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오늘의 역사 5월 16일

in zzan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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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2(신라 신문왕2)년 만파식적 제작
신라시대 전설상의 피리. 원명은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다. 신라의 제31대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감은사(感恩寺)를 지은 후에 해룡이 된 문무왕과 천신(天神)이 된 김유신(金庾信)으로부터 대나무를 얻어 만든 피리라 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린 설화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682년(신문왕 2) 5월 초에 해관(海官)이 와서 동해 가운데에 떠 있는 작은 산이 감은사를 향해 물결을 따라 왕래한다 하여 임금이 곧 이견대(利見臺)에서 동해를 바라보고 산을 살펴보니, 그 모양이 거북의 머리와 같고 산 위에 대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낮에는 둘로 갈라졌다가 밤이면 하나로 합쳐졌다. 이에 배를 타고 들어가서 그 대나무를 베어서 피리를 만들었는데, 이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이 들면 비가 오고, 장마 때는 비가 개며, 바람이 불 때는 그치고 물결이 평온해졌다.

그리하여 이 이름을 만파식적이라 하여 역대 임금들이 보배로 삼았다고 한다.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리고 천하를 화평하게 하며 모든 파도를 쉬게 하는 피리. 이 만파식적의 상징성이야 말로 모든 마음의 파도를 쉬게 하여 번뇌를 잠재우고 경건함과 평온을 갖게 하는 범종의 참뜻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으며 그 범종에 이와 같은 만파식적 형태의 음통(音筒)을 만들어 놓았다.

1931년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단체 ‘신간회’ 해산
신간회(新幹會)는 일제 강점기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대립과 갈등을 지양하고 힘을 합쳐 공개적으로 일제에 대항한 국내 최대의 민족운동단체였다.

1927년 2월 15일에 열린 창립식에서 이상재 조선일보 사장이 초대 회장에 선출되고, 간부·발기인 51명 가운데 신석우·안재홍 등 조선일보 출신이 12명이나 이름을 올려 총독부는 조선일보를 사실상 신간회 기관지로 생각할 정도였다.

한때 전국 140여곳에 지회가 설치되고 회원수도 4만여명에 달할 만큼 활발한 활동을 보이던 신간회가 내리막을 걸은 것은 1929년 12월의 민중대회 사건 때부터였다. 광주학생운동에 대한 민중대회를 강행하려다 일제의 탄압으로 관련자 수십명이 연행·구속된 것이다. 민족주의 진영에 비해 열세였던 좌익 진영도 내분을 부추겼다. 신간회를 계급적 투쟁목표가 선명한 조직으로 탈바꿈시키고자 ‘해소론(解消論)’을 내세우며 전체대회를 요구한 것이다. 1931년 5월 15∼16일, 이틀간 신간회 전체대회가 열렸다. 창립 4년4개월 만에 처음 열린 대회였다.

민족주의 진영은 ‘해소론’을 비판하고 신간회를 계속 존속시킬 생각으로 대회에 임했고 결과도 낙관했다. 하지만 16일의 투표결과는 찬성 43, 반대 3, 기권 30. 해소안이 가결된 것이다. 일제는 “해소는 해체와 같다”며 신간회 활동을 금지시켰다.

1989년 정명훈, 국립바스티유오페라단 음악총감독 겸 상임 지휘자 취임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씨가 1989년 5월 16일 파리 국립바스티유오페라단 음악 총감독 겸 상임 지휘자로 취임했다. 정씨는 같은 해 2월부터 이 오페라단의 음악감독 취임 교섭을 받고 그동안 관계자들과의 협의를 거쳐 이날 5년 임기의 음악감독에 취임한 것이다.

프랑스정부가 혁명 2백주년 기념 문화사업의 본보기로 추진한 바스티유 오페라극장은 프랑스는 물론 세계최고수준의 오페라극장을 목표로 총4억3천만달러를 들여 건립됐다.

세계 음악계에서 한국출신 음악가로는 가장 중요한 직책에 임명된 정씨는 정명화 정경화 등 두 누나와 함께 세계무대에 알려진 음악가족의 막내로, 1974년 세계최고의 권위를 지닌 소련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피아노 부문 2위를 차지함으로써 화제가 된 바 있다. 최근까지 이탈리아 플로렌스 오페라단 수석 객원지휘자이며 서독 자르브뤼켄방송 교향악단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를 맡아 왔다.

1997년 한석봉 친필서첩 발견
조선시대 명필인 한석봉과 그의 아들 민정이 쓴 글을 합본한 서첩이 발견됐다. 일본 긴키대학의 이원식교수에 의해 1997년 5월 16일 한석봉과 그의 아들 민정의 작품이 담긴 한씨양세묵묘서첩이 공개됐다.

석봉 한호는 1543년 개성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글쓰기에 열심이어서 집밖에서는 다리 난간에 글씨연습을 하고 산속에 들어가서는 나뭇잎에 글씨를 썼다는 기록도 있다. 석봉은 왕희지로부터 직접 글씨를 받은 꿈을 두번이나 꾸었을 정도로 그의 정묘한 필법을 익히는 것을 필생의 목표로 삼았다. 석봉은 15세 때 향시에 급제하고 성균관에 입학하는데 25세에 진사에 합격할 때까지 이곳에서 공부했다. 진사 합격 후 곧 승문원 사자관에 임명됐다. 조선시대 최초의 공식 사자관이었다. 그 후 57세가 돼 가평군수를 맡을 때까지 내직을 돌면서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공신교서 등 수많은 국가문서를 써냈다. 선조는 늘 그를 곁에 두고 붓과 벼루는 물론 때때로 좋은 술과 비단을 하사해 그를 격려했다고 한다.

석봉은 당시 대표급 문인인 차천로·최립·허균 등과 교류할만큼 문학적 소양도 상당했다. 특히 도연명과 이백의 시를 좋아했다. 흡곡 현령을 끝으로 고향에 돌아간 석봉은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내다 1605년 세상을 떠났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 발발
4·19혁명을 계기로 이승만(李承晩) 정부가 붕괴되고 대체 지배세력 내의 온건파인 민주당이 7·29총선을 통해 집권하며 민주주의를 표방했다. 당시 민주당은 신·구 양파로 분열되어 원색적인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군정과 6·25전쟁을 치르면서 급팽창한 군부는 반공 분단국가의 보루(堡壘)로서의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던 것이다.

당시 군부는 6·25전쟁 이후 필연적으로 직면할 수밖에 없는 군부 내부의 정군(整軍)과 충원문제를 둘러싸고 장교들간의 반목이 심했고, 그들 가운데 일부 불만세력이 정치개입이라는 방법으로 불만의 탈출구를 찾고 있었다. 군부는 창설과정부터 파벌간 대립이 심화되어 있었고 이승만 정부는 이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군부의 쿠데타 시도는 이미 6·25전쟁 기간중 이종찬을 중심으로 한 반(反)이승만 세력에 의해 모의되기도 했는데, 당시는 미국의 간섭과 주도세력의 분열로 불발되고 말았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2군 부사령관 박정희 소장 주도의 쿠데타 세력은 한강을 건너 수도의 주요기관들을 점령하면서 국가권력을 장악해나갔다. 이들은 방송국을 점령, '군사혁명'이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당시의 군사혁명위원회는 6개 항의 '혁명공약'을 내걸었다. 미국 정부의 신속한 지지표명, 장면 내각의 총사퇴, 그리고 대통령 윤보선의 군사정변 인정 등에 힘입어 정변의 합법성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어 이들은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하고 3년간의 군정통치에 착수했다.

이들은 이른바 '혁명'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일련의 개혁조치와 자립경제를 표방했다. 그러나 '혁명재판소'를 설치하여 정치적 반대세력을 탄압했다. 핵심적인 권력기구로서 '중앙정보부'를 설치하여 이를 통해 관료조직을 장악해나갔다. 그리고 이들은 권력을 제도화하기 위해 중앙정보부를 근간으로 관료, 지식인, 구(舊)민간정치인 등을 흡수하여 '민주공화당'을 민정 이양 이전에 조직해나갔다.

5·16군사정변은 4·19혁명을 계기로 심화되고 있던 반공 분단국가의 혼란과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국가 내 일단의 권력지향적인 군부세력이 불법적으로 합법정부를 전복시키고 권력을 장악한 정변이었다. 이것은 전쟁과 독재의 폐해에 시달리던 저개발국가에서 국민적 기반이 매우 취약한 소시민적 민족주의의 이중성과 주변정세의 위기의식에 기인하고 있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또한 4·19혁명 이후 일어나기 시작한 급진적 변혁세력을 탄압하고 억압적인 국민통제를 지속함으로써 이후 산업화로 인한 사회변동에 따른 민중운동의 대두를 상당 기간 지연시켰다.

군부의 불법적인 탈권과 정치개입이라는 선례를 남겨 이후 평화적인 민간정권교체를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후 산업화·근대화의 기틀을 구축했다는 긍정적 평가를 무시할 수 없게 했다. 한편으로는 그에 따른 인적 충원구조를 지역적으로 편재하여 지역감정 문제를 유발시켰으며, 사회 일반에 군사문화를 강제 이식하여 국민의 의식을 왜곡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김영삼 대통령이 5·16군사정변을 '쿠데타'로 규정짓고 그 평가는 역사에 맡긴다고 했듯이 이에 대한 논란은 앞으로도 계속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928(경순왕2)년 견훤 서라벌 공격
1429년 정초(鄭招), 농사직설(農事直說) 찬진
1920년 조선체육회 첫 전조선체육대회 개최
1933년 홍난파 작곡 이은상 작사 『조선가요작곡집』 간행
1970년 서울대교 개통
1973년 수재의연금횡령사건으로 대한일보 폐간, 대한항공 미주노선 첫 취항
1977년 가계수표제도 서울에서 첫 실시

2016년 소설가 한강 『채식주의자』로 한국작가 최초로 맨부커상 받음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 소장, 이낙선 소령, 박종규 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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