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오늘의 역사 9월 16일

in zzan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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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6(헌종12)년 한국 최초의 신부 김대건(세례명 안드레아) 새남터에서 순교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로부터 8월 17일에 신품성사(神品聖事)를 받았다. 이로써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탄생하게 되었다. 10월에는 배편으로 페레올 주교를 모시고 조선으로 향하여 강경 황산포(黃山浦) 부근의 나바위에 상륙했다. 이어 페레올 주교를 모시고 한양으로 잠입하여 활발한 전교활동을 펼쳤다.

1846년에는 아직 만주에 머물고 있는 메스트르 신부 등의 입국을 위해 서해안 길을 개척하다가 6월에 순위도(巡威島)에서 체포되었다. 옹진군 감옥을 거쳐 해주감옥에서 황해감사로부터 심문을 받고 "조선에서 출생하여 마카오에서 성장하고 천주교를 펴기 위해서 귀국했다"는 사실을 자백했다.

이후 한양으로 압송되어 국가의 금령을 어기고 출국한 사실 및 천주교의 신부임이 밝혀졌다. 이 과정에서 몇몇 대신들의 부탁으로 세계지리의 개략을 책으로 만들고 영국에서 만든 세계지도를 번역하여 2벌의 지도를 채색하여 바치기도 했다. 이 당시 조선정부는 그동안 권세를 누리면서 천주교 박해에 앞장서 왔던 풍양조씨의 세도가 막을 내리는 등 큰 권력변동이 있었기 때문에 김대건 등의 옥사가 크게 중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기해박해 때 프랑스인 신부 3명이 처형된 것에 항의하기 위해 1846년 프랑스 함대가 충청도 홍주 앞바다에 기항하고 조선국 정대감 앞으로 된 문책서를 전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크게 놀란 조선정부는 그의 처형을 결정했고, 마침내 김대건은 같은 해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그의 시신은 교인들이 수습하여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 산중에 안치되었다.

1882년 수신사 박영효(朴泳孝), 일본서 최초의 태극기 게양
국기 제정 논의가 처음으로 거론된 것은 1876년(고종 13) 1월이다.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을 계기로 한·일 간에 강화도조약 체결이 논의되는 동안 일본측은 “운요호에는 엄연히 일본의 국기가 게양되어 있었는데 왜 포격(砲擊)을 가하였느냐?”고 트집을 잡았다. 그러나 조정의 인사들은 국기가 무슨 의미와 내용을 지니고 있는 것조차 몰랐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국기 제정의 필요성이 활발하게 거론되기 시작하였으며, 1882년 8월 9일 특명전권대사(特命全權大使) 겸 수신사(修信使)인 박영효(朴泳孝) 등 일행이 인천에서 일본배를 타고 도일할 때, 그 동안 구상되고 논의되어 어느 정도 찬성을 본 국기의 도안 내용을 다소 수정한 태극사괘(太極四卦)의 도안이 그려진 기를 국기로 게양할 것에 의견을 모으고 일본 선박 메이지마루[明治丸]에서 이것을 만들었다.

이때 메이지마루에는 후일 개화당의 주역이었던 서광범(徐光範)·김옥균(金玉均) 등도 함께 타고 있었다. 이들 일행은 8월 14일 고베[神戶]에 도착, 니시무라야[西村屋]에 숙소를 정하고, 이 건물 옥상에다 태극사괘가 그려진 기를 게양하였는데, 이것이 태극기의 효시(嚆矢)이다.

1950년 한국전쟁중 국군과 유엔군 낙동강전선서 총반격
6.25 발발과 함께 후퇴를 거듭해온 유엔군과 국군이 낙동강전선에 배수의 진을 친 것은 8월5일이었다. 물러설 수 없는 최후의 보루였다. 경상도 지역을 제외한 남한 전역을 장악한 북한군은 부산까지 점령할 태세로 8월8일부터 총공세를 시작했다. 미군은 왜관∼창녕∼마산선을 담당했고 한국군은 왜관∼낙정리(의성군)∼영덕선을 지켰다.

다부동과 포항에서의 치열한 전투에 이어 9월4일부터는 영천에서 밀고 당기는 대혈전이 시작됐다. 영천은 대구ㆍ포항ㆍ경주ㆍ안동을 이어주는 교통의 중심지로 낙동강 공방전의 최후 결전장이었다. 영천이 뚫릴 경우 미군이 한국군 2개사단과 민간인 10만명을 괌이나 하와이로 철수할 계획을 극비리에 세워놓을 만큼 영천전투는 건곤일척의 승부처였다.

그러나 9월13일 우리 군이 마침내 영천을 점령함으로써 계획은 취소됐고 대역전극의 발판이 마련됐다. 절체절명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이날, 7만5000명의 유엔군도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부산항을 떠났다. 9월15일 인천으로부터 낭보가 전해지자 유엔군과 국군이 총반격을 시작했다. 9월16일이었다.

1983년 서울지하철 2호선 을지로구간 개통
서울지하철 2호선 을지로구간이 1983년 9월 16일 오전 10시 개통, 운행에 들어갔다. 이날 개통된 을지로구간은 을지로입구~을지로~왕십리~성수동을 잇는 8km로 1980년 2월 착공, 3년7개월 만에 완공됐다. 이 구간이 완공됨으로써 지하철 2호선은 총 48.8km가운데 동쪽 27.8km가 개통됐다.

을지로구간에는 을지로입구, 을지로3가, 을지로4가, 동대문운동장, 신당, 상왕십리, 한양대, 뚝섬역 등 9개역이 새로 들어섰다. 을지로구간 개통과 함께 시청앞~동대문운동장간 3.3km의 지하보도겸 지하상가도 동시 개통됐다. 지하보도에는 냉-난방시설과 환기시설이 완비됐으며, 수세식화장실도 갖춰졌다.

을지로구간의 도시가스 및 상-하수도관은 모두 지하에 매설됐다. 을지로구간은 모두 10개 공구로 나뉘어 10개 건설회사가 참여, 총공사비는 1천8백50억원이 들었다.

1999년 동티모르 파병 결정
상록수 부대는 1999년 10월 다국적군의 주도국인 호주와 코피 아난 유엔사무총장의 공식 파병 요청을 우리 정부가 수용해 국회 동의를 얻은 뒤 파병됐다.

특수전사령부 요원들을 중심으로 보병 201명과 지원부대 172명, 지휘부 46명 등 총 419명으로 편성된 1진 상록수부대는 99년 10월 동티모르의 로스팔로스에 도착해 본격적인 치안유지 임무를 시작했다. 상록수 부대는 6개월 단위로 교대해 현재 주둔 중인 8진까지 연인원 3283명이 임무를 수행해왔다.

상록수 부대는 건군 이래 국제 평화유지활동에 파병된 최초의 보병 부대로 2000년 2월 PKF로 임무가 전환됐다.

국방부 관계자는 “상록수 부대는 현지에서 주민 자활운동을 벌이는 한편 농기구 수리, 이발소 운영 등 다양한 대민지원을 벌여 현지인들로부터 ‘다국적군의 왕’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고 말했다.

1179(고려 명종9)년 경대승 도방 설치
1402(조선 태종2)년 호패제도 실시
1882(고종19)년 전국의 척화비 철거
1980년 미국 보스턴 미술관서 ‘한국미술5천년전’ 열림
1982년 한양대병원 장기(臟器)은행 발족
1986년 제6차 경제사회발전5개년계획 확정
1991년 민주당 출범, 평화민주당과 통일민주당 일부 통합
1992년 남북고위급회담에서 이동복 대변인 훈령조작
2011년 부산-김해 경전철 개통
2014년 김성일 창원시의원 야구장입지에 불만, 안상수 창원시장에게 계란투척 의원직 상실


동티모르에 파견된 상록수 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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