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오늘의 역사 5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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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호남선 착공
호남지방은 비옥한 평야의 곡창지대인 동시에 긴 해안선이 있어 수산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그리하여 호남지방의 서부를 관통하는 호남선은 우리나라의 간선철도인 경부선·경의선·경원선에 비하여 정치적·군사적 중요성이 덜한 반면 경제적 유용성이 큰 노선이었다. 따라서 일찍부터 철도 부설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904년 5월 서울에서 목포에 이르는 철도를 부설하려 하였으나, 수원·천안·대전을 경유하여 영남지방으로 향하는 경부선 철도의 부설권이 일본에 넘어감에 따라 독자적인 간선철도 부설에 실패하였다. 이후 조선총독부의 주관 아래 경부선의 지선 형식으로 공사가 시작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 7월대전∼연산간 39.9㎞를 개통한 것을 시작으로 몇 차례에 걸쳐서 개통되었다. 1914년 1월 22일 총 260.6㎞의 호남선 전통식이 목포에서 거행되었다.

이렇게 개통된 호남선은 호남지방의 미곡을 일본으로 수송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호남선의 주요 지점에 미곡 집산지가 들어섰고, 미곡 적출항으로 연결되는 지선도 개통되었다. 대전역에서 호남선과 경부선을 연결할 때 서울방향이 아닌 부산방향으로 접속한 것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1915년 제주군과 울릉군을 제주도, 울릉도로 개칭
갑오개혁이 실시된 1894년 12월에는 다시 도장을 설치하고, 이듬해 8월에는 도장을 도감(島監)으로 격상시켜 배계주(裵季周)를 임명하였다. 하지만 아관파천과 더불어 울릉도의 삼림 벌채권이 러시아로 넘어갔고, 청일전쟁 이후에는 다시 일본인의 벌목이 자행되었다. 1896년 23부제를 실시하면서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을 제주부(府)로 통합하였다가, 1년 만에 복구하면서 전라남도 관할하에 두었다.

이에 대한제국은 1899년 내부관원 우용정(禹用鼎)을 시켜 다시 울릉도에 대한 조사를 실시함과 더불어 1900년 울릉도 관제개정안을 발표하여 도감을 감무(監務)로 개칭하기로 하였으나, 도중에 개정안을 바꾸어 울릉도에 정식으로 군(郡)을 설치하고 군수(郡守)를 두며, 강원도 관할에 둔다는 '칙령 제41호'를 공표하였다. 이 당시 군의 명칭은 울도군이었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제주목, 정의군, 대정군 및 완도군 일부(추자면)를 제주군으로 통합하였으며, 다음 해인 1915년 제주군을 제주도(島)로 개칭하고, 군수(郡守)를 도사(島司)로 개칭하였다. 여기서의 도(島)는 행정구역 단위 명칭으로 쓰인 것. 같은 시기 울도군(울릉군)도 울릉도(島)로 개칭되었다.

1922년 어린이날 제정
우리나라에서 5월5일을 ‘어린이 날’로 기념하기 시작한 최초의 해는 1923년이다.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이 어린이의 고유문화와 예술 활동을 진작시키며 어린이의 인권의식을 기를 목적으로 1922년 3월16일 동경에서 ‘색동회’를 조직한 것이 그 시초다. 이듬해 1923년 5월1일 색동회를 중심으로 방정환 외 8명이 어린이날을 공포하고 기념행사를 치름으로써 비로소 어린이날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923년 5월5일 발표된 어린이날 선언문에는 ‘어린이를 종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완전한 인격적 대우를 허용하고 어린이를 재래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연소노동을 금지하며 어린이가 배우고 즐겁게 놀 수 있는 가정과 사회시설을 보장할 것’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어린이날 선언은 1924년 제네바의 국제연합협회의에서 채택된 국제아동인권선언보다도 일년 앞섰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그러나 1939년 일제의 억압으로 기념행사가 중단된 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다시 5월5일을 어린이날로 정했다. 이후 1957년에 대한민국 어린이헌장이 선포되었으며 1970년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대통령령 5037호)에 따라 공휴일로 정해진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마다 5월5일이 되면 체육대회, 연극 공연, 기념잔치, 영화 상영, 글짓기 대회, 음악회, 미술대회, 도서·벽지 및 시설 보호아동, 소년소녀 가장세대 위문 및 위안 행사 등이 개최되며 각종 놀이시설, 공원, 체육관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1936년 택시요금 미터제 실시
택시의 발달은 자동차의 발달과 거의 궤를 같이한다. 원동기가 달린 최초의 택시는 1890년대말 유럽과 미국 도시에 등장하기 시작한 전동차였다. 요금계산기를 장비하고 내연기관으로 추진되는 택시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07년이었으며, 그 이후로 이런 택시가 택시업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한국에 택시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12년 4월 이봉래가 승용차 2대를 들여와 서울에서 시간제로 임대영업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한국 최초의 택시 회사는 1919년 일본인 노무라겐조가 세운 경성택시와, 1921년 조봉승이 설립한 종로택시 회사다. 개인 택시는 1967년 15년 이상 무사고 운전자의 포상제도로 실시되었고, 콜택시는 1970년 서울에서 처음 등장해 서울·부산 양대도시에서 운행되다가 중형 택시의 등장과 함께 사라졌다.

1946년 국방경비대사관학교 개설
미군정은 1946년 4월 30일 군사영어학교 폐교 후 같은 해 5월 태릉에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南朝鮮國防警備士官學校)를 창설했다. 초대 교장은 이형근 참령(소령), 부교장은 장창국 부위였다.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는 1946년 6월 15일 남조선국방경비대(南朝鮮國防警備隊)가 남조선경비대(南朝鮮警備隊)로 개칭되자 6월 16일 남조선경비사관학교(南朝鮮警備士官學校)로 개칭되었다.남조선경비사관학교는 1기부터 6기까지 1,254명의 장교를 배출했다.

미군정은 단기간에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1기부터 4기까지는 일본군, 만주군, 광복군 출신 군경력자들을 입교시켰다. 이 때문에 장교의 절반 이상을 일본군 출신이 점했다. 5기는 5년제 중학 졸업 이상의 민간인을, 6기는 우수 하사관 및 병을 대상으로 모집했다. 6·25 전쟁 때 1기생 연대장으로부터 6기생 중대장까지 30%가 희생되었다. 정부 수립 후인 1948년 9월 5일 국군 창설과 동시에 육군사관학교로 개칭되었다.

1962년 해양경찰대 발족
해양경찰청의 전신이다. 1953년 12월에 인접해양주권선내의 해양경비를 담당하기 위하여 내무부 치안국 경비과에 배치된 경찰관으로써 해양경찰대를 편성한 것이 시초이며, 1962년 5월 해양경찰대 직제가 제정되었다. 해상경비, 해난구조, 해양오염에 대한 감시 및 방재업무 등 해상에 있어서의 경찰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였다.

당초 해양경찰업무는 내무부장관 소속하에 설치되어 해양경찰대의 본부에는 치안감인 대장과 관리부·경비부·해양오염관리관 등의 부서가 있었다. 산하에는 부산지구·인천지구 등 10여 지역을 관할하는 지구해양경찰대와 필요에 따라 둘 수 있는 지대 등이 있었다.관장업무의 특수성 때문에 경찰공무원뿐만 아니라 기술계의 일반직공무원들도 많이 배치되어 있었다.

해양경비업무는 해난구조, 해상상황의 파악·유지, 해상치안정보 및 대공정보의 수집·활용, 해상범죄수사 등이었다.해양오염관리업무로서는 해양오염방지를 위한 감시·단속 및 홍보, 선박·해양시설 및 폐유처리사업장 등에 대한 출입검사, 해양환경감시원의 임용과 지도, 기름 및 폐기물의 방제에 대한 조처, 해양오염분쟁 조정에 관한 사항, 해양오염방재에 관한 시험·연구·감식 및 분석 등이었다.

그 뒤 1996년 8월 해양경찰대는 해양수산부 소속의 해양경찰청으로 개편되었다. 개편당시 해양경찰청장은 치안정감으로 보하였다가 2005년 7월부터 치안총감으로 격상하였고 차장을 치안정감으로 보하였다. 2018년 현재 해양경찰청장 소속으로 해양경찰교육원 및 중앙해양특수구조단을 두고 있으며 본청에는 경비국·구조안전국·수사정보국·해양오염방제국 및 장비기술국 등의 하부조직이 있다. 5개의 지방해양경찰청(중부·서해·남해·동해·제주) 산하에 총 19개의 해양경찰서가 있다.

1963년 우리나라 최초의 볼펜 ‘모나미153’ 탄생
1963년 5월 1일 처음 판매되기 시작되어, 현재까지도 계속 만들어지고 꾸준히 팔리고 있는 한국 필기구계의 베스트셀러이자 산 역사. 한국인에게 있어 '볼펜'이라고 하면 무의식적으로 떠오를 만한 제품이다.

필기구라고는 연필이나 만년필이 고작이었던 1960년대에 처음 발매되었다. 모나미 153 볼펜은 당시 15원으로 출시됐는데 출시 직후부터 대 히트를 쳤다. 워낙 모나미의 인지도가 높았던지라 모나미 153 볼펜 발매 4년 후인 1967년에는 아예 회사이름을 광신 화학에서 모나미 화학 공업으로 바꾸어버렸을 정도였다.

이를 제작하기 위해 일본에서 볼펜의 볼을 수입해오는 대신 끈질기게 매달려서 잉크 만드는 법을 배워왔다고 한다. 초기에는 가내수공업 방식으로 제작되었으나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기계를 사용한 생산 방식으로 바뀌면서 대량으로 유통되기 시작하였고 온갖 필기구가 범람하게 된 2000년대에도 훌륭한 가성비와 높은 인지도를 바탕으로 여전히 꾸준한 수요를 확보하고 55년동안 37억자루 팔렸다고 한다.

1967년 국제복음방송국 극동방송으로 이름바꿈
미국에 본부를 둔 개신교 선교 방송이다. 대한민국을 비롯해서 세계 32개국에 방송국을 두고 있다. 물론 대한민국에서는 극동방송(FEBC)이라고 부른다.

본디 개국 당시 이름은 '국제복음방송국'이었다. 1956년 12월 23일에 호출부호 HLKX로 첫 전파를 발사한다. 개국 당시에는 북한을 상대로 하는 방송위주로 편성되어 하루 두 시간 남짓 한국어방송을 진행했다고 전한다. 이후 1961년에 인천 중구 북성동으로 사옥을 옮겨 방송을 진행하다, 1967년에 지금의 마포구 사옥으로 이전하여 '극동방송국'이 되었고, 1979년에는 상호명을 '(재)극동방송'으로 바꾸어 비영리재단법인으로 바꾸었다.

서울 본사는 마포구 와우산로 56으로 홍익대학교 정문에서 매우 가깝다. 전파방송이 송출되는 나라마다 종교방송의 내용이 달라지기도 한다. 한국 극동방송에는 한국어로 된 찬송과 찬양이 흘러나오고 가끔씩 영어 찬송도 들려오는 편이다.

1970년 영친왕 이은 별세
휘는 은(垠), 아명은 유길(酉吉)이고, 자는 광천(光天), 아호는 명휘(明暉)· 명신재(明新齋)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사후에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문인무장지효명휘의민황태자(文仁武莊至孝明暉懿愍皇太子)라는 시호를 올렸으나 정식 시호가 아닌 사시이다.

황태자로 책봉되기 이전의 작호인 영친왕(英親王)으로도 알려져 있다.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고종의 일곱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순헌황귀비 엄씨이다. 순종과 의친왕, 덕혜옹주와는 이복 형제이다. 1897년에 경운궁 숙옹재에서 태어나 의친왕을 제치고 병약하여 아들이 없었던 순종의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1907년에 이토 히로부미에 의하여 강제로 일본 유학을 떠났다. 1910년에 한일 병합으로 대한제국 황제가 왕으로 격하되면서 왕세자가 되었으며, 1920년에 일본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와 정략혼인을 하였다. 1926년에 순종이 승하하자 왕위를 계승하여 제2대 창덕궁 이왕(李王)이 되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하였고, 일본 제국 육군에 입대하여 계급이 중장에 이르렀다. 1963년에서야 혼수상태인 채로 대한민국에 영구 귀국하였다. 그 후 병상에서 생활하다가 1970년에 창덕궁 낙선재에서 사망하였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홍유릉에 안장되었으며, 원호는 영원(英園)이다.

이은이 대한제국의 황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제국 육군에 복무하였고, 일본 황족과 결혼하였으며, 일본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친일 논란이 있다. 2009년에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민족문제연구소는 사실상 볼모의 처지였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인명사전 명단에서 제외하였다.

1981년 정부, 1982년부터 교육세 신설
우리 나라는 1958년 8월에 교육세를 신설하여 시행하다가 1961년 12월에 폐지하였고, 그 뒤 1981년 12월에 교육의 수요에 대처하기 위하여 목적세로서 교육세를 다시 신설하여 시행하고 있다.

1958년에 신설된 교육세는 의무교육제도의 건전한 운영을 위해 의무교육비의 정상적인 조달을 목적으로 삼았으며, 국세인 교육세와 지방교육세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 당시의 국세인 교육세의 과세표준을 개인은 소득세의 과세표준으로 하고 법인은 각 사업연도소득 중 유보 또는 적립한 금액 또는 유보소득으로 하였으며, 세율은 3% 내지 15%였다.

지방교육세는 국세인 교육세의 과세최저한에 미달되는 소득을 과세표준으로 하였고, 세율은 2% 내지 5%로 하였다. 1980년대에 이르러 교육의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1981년 12월에 신설된 교육세는 목적세로 운영되고 있다. 목적세로서 교육세의 과세표준과 세율은 네가지로 분리하여 시행되고 있다.

소득에 대해서는 분리과세되는 이자소득금액과 배당소득금액을 과세표준으로 하고 세율은 5%이다. 주세에 대한 교육세의 과세표준은 납부할 주세액이고 세율은 10%이다. 제조담배에 대해서는 제조담배의 매도가액을 과세표준으로 하고 세율은 10%이다.

금융·보험업에 대한 교육세의 과세표준은 영업수익이며 세율은 0.5%이다. 1982년의 교육세 세입액은 1,979억원이었으며, 그 뒤 매년 증가하여 1985년에는 3,211억원이었고, 1997년에는 2조 4,677억원에 달하였다.

2004년 서울광장 개장
서울광장은 3.1운동, 6월 민주화운동 등 한국현대사의 한 획을 긋는 역사적 사건의 무대였으며 2002년 월드컵 기간에는 시민들의 축제의 마당이었다. 시청광장의 역사는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다가 월산대군 개인집(덕수궁)으로 돌아온 1897년부터 시작된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고종은 나라의 기틀을 새로이 하기 위해 덕수궁 대한문 앞을 중심으로 하는 방사선형 도로를 닦고 앞쪽에는 광장과 원구단을 설치하였다. 이때부터 대한문앞 광장은 고종보호 시위, 3.1운동, 4.19혁명, 한일회담 반대시위, 6월 민주화에 이르기까지 시민들의 주요무대가 되었다.

도심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에 역사문화자원들이 산재하여 국가적 상징성 및 역사성을 지닌 장소로 서울의 대표적인 이미지를 형성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으나 사람을 위한 광장이 아니라 자동차를 위한 교통광장으로 상습적인 교통혼잡과 정체로 몸살을 앓아오던 곳이었다.

또한, 지하상가 및 지하보도로만 횡단이 가능하여 보행접근성이 매우 불리했고 장애자, 노약자에 대한 보행권 배려가 전무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보행공간으로 조성해달라는 시민단체들의 끊임없는 요구와 함께 시민여론조사에서도 광장조성에 대한 수요가 파악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서울광장이 붉은 악마의 응원의 메카로 부각되면서 시민결집과 커뮤니케이션 공간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본격적인 광장조성 논의가 진행되었다.

2005년 세계최초로 위성DMB(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 본방송 시작
이동중에도 휴대전화기로 위성방송을 볼 수 있는 위성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이 4개월간의 시험방송을 끝내고 1일 본방송을 시작했다. "내손안의 TV" 시대가 본격적으로 개막되면서 다음달부터는 단계적으로 시작될 지상파DMB와의 가입자 쟁탈전이 치열하게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위성DMB 서비스는 지난해 10월 일본이 먼저 시작했지만 휴대전화와 결합된 위성DMB서비스는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다. SK텔레콤 자회사인 TU미디어는 이날 오전 10시 서울 성수동 방송센터에서 위성DMB "테이크아웃(Take out) TV" 본방송을 위한 첫 전파를 송출했다.

현재 위성DMB는 중계기(갭필러)가 깔린 서울과 수도권,5대 광역시 등에서 서비스가 가능하며 연내 84개 시지역으로 서비스가 확대될 예정이다. 또 서울지역의 경우 지하철 1〜4호선,분당선,인천선과 전국 21개 고속도로에서 위성DMB를 이용할 수 있으며 나머지 지하철 5〜8호선은 연내 중계기가 구축되는 대로 이용이 가능하다. TU미디어는 항공사와의 협의를 거쳐 비행기 안에서도 위성DMB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추진할 계획이다.

이날 본방송 시작후 서울 성동구 등 일부 지역에서는 엘리베이터안이나 높은 건물 옆,건물 지하 등에서는 "신호 세기가 약해 잠시후 이용해주세요."라는 메시지와 함께 방송이 1〜5초간 중단되기도 했고,건물 사이나 아파트 밀집지역을 걸으면서 이동할 땐 화면과 음향이 1〜3초간 끊겼다 복구되기도 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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