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단상들
(그동안 단편적으로 썼던 글을 모아봤습니다.)
- 확신에 차서 말하는 것과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
어떤 ‘주장’을 할 때, 확신에 차서 말하는 것과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 사이에, 큰 의미 차이를 두는 이들이 꽤 많다. 확신에 차서 어떤 주장을 하면, ‘네가 어떻게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니?’라고 추궁하며 점잖지 못한 발화 방식이라고 꾸짖는 반면, 조심스럽게 주장하면 ‘참 겸손해요’라고 칭찬하며 태도를 높게 사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자. 점잖은 주장은 주장이 아닌가? 주장이 주장인 순간 점잖음은 위선에 불과하지 않을까? 혹시라도 주장에 불쾌해 할 어떤 청자를 위한 배려라고? 조금 덜 아프게 죽이면 나은 걸까?
주장 자체를 유보하는 게 아니라면, 그래서 철저하게 타협하며 너도 맞고 나도 맞고,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고, 이런 두루뭉술 짬뽕을 실제 원했던 거라면, 뭐 주장의 외양조차도 부질없는 게 아닐까 한다. 그건 관성이고, 타성이고, 기만이고, 느린 자살이다.
- 동의하고 아니고의 문제
특히 인문계열에서 좀 배운 사람(‘인문인’)은 동의와 부인의 문제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동의하거나 부인하는 행동을 자신의 긍지나 권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복소수’보다 ‘도메인’이 중요하다는 들뢰즈와 과타리의 말을 빌려오자면, 인문인은 도메인을 식별하는 데 능하지 않다. 모든 진술에는 도메인과 내용이 함께 있는데, 내용만 똑 떼어 판단 내리는 것이다.
가령 내가 물질과 우주와 기본입자를 말하기 시작하면, 인문인은 ‘그건 인간이 그렇게 바라보는 자연일 뿐’이라고 단호하게 지적하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라고 응대한다. 이런 대화 상황은 대략 모든 자연 분야의 사안에 다 해당한다. 그들에게서 나오는 마지막 말은 ‘아직 100% 확실한 건 아니지 않나요?’라는 비장의 만능 카드이다.
그런데 만일 이 태도가 일방적인 거라면? 결국은 자신의 믿음만을 믿겠다는 신앙고백에 불과하다면?
안타깝게도 십수 년의 인문 공부라는 것이 그렇게 헛된 것이라면! 이곳에서의 인문 담론이 위태로운 이유 중 하나이리라
- 연구자가 균형감각을 견지하려는 게 옳은 걸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어떤 사상가를 연구하는 까닭은 우선은 그로부터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취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런 흥미로운 생각을 많이 제공할수록 특정 사상가의 크기와 힘이 규정된다. 사상 영역에서의 자연선택이라 하겠다. 인간에게는 그런 사상가들의 풀이 있고, 흔히 고전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고전의 풀에 흘러든 사상가들은 수적으로 많은데, 그렇다면 그들 사이에 어떤 위계를 매길 수 있을까? 한 사상가가 다른 사상가보다 뛰어나다는 식의 평가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이런 물음에서 이른바 ‘균형감각’이라는 좋지 않은 해법이 출현하는 것 같다.
한 연구자가 균형감각을 갖는다는 것은 어떤 전제를 깔고 있다. 먼저 연구자가 고전의 풀에 잠기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는 전제. 그래야만 각각의 사상가를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비교’하고 ‘저울에 놓는’ 일이 가능할 테니까. 그런데 이런 전제는 애초에 적절하게 성립하기 어렵다. 학생 시절에야 각각의 사상가를 충실하게 이해하는 훈련이 꼭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 최대한 충실하게 각 사상가를 따라가고 따라잡아야 했겠지만, 이제 고전의 풀을 개관한 후 자기만의 관점을 지닌 연구자가 된 입장에서 여전히 학생 같은 자세를 견지하는 것은 미숙함의 발로로밖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연구자가 자기만의 저울로 고전의 풀을 재고 그 결과 특정 사상가에게 강한 부정이나 진심어린 친화를 표출하는 것이 오히려 미숙함의 징표로 여겨지곤 한다. 이른바 ‘균형감각’이 없다는 거다.
하지만 이런 평가에는 취향에 대한 몰취미가 깔려 있다. 평가란 본래 편파적일 수밖에 없고, 평가한다는 건 자신의 실존을 건다는 뜻이다. 미학적 의미에서 취향 또는 취미가 중요한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취향에 따른 판단은 본래 보편성을 가질 수 없다. 사람마다 입맛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편성과는 다른 차원에서 취향의 등급이라는 게 엄존하며, 고만고만한 입맛을 능가하는 어떤 맛과 그 맛에 대한 느낌은 강력하다. 자기가 선호하는 맛들에 대한 선호와 목록이 없다면 과연 존중할 만한 사람일까? 하물며 연구자일진대! 맛에서 균형감각을 견지한다는 건, 모든 음식을 골고루 먹어야 한다는 걸 뜻한다.
물론 참조하는 사상가가 사안별로 달라질 수도 있고 모든 면에서 완벽한 한 명의 사상가란 없다는 데도 동의한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건 사상가 집단의 결이다. 도무지 한 자리에 함께 놓기 힘든 사상가들이 있을 때, 연구자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옳을까? 상반되는 두 사상가 중간에서 같은 높이로 서 있으면 되는 걸까? 그런 중간 위치와 높이라는 게 과연 있는 걸까?
의미와 가치가 비판의 준거라는 니체와 들뢰즈의 선언은 참으로 미학적이다. 하지만 이들은 먼저 의미와 가치의 개념마저 비판적으로 갱신했다. 나는 훨씬 젊었을 때부터 이 길에서 매력을 느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균형감각을 가질래야 가질 수 없었다.
- 나는 왜 유독 몇몇 철학자만 편애하는가
나는 몇몇 철학자 또는 사상가를 편애한다. 작가나 예술가의 경우에도 그렇지만, 이런 경우는 취향의 문제라며 용인받으니 그나마 사정이 낫다. 문제는 나의 편애를 편협함으로 보아, ‘네 고유한 생각’이 없다는 증거라며 공격하는 이들이 많다는 점이다. 또는 편식이 심하니까 생각도 편협한 것 아니냐는 공격도 많다.
공격이 있다는 거야 문제될 건 없다. 허나 학부생도 아닌 내가 몇몇 사상가만 편애한다는 게 왜 문제인지 모르겠다. 나의 편애는 오랜 진화의 결과이다.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몇몇 사상가를 참조하면서 이 사상가는 여기에, 저 사상가는 저기에 쓸모가 있다는 식의 짜깁기가 나에겐 더 이상하고 이해되지 않는다. 사상에 있어 그런 중립적인 이용이 가능하다는 게 나에겐 불가사의할 뿐이다.
물론 결이 비슷한 사상가들이 있어서 이들을 엮어 모종의 종합을 추구하는 일은 바람직하고 환영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양립하기도 어렵고 서로 모순된 사상을 종합하겠다는 시도는 그냥 유명세만 좇는 나열주의이기 십상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이들이 너무도 많다.
내가 철학자로서 가장 의아하게 여기는 대목은, 평론가들이 여러 철학자의 아이디어를 자유자재로 조립해서 활용한다는 점이다. 특히 내 생각에 도저히 양립하기 어려운 철학자들을 한 장소에 모을 때는 전율마저 느껴진다.
내가 공부하기로 철학자는 각자 성주와 같아서 절대권을 행사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달리 말하면, 무척 오만하다. 물론 서로 친화성을 느끼는 철학자들이 있을 수 있는데, 역사 속에서 일방적일 수밖에 없다. 가령 스피노자나 니체가 들뢰즈에 친화성을 느낄 수 있을까? 흄이나 베르그손은? 들뢰즈는 자기 이름으로 오똑 선 철학자이다. 선대의 철학자들은 그에게서 종합되었다.
현대의 평론가들은 무얼 하고 있는 걸까? 종합을? 어쩌면 원고지 칸만 채워가고 있는 건 아닐까?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아마도 워드프로세서의 발명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 인문학이 부진한 이유
철학, 문학, 예술, 역사 같은 분야에서 발전(!)이 더딘 이유는 과학적 사고와 훈련이 부족해서가 아닐까? 이를테면 자료를 실증적으로 선별해서 다루는 법, 신뢰도 높은 자료를 서로 비교해서 평가하는 법, 그렇게 가공된 자료를 자기 관점으로 해석하는 법 등을 좀처럼 훈련하지 않는다는 거. 아마 언어학과 역사학 분야에서 가장 잘 하고 있는 작업일 텐데, 다른 분야으로의 담론 확장성(곧 영향력)은 좀 떨어지는 듯하다.
작금 ‘과학이 곧 교양’이라는 모토가 확산되고 긍정되고 있다. 아주 고무적인 일이다. 과학, 즉 인간이 자연에 대해 지금까지 가장 신뢰할 만한 수준으로 쟁취한 앎들의 총체 및 그 앎을 유지 보수하고 갱신하는 태도들의 집합, 이것을 무시하고 인간과 삶에 대해 논하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실증은 무시하고 부정할 영역이 아니라 배워서 발판으로 삼을 영역이다. 과학 교양 대중의 확산을 기뻐하는 까닭이다.
- 인문 교양으로서의 과학 다음은
과학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앎 및 그 앎에 도달하기 위한 태도이다. 과학책은 그 과정과 도달점을 적어 놓고 있다. 따라서 호기심이 있는 존재라면, 즉 인간이라면 누구나 과학책을 읽고 싶어 한다. 과학책 읽기는 쉬운 작업이며, 호기심을 채워가는 놀이이기도 하다. 저자마다 설명의 편차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자기 눈높이에 맞는 저자를 만나는 건 그닥 어렵지 않다. 최근에 과학책을 읽는 이들이 늘고 있다는 현상은 한국 사회도 이제 자연에 대한 앎을 순수하게 즐길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징표라고 본다. 이는 사회 발전의 지표로도 여길 수 있으며, 당분간 지속될 현상이다. 이 기회에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과학책을 출판한 관계자분 모두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한국 사회 발전에 큰 공헌을 하고 계신다.
그 다음은 뭘까? 과학이 인문 교양으로 정착하고 난 다음에는 독자는 어떤 방향을 원하게 될까? 내 생각엔 일단은 역사가 되겠지만, 궁극에는 철학이 될 거라 본다. 철학이야말로 극단의 지적 모험이 이루어지는 자리이며, 과학 다음(meta-physic)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그에 위배되지 않는 한 마음껏 생각해 보는 일은 얼마나 즐거운가.
철학사를 공부하는 건 그런 생각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일이다. 생각의 대가들을 만나보는 일이다. 그러나 마침내는 자기 혼자 생각을 펼쳐보는 일이 가장 즐거우리라. 단, 그저 공상하는 게 아니라 자연에 대한 앎을 바탕으로 해야 제대로 된 생각이라 할 수 있겠다. 말하자면 남에게 들려줘도 좋을 만한 생각. 다른 철학자의 이름값을 빌리지 않고 펼쳐지는 생각의 만찬이 한국 사회의 또 다른 단계를 형성하리라.
- 학문에서 ‘분석’과 ‘종합’
분석적 방법의 한계를 잘 보여주는 다음 구절을 보자. “경제적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은 바로 새로운 것들이 출현한다는 점이다. 물론 그러한 새로운 것들의 출현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동전의 앞면 뒷면이 나오는 것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과는 사뭇 다른 의미이다. (...) [그것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오로지 한 번만 일어나는 독특한 사건이며, 나아가 항상 질적인 변화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분석적 모델로는 새로운 것들의 출현을 다룰 수 없음은 당연하다. 분석적 모델로는 오직 양적 차원의 변화들만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그 모델의 기초 전제에 이미 함축되어 있는 것만 연역해 낼 뿐이지 어떤 새로운 것을 얻을 수는 없다.” Ceorgescu-Roegen, 1979, “Methods in Economic Science”, Journal of Economic Issues XIII (2, June), 317-328, p. 321.
경제학에서만 아니라 다른 인문·사회과학에서도, 새로운 것의 출현이라는 현상은 분석의 영역이 아니라 종합의 영역이다. 철학에서 분석이란 기존의 것들로 환원해서 설명하는 것이고 종합이란 새로운 것의 출현을 설명하는 것이다. 동전 던지기의 사례와는 달리 통계적으로 확률을 구할 수 없는 경우에, ‘우발(contingent)’, ‘우연(chance, accident)’, ‘무작위(random) 등의 용어로 지칭하곤 하는데, 이는 확률적 예측 범위마저 예측 불가능하게 넘어선다는 뜻이다.
종합적 현상을 분석의 방법으로 접근하려 하면 필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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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스팀 ♨ 이제 좀 가쥐~! 힘차게~! 쭈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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