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는 태풍 뉴스에, 눈은 책에

in Korea • 한국 • KR • KO6 years ago (edited)



  1. 매일 조금씩 진전을 보이고는 있지만 큰그림 안에서는 아직 아가 발걸음 같은 진도였다. 모든 점들이 서로를 이으며 뻗어나가는 지금까지까지 오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리라 믿지만, 적확한 설명을 찾지 못해 붕 떠버린 느낌을 갖고 있다. 나의 공부는 그렇다. 매일 하긴 하는데 손에 잡히지 않는 다이어트 같은 애석한 느낌. 그 애매한 기분을 떠안고 어떻게든 기록으로 남기고, 녹음하고 적고 외우고를 반복한다. 그러다보면 동굴 밖을 나가면서 서서히 시야가 밝아지듯이 (다행히도) 어느 정도는 선명해지는 부분이 있다.

  2. 며칠 전에 친구들과 집에 모여 오랜만에 브루마블(모두의 마블)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게음을 거의 한 시간 넘게 하며 마시고 이야기했는데(결국엔) 내가 이겼고, 게임 도중 들었던 생각들이 여운이 길어 나중에 적어두었다. 아무튼 이긴 것은 처음! 손에 가득 들려진 게임머니(종이지폐)를 보며 이게 정말 다 진짜 돈이라면 얼마나 좋겠나! 하는 부질없는 생각까지 전부 적어두었다.

  3. 브루마블은 주사위를 던지며 상대와 각각 주어진 땅을 사고 위에 건물을 지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통행료를 받고, 상대가 파산에 이르기까지 하는 게임이다. 전세계 여러 도시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는데, ‘서양’ 도시들은 땅값이 50,60만을 넘어가는 반면 동양쪽 도시들은 그의 1/10도 되지 않는다. 서양은 문명화된 자유로운 곳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스며들어 땅값이 비싸며 통행료 또한 백만이 넘는건가. 주사위를 잘못 굴려 한 번만 지나가더라도 파산을 해야하는 지경에 이르는 무서운 런던, 파리, 뉴욕. 대부분 서양, 유럽권의 도시들. 이에 반해 동양은 문명화되지 않고 후진적인 곳(이라는 이데올로기와 이어져)이라 가장 비싼 빌딩을 지어도 30만 넘게 받지 못하는 거고? 애초부터 중동아시아 쪽은 아무도 원하지 않는 카드가 되기에, 게임 도중 모두의 눈은 서양권에 쏠려있다. 게임 배경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지배문화가 흥미로웠다. 어쨌든 이긴 건 이긴거라 그 날 설겆이 면제권을 획득함에 즐거웠지만.

  4. 수전 손택의 글을 인용할 일이 있어 전자책과 가지고 있는 종이책을 모두 끄집어 내어 영어와 불어 원서 혼란의 도가니가 벌어진 책상. 바빠서 그 채로 며칠을 치우지 못한 비운의 장소를 오늘에서야 말끔하게 정리했다. 집청소에는 노동요가 적격이지. 요새 즐겨 듣는 안예은의 능소화(trumpet creeper)을 틀어놓고 치워도 치워도 떨어져있는 머리카락을 줍고, 설겆이를 끝내고 책을 정리했다. 해가 일백 번을 고꾸라지고 달이 일백 번을 떠오르는데 무인동방 홀로 어둠인 절절한 슬픔에 힘이 저절로 들어가는 걸레질이다.

  5. 미니멀한 삶을 추구한다고 말은 하지만 살다보면 딱히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 중 책이 가장 처치 곤란인데, 팔거나 주려고 정리해 놓은 책만 발치에 쌓여간다. 작년에 한 번 크게 정리를 했는데도 다시 추려보니 총 13권이다. 파리에서 북 콜렉터가 될 것도 아닌데, 미련없이 버리자 싶다. 마지막으로 다시 읽고 건네려고 매일 쌓인 책의 표지들을 눈으로 빠르게 훑는다. 이번 주말에는 기필코 읽어내리라. 하지만 주말은 그동안 챙기지 못한 몸과 마음을 주섬주섬 껴안느라, 사소하면서도 자잘한 집안일, 빨래, 장보기, 대인관계 유지, 시험 준비 등을 시간을 쪼개 하느라 눈 깜박 할 새에 지나갈 것이다.

  6. 미국 내 인종의 사회적 구성에 관한 공부를 매일 조금씩 하고 있다. 미래대비, 어떻게 보면 노후 대책의 일종인 공부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싶어서. 사지도 못할 테슬라 주식에 흘끔 눈을 두고, 투표하지도 못할 11월 대선 관련 기사를 찾아보곤 한다. 그 때쯤 나는 쏟아지는 뉴스들을 얼마나 깊게 소화해 낼 수 있을 것인가. 언어공부는 끝이 없다지만 정말 너무나도 가혹하다. GRE 다시 하라면 정말 울거다. (울면서도 하겠지만)

  7. Passive 수동태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무엇 무엇한 상태가 되어진’, 또는 주어가 ‘어떤 일을 당한다’는 의미다. 나는 그동안 파리에서의 삶을 Active 한 위치에서 주도적으로 이끌어왔는가, 아니면 수동적인 상태로 끌려져 왔는가를 따져보니 조금 후회스러운 점이 많은 거다. 그렇게 학생들에게는 수동태 앞에 붙이는 might, should, could 등을 강조하면서도 나는 내 주말조차 되어지는 상태에 몸을 맡긴다. 흘러가는 시간에 맡기고, 차오르는 우울함에, 불안함에 등등. 그러다 저녁에 아이스크림 한 스푼에 기분이 좋아져 또 신나하고, 아침엔 속 쓰려 하고.

  8. 현재 지내는 밑 층의 집에서 아침 저녁으로 아이폰 알람 소리가 크게 들리는데 대체 이유를 알 수 없고 여간 거슬리는게 아니라 하루는 메모를 정성스럽게 적어 (당신의 이웃으로서, 한두 번도 아닌 몇달 간 몇 시간째 울리는 알람소리로 피해를 받는 주민들을 생각해 주시어... 구구절절) 문 밑에 밀어 넣어두고 올라왔다. 기분상하지 마시라고 최대한 예의를 지켜 글을 썼지만 조금은 억울. 내가 왜 눈치를 봐야하는가. 아침 8시면 어김없이 정말 10번은 울리고 (울리면 한 2분정도 후에 끄고 이걸 반복) 저녁 12시쯤 (대체 왜?) 에도 울린다. 미칠 지경이다. 다른 층간소음은 없어 다행이나 이 소리만큼은 이상하게도 또렷히 잘 들리니 참... 아, 메모를 넣어두고 난 바로 다음날은 알람 소리가 울리자마자 바로 끄더라. 상식은 통하는 사람인가 싶었지만 며칠 못가 다시 원상태.

  9. 인풋을 늘려야 아웃풋이 나오는 간단한 원리를 적극 실천하는 이번 주, 학생들이 개학을 하는 시기와 맞물려 덩달아 마음이 조급해졌기에 공부에 속도를 가한다. 내일 어떻게 될 지 모르니 오늘 하루 열심히 산다는 마음으로. 태풍에 큰 피해는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귀는 태풍 뉴스에, 눈은 책에.

08.27.2020

Sort:  

인풋을 늘려야 아웃풋이 나오는 간단한 원리

이 원리를 요즘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6 years ago 

아웃풋만큼 중요한 부분이 인풋인것 같아요. 그러나 아웃풋이 되는 과정 또한 고통이네요. ㅎㅎ

해가 일백 번을 고꾸라지고 달이 일백 번을 떠오르는데 무인동방 홀로 어둠인 절절한 슬픔에 힘이 저절로 들어가는 걸레질이다.

이 표현 멋지네요!

그냥 일상을, 생각을 적으신 걸 텐데도 빠져들어서 즐겁게 읽었습니다.^^

 6 years ago 

능소화 노래의 절절한 가사입니다. 들으며 아주 힘차게 걸레질을 한 부분을 적었답니다. ㅎㅎ 즐겁게 읽어주셨다니 힘이 되네요. 감사합니다.

아아 가사였군요 그게 ㅎㅎㅎ

Coin Marketplace

STEEM 0.04
TRX 0.32
JST 0.075
BTC 64269.83
ETH 1681.21
USDT 1.00
SBD 0.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