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오늘의 역사 5월 11일

in zzan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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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국내 첫 텔레비전 시험 방송
1956년 5월 12일 한국최초의 TV 방송국 HLKZ-TV가 개국했다. 호출부호는 HLKZ-TV이지만 미국 RCA사와 RCA한국 배급사가 합작으로 방송국을 설립했기 때문에 정식명칭은 KORCAD-TV였다.

이로써 한국은 세계에서 15번째, 아시아에서 필리핀, 일본, 태국에 이어 4번째로 TV방송국 보유국이 됐다. 그러나, 방송 당시에는 출력이 겨우 0.1kw에 불과해 수신지역이 좁고, 텔레비전 수상기값도 엄청나 전국을 통틀어 수상기 보급이 겨우 3백대에 불과하는 등 많은 시청자를 확보하지는 못했다.

첫 프로그램은 궁중연례악인 '만파정식지곡(萬波停息之曲)'과 아악(雅樂)에 속하는 국악합주곡인 '수제천(壽齊天)' 연주였다. 이어서 민속무용단의 승무와 백설희ㆍ현인ㆍ장세정 등 인기 가수가 대거 출연한 쇼프로를 2시간 동안 내보냄으로써 본격적인 텔레비전 통치 시대의 막을 올리게 됐다.

세종로 네거리와 서울역 등에 설치된 40여대의 대형수상기를 통해 이날 TV를 처음 접한 시민들은 한결같이 신기하다는 반응이었다. 시험방송을 거친후 6월 1일부터 격일로 밤8시부터 2시간씩 방송하다가 11월부터 금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저녁 2시간씩 방송했다.
그로부터 3년 후 이 방송사는 화재로 소실됐다. 그러나 그 방송경험과 인적자원을 바탕으로 1961년 12월, 지금의 KBS 탄생에 직접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1988년 직장 의료보험 가입의무화 대상사업장을 16인 이상에서 5인 이상으로 확대
오는 7월1일부터 직장보험 가입대상을 전 사업장으로 확대 시행할 예정이나 영세사업주 반발은 물론 가입자 관리등 정확한 실태분석과 철저한 사전준비가 요구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영세사업장에서 근무하는 근로자들의 의료복지 향상을 위해 지난해 국민건강 보험법을 개정 5인이상 근로자 고용 사업장에서 모든 사업장으로 확대 시행될 예정이다.

이를 위해 국민건강 보험공단은 사업장 추진단을 구성 실태 조사 및 사전 준비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오는 7월1일 직장의료보험가입 확대 시행시 5인미만 사업장의 경우 거의가 영세사업주들로 직장보험 가입시 보험료를 사업주가 50%를 부담. IMF이후 경영난을 겪고 있는
사업주들의 불만이 가중되고 있다.

특히 대부분의 사업장이 서비스업 분야의 사업장으로 근로자들의 단기 수시 변동으로 보험료 산출을 위한 월 급여액 공개 회피로 산출근거 불투명등 의료보험 가입자에 대한 관리가
사실상 불가능한 실정이다.

또 의료보험료 부담으로 인해 영세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사업주들의 강한 반발과 서비스업등 대상업종에 따라 가입자 관리가 사실상 불가능하여 근본 취지가 퇴색 유명무실할 우려
가 되어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운영하고 있는 추진단의 철저한 실태파악과 대책마련이 요구된다는 지적이다.

이에 5인미만 사업장 사업주 김모씨(53.부안읍 봉덕리 ㄷ건설 대표)는 정부는 부실기업 정리를 위한 공적자금 투입을 농어가부채 경감등을 위해 수십억조를 투입하면서도 말없이 생
업에만 전념하고 있는 영세 자영업자들을 위해서는 아무혜택이 없이 각종 세금징수. 산재보험 가입 의무화에 이어 직장의료보험까지 강요 경영난을 가중시키고 있다고 대정부 불만을
토로했다.

근로자 김모씨(38.식당 종업원)도 직장 의료보험 가입으로 의료보험료 납부 부담이 경감 환영하나 경영난에 처해 있는 사업주에 대한 동정론과 보험료 산출을 위한 월급여액 공개로
근로소득세등 세금납부등의 근거를 우려했다.

사업주와 근로자는 저소득 근로자의 의료복지 향상을 위해 직장의료보험 가입대상 확대 시행은 바람직한 제도나 적용대상 업종을 선별(식당등 서스업은 제외) 적용 의사. 변호사. 사
설학원등 고소득 소규모 사업장에 대해서는 소득을 철저히 산출. 소득에 걸맞는 보험료를 징수해야 될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에대해 국민건강보험공단 군산지사 양해익추진팀장은 그동안 직장보험 가입대상에 제외됐던 영세사업장의 근로자 복지증진 차원에서 실시된다고 밝혔다.

한국인들이 러시아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860년 농민 13세대가 한겨울 밤에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서 우수리강(江) 유역에 정착했다. 이어 1865년(고종 2년)에 60가구, 그 다음해에 100여 가구 등 점차 늘어나 1869년에는 4,500여명에 달하는 한인이 이주했다.이후로도 이민은 계속되었고, 대부분이 농업이민으로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망명 이민의 근거지가 되었다.

1863년 한인 연해주 이주 시작
동해의 아무르 만과 우수리 만 사이로 뻗어 있는 반도 서쪽에, 졸로토이 만을 감싸듯이 자리잡고 있다. 1860년 러시아 군사기지로 세워져 블라디보스토크 ('동방을 다스린다'는 뜻)라고 명명되었다.
러시아의 극동지방 남쪽 끝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항구와 해군기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1872년 러시아의 태평양 해군기지가 이전한 후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1880년에 시가 되었다.
철도도시로서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동쪽 종점이며 국내선 전용공항도 있다. 러시아 연방 극동지역의 교육·문화 중심지로서 극동과학 센터와 극동공립대학교(1920)·의과대학·예술대학·공과대학·상과대학·선박공학대학을비롯한 고등교육기관들이 있다. 문화시설로는 음악협회와 교향악단 및 극단, 지방 역사박물관과 태평양함대 역사박물관 및 수많은 도서관이 있다.

1960년 거창사건 유족 당시의 면장을 생화장
주민 150여 명이 마을 면장을 잡아 실신시키고 생화장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58년 전인 1960년 5월 11일,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주민이자 유가족 100여 명이 묘비 운반을 위해 마을 뒷산에 모였다. 유골은 주인을 알 수 없이 뒤섞여 있었기 때문에 가장 큰 것은 남자, 작은 것은 여자, 아주 작은 것은 어린아이의 것으로 추슬러져 큰 묘 2개에 합장됐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내 부모와 내 아이의 유골을 직접 본 유가족들에게 10년동안 사무쳐 온 원망이 폭발하고 말았다. 유가족들의 분노와 한은 사건 당시 면장이었던 박영보에게 향했다.
무고한 주민들의 죽음을 방관하고, 사건 이후에도 유가족들을 모른 체해온 박 면장이었다. 유가족들의 울분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그렇게 박 면장은 자신이 외면해온 마을 주민들로부터 끔찍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 사건의 뿌리는 1960년 기점에서 다시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흘간 주민 719명 학살,희생자 58%가 어린이와 노인 거창군 신원면에서 국군 제11사단 소속 군인들이 마을 주민을 집단 학살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박영보 면장은 사건 당시 군부대장의 명령으로 주민들을 분류하는 일에 참여했다. 주민들은 박 면장의 분류에 따라 군경 가족과 비군경 가족으로 나뉘었다. 이는 곧 희생자와 살아남은 자를 가르는 기준이 됐다.

500여 명의 무고한 주민들을 마을 뒷산으로 끌고 간 건 다름 아닌 한국군이었다. 지리산 인근의 빨갱이를 소탕한다는게 명목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간 주민들은 그곳에서 한꺼번에 총살당했다. 학살극은 사흘 만에야 끝이 났다.

1999년 만민중앙교회 신도 200여명, MBC 본사건물에 난입해 방송중단사태
방송국 주조종실이 교회 신도들에 의해 점거돼 방영중이던 프로그램이 중단되는 사상 초유의 사고가 발생했다.

11일 오후 11시15분쯤 만민중앙성결교회 소속 신도 300여명이 문화방송(MBC) 건물로 들어가 이 가운데 50여명이 주조정실에 난입, 최종 전원장치를 끄면서 이날 밤11시10분부터 방영중이던 PD수첩 「이단파문-이재록 목사편」이 5분만에 중단됐다.

방송사 주조정실이 외부인들에 의해 점거돼 방송이 중단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에 따라 문화방송 남산송출본부에서는 미리 준비해둔 자연 다큐멘터리 「자연은 살아있다」를 4차례에 걸쳐 대신 방영했으며 11시40분쯤 본 프로그램을 종료하고 다른 프로그램을 내보냈다.

프로그램이 중단되면서 안내 자막마저 나가지 않자 언론사에 영문을 모르는 전국 각지의 시청자들로부터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문화방송측은 이날 오후 11시50분 마감뉴스를 통해 『교회 신도들의 주조정실 난입 점거 농성으로 방송이 차질을 빚었다』며 사과방송을 냈다.

이에 앞서 30여대의 버스를 나눠타고 문화방송을 찾아간 1천5백여명의 신도들중 300여명은 10여명의 청원경찰을 뚫고 건물안으로 진입했고 이중 50여명이 건물 2층 주조종실 문을 부수고 난입, 방송을 중단시켰다.

동시에 신도 20여명은 4층 교양제작국에 들어가 이주갑 팀장의 멱살을 잡고 『주조종실이 어디 있냐』며 실랑이를 벌였으며 신도 2천여명은 방송사 앞 왕복 4차선 도로를 점거한채 농성을 벌였다.
경찰은 이날 오후 11시15분쯤 방송사측의 신고를 받고 병력 15명을 출동시켰으나 신도들을 해산시키지 못했다. 이후 경찰 6개중대 700여명이 오후 11시30분쯤 방송국에 도착, 주조종실에 난입해 있던 신도 50여명을 강제 해산시킨뒤 오후 11시40분쯤 방송이 정상화됐다.

2001년 동아건설 파산 선고
동아건설 임원들이 본사에서 긴급 대책회의를 가지면서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다.

법정관리 절차 폐지로 파산 초읽기에 들어갔던 동아건설에 대해 결국 법원의 파산선고가 내려졌다. 서울지법 파산4부는 2001년 5월 11일 동아건설의 파산결정을 내리고, 향후 회사 청산절차를 맡게 될 파산관재인에 사법연수원장 출신 권광중 변호사를 선임했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동아건설에 대한 1조원 이상의 금융단 협조융자와 2년 이상의 기업개선작업에도 불구하고, 채무가 자산을 1조5000억원 이상 초과해 청산하는 것이 계속 운영하는 것보다 낫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파산결정의 지연에 따른 공사 착수·재개 결정이 늦어질수록 회사 수익성이 악화돼 수익성 있는 공사마저 포기해야 할 상황이 생길 수 있어 조기에 파산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한편 재판부는 파산결정에도 불구하고 리비아 대수로 공사와 용인 구성 솔레시티 등 수익성이 높은 공사들의 경우는 계속 진행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부 아파트의 1만여 가구가 입주에 차질을 빚었고, 직원 2800명이 해고돼 파장이 컸다. 동아건설은 채권단이 2000년 10월 3일 자금지원과 워크아웃 중단 결의로 사실상 퇴출된 상태였다. 동아건설 주식도 6월 7일 마침내 주식시장에서 퇴출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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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만민중앙교회 신도 200여명, MBC 본사건물에 난입해 방송중단사태" 가 가장 눈에 들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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