어떠한 정의에도 비토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조지 케난이 예측한 것처럼, 번즈는“합의의 증진을 위해” 소련의 초안을 거의 수정없이 수용했다.
아주 살짝 수정된 소련의 제안은 12월 27일 발표된 회담의 코뮤니케에 삽입되었다. 이 합의는 모스크바가 미국과 협조를 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전체 한국에 “비우호적”인 정부의 수립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제공했으며, 모스크회담의 합의는 소련정부의 전기간동안 경건하게 읖조려진 성스러운 문서의 지위를 획득했다.
그러나 모스크바 회담의 합의가 소련의 이익을 보호하기 전에, 슈티코프 장군은 서울의 공산당 지도자를 설득하여 신탁통치를 지지토록 했다. 그들이 이러한 임무를 어떻게 수행했는지에 대한 문서기록은 가용하지 않으나, 여러자료에 따르면 공산당 지도자 박헌영은 12월 28일 소련구역을 여행하고 1월 2일 서울에 돌아왔으며 당이 모스크바 합의를 지원하도록 설득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슈티코프의 부하들은 또한 자신들의 지역에서 합의에 대한 반대를 표현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들이 공동선언문을 언론에 발표했을때 모욕적인 용어인 “신탁통치” 대신 “보호통치(guardinaship)”로 대체했다. 그들은 또한 “최대 5년간의 기간동안 4개국은 한국신탁통치에 관한 합의를 발전시킨다”라는 주의 규정을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4개보호국에게 제출될 수 있다”는 간단한 문장으로 바꾸었다. 이런 세심한 조치들은 이미 현지에서 작동하고 있던 통치기구와 비공산주의 정치활동가들의 남한으로의 탈출과 합쳐져서 소비에트 구역에서 대중의 반발을 잠재우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미국지역에서는 공동선언문에 관한 뉴스가 즉각 열정적인 반대를 초래했다. 분노한 대중들은 거리를 매웠으며 가게는 문을 닫았고 미국인들은 집안에 머물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어떻게 소련이 남한에서 합의의 반대를 이용하여 믿을 수 있는 친모스크바의 인물들로 구성되지 않는 어떠한 임시정부도 수립될 수 없게 했는가를 살펴보겠다.
[참고자료]
Robert Byrnes, Memoir; Hak S. Paik, “North Korean State Formation, 1945-1950”;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45, Volume VIII; Richard Lauterbach, Danger from the E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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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tstanding......as always...and thnks. for your support
하지만 미국진영에서 활동하던 박헌영은 찬탁으로 바꾸는바람에 타격을 많이 입었죠....
잘 보았습니다.
앞부분 간력히 정리를 해주니
한결 이해가 쉽네요.
본문도 제법 달라진 거 같아요.
밀실 야합의 정치가 어서 사라져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