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오늘의 역사 4월 7일

in zzan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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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조선 정종2)년 사병제도 금지
시위패는 고려시대인 공민왕 때 궁궐 숙위와 국방의 임무를 띠고 처음 편성되었는데, 조선이 건국될 무렵에는 주요권력자가 원수의 직책을 차지하고 이들을 사병으로 부리고 있었다. 이같은 양상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여전히 계속되었다.

군사권을 집중하기 위한 노력은 1392년에 세자로 책봉된 방석과 정도전 등을 중심으로 차츰 세력관계의 방향이 결정되어가고 왕조가 안정됨에 따라, 1398년에 이르러 권력의 중심에서 다소 멀어진 여러 왕자와 유력자의 절제사직을 폐지하여 합치려는 시도로 나타났다.

이는 바로 방석과 정도전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 이외의 유력자가 거느린 사병을 혁파하려는 조치로서 일부 실행되기도 했으나, 비교적 큰 권력을 쥐고 있던 방원(芳遠)이 군사권 포기를 거부하고 권력투쟁에 나서서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왕위를 정종에게 물려주게 했다.

이에 1399년(정종 1) 종실 8명만이 시위패를 나누어 관장하게 했다가, 1400년 여러 절제사를 폐지하고 그들이 거느리던 군사의 군적을 중추원과 의흥삼군부를 통합하여 설치한 삼군부에 보내면서 왕실에 직속되어 있던 시위패도 삼군부로 이속되었다.

이로써 결국 시위패의 사병적 성격이 소멸되고 순수하게 공병으로써 기능하게 된 것이다. 이같이 사병혁파는 조선 건국 초엽의 권력투쟁을 마감하는 데 한 획을 긋는 조치였으며, 조선의 군사제도가 정치적 안정과 중앙집권화를 촉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465(조선 세조11) 원각사 준공
고려 때부터 흥복사(興福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된 사찰로 조선 태조 때 조계종(曹溪宗)의 본사가 되었다.

세조 10년(1464) 4월에 효령대군(孝寧大君)이 회암사(檜巖寺)에서 원각법회(圓覺法會)[1]를 열었다. 세조 10년 5월 2일자 실록#에 따르면, 효령대군이 주최한 원각법회에서 부처의 형상이 나타나고 감로(甘露)가 내렸으며 노란색 가사를 입은 승려가 홀연히 나타나 탑을 돌고 허공에서 사리가 나타나더니 그 숫자가 늘어났다.

효령대군이 세조에게 이러한 이적을 이야기하며 그때 나타난 사리를 보여주자 세조가 함원전(含元殿)에 모시고 기도했더니, 사리의 숫자가 또다시 늘어났다고 한다. 세조는 이러한 이적을 이야기하며 흥복사를 다시 고쳐 세워 원각사라고 이름을 짓겠다고 명령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세조는 조성도감(造成都監)을 설치하고 왕명으로 흥복사를 크게 고쳐 세운 후 원각사라 이름지었다.

세조 11년(1465) 사월초파일에 세조가 직접 방문하여 승려 2만 명에게 공양을 베풀고 죄인을 사면했으며 세금을 감면하였다. 1467년 사월초파일에는 원각사지 십층석탑을 완성하였고 이후로도 절에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신하들이 왕에게 하례를 올렸다.

하지만 연산군이 원각사를 기방으로 만들고 기생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면서 절이 사실상 폐지되었다. 이후 중종 때 원각사를 완전히 헐어버렸고 지금은 탑골공원이 되어 있다.

1896(고종33)년 ‘독립신문’ 창간
매년 4월 7일은 ‘신문의 날’이다. 우리나라 최초 민간신문 ‘독립신문’의 창간일인 1896년 4월 7일을 기념하기 위해 1957년 처음 제정돼 지금까지 기념해오고 있다. 한국신문편집인협회가 발족되고 ‘한국신문윤리강령’이 선포된 날도 1957년의 이날이므로 우리나라 언론인들에게는 뜻깊은 날이 아닐 수 없다.

독립신문 발간이 본격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894년 서재필이 망명지 미국에서 돌아온 뒤부터였다. 서재필이 발의하고 온건개화파가 나서 신문발간을 서두르자 정부도 창간자금 4400원과 사옥, 심지어 생계비까지 지원하며 독려했다. 창간 후에도 지방관청과 각급 학교에 구독을 권장하며 부수확장을 도왔다.

창간호는 타블로이드 크기로 4면 발행이었다. 1∼3면은 순한글판, 4면은 영문판(The Independent)이었다. 초대 사장 겸 주필은 서재필이 맡았고 직원은 고원(告員) 또는 탐보원(探報員)으로 불린 기자 2∼3명을 포함, 10명 안팎이었다. 신문값은 동전 1푼, 즉 동전 한 닢으로 출발했다.

300부로 시작한 발행부수도 한때 3000부에 이를 정도로 성장했지만 재정자립을 이루지 못한 신문사에 파국은 예정된 운명이었다. 정부의 부패와 러시아의 이권침탈 비판에 앞장서자 정부가 사옥을 회수하고 친러 수구파가 탄압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1899년 12월 4일, 3년8개월 만에 종간됐다.

1996년 박찬호(LA다저스) 메이저리그 첫 승
1996년 오늘은 '코리안 특급' 박찬호가 메이저리그 데뷔 첫 승을 기록한 날이다. 이날 박찬호는 구원투수로 등판해 4이닝 동안 18타자를 상대로 7탈삼진을 뽑아내는 맹활약 속에 1994년 데뷔 후 2년 만에 메이저리그 승리투수가 되었다.

박찬호는 1994년 메이저리그에 직행한 17번째 신인선수가 되었지만 이렇다 할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채 마이너리그에서 2년간 수련을 해야했다. 괄시와 걱정 속에 실력을 가다듬은 박찬호는 1996 시즌부터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한편 이날의 등판은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당시 선발투수였던 라몬 마르티네스가 2회 타석에서 허벅지 근육통을 호소했고, 긴 이닝을 소화해줄 선수를 찾다가 박찬호가 등판한 것이다. 갑작스러운 등판에도 박찬호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 해 5승을 거둔 박찬호는 1997 시즌 14승을 거두며 메이저리그 붙박이 선발로 자리잡았고 2010년까지 총 124승을 거두게 된다.

1997년4월7일 한보 청문회
한보특위가7일 구치소에서 한보 총회장을 시작으로 한달 가까운 청문회 무대의 막을 올렸다.
정 총회장을 상대로 한 이날 청문회에서 여야 의원들은 세간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리스트’와 한보의 지난 92 년 대선자금 지원설,각종 특혜대출 및 정·관계 커넥션 등 한보 비리의 ‘몸통’ 캐기에 주력했다.

여야는 청문회에 앞서 구수회의를 갖고 ‘공략’ 대책을 최종 점검하는 등 긴박한 움직임을 보였다. 청문회는 당초 9시 정각에 열릴 예정이었으나 신 한국당이 국민회의 김원길 의원의 자격문제를 제기하는 바람에 지체돼 20분 늦게 시작됐다.

한보 대출 비리사건에 대한 국정조사 특위의 구치소 청문회가 시작된 7일 시민들의 눈과 귀는 청문회를 생중계하는 TV와 라디오에 쏠렸다.

이날 역과 강남 고속버스터미널 등에 설치된TV 앞에는수십여명씩의 시민들이 모여들었으며 각 회사 사무실에도 직장인들이 잠시일손을 놓고 삼삼오오 모여앉아 지난 88년의 5공(共) 청문회에 이어 9년 만에 생중계된 이번 청문회를 지켜봤다.

시민들은 그러나 이날 증인으로 나선 한보그룹 정태수 (鄭泰守) 총 회장이 “모른다”거나 “기억 나지 않는다”,“현재 재판중에 있으므로 답변을 거부한다”는 등의 회피성 증언으로 일관하자 실망과 분노를 나타냈다.

이들은 또 여야 특위위원들이 진상규명을 위한 ‘송곳’ 질문보다 자기 당 지도부의 연루설을 부인 하는 장광설을 늘어놓으면서 의원들끼리 티격태격하는 모습마저 보이자‘청문회 무용론(無用論)’까지 내놓았다.

한편 서울구치소측은 이날 1백여 명의보도진에 몰려왔음에도불구하고 기자들에게 편의시설을 거의 제공하지 않는 등 무성의한 태도을 보였다.

구치소측은 기자들을 위해 전화 두 대와 팩시밀리 한 대를 설치했으나 팩시밀리가 자주 고장을 일으켜 보도진의 애를태우기도 했다.

2000년 울진원전2호기 가동중단
과전류로 발전 자동정지“경미한 고장”해명 예방정비를 마치고 지난 10일부터 발전 재개에 들어갔던 울진원자력발전소2호기(95만㎾급)가 신호상태 램프에 이상이 생겨 가동을 중단했다.

울진원전 쪽은 14일, 원자로 계측기 교정작업 중 신호상태 램프의 단락에 의한과전류가 생겨 13일 오후 2시14분께 발전이 자동정지됐다고 밝혔다.

원전 관계자는 “이번 사고는 국제원자력기구의 사고 등급 분류지침에 따라 잠정분류한 결과, 경미한 고장인 0등급에 해당된다”며 “신호상태 램프를 교체하고원인 분석이 끝나는 대로 발전을 재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편, 울진원전 2호기는 지난달 8일부터 34일간의 예방정비를 마친 뒤, 10일 오전9시40분부터 발전을 재개했다.

2004년 ‘의사-간호사 상호존중 선언식’
대한의사협회(회장 김재정)와 대한간호협회(회장 김의숙)는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의료현장에서의 긴밀한 협조가 필요한 의사와 간호사가 환자에게 최적의 의료를 제공하기 위해 서로 존중하고 협조하자는 차원에서 ‘의사-간호사 상호존중 선언식’을 개최했다.

또한 두 협회는 선언문에 담긴 내용을 실질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양 단체에서 선정한 6명의 위원들이 참가하는 ‘국민건강을 위한 의사 간호사 협력위원회’를 발족시켰다.

발족된 협력위원회는 앞으로 국민건강을 위한 다양한 사회활동을 공동 추진하고 의료현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간호사와 의사간의 갈들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중재와 해결에 나서게 된다.

이날 선언식을 계기로 양 단체는 의료현장에서의 긴밀한 협조와 국민건강을 해치는 각종 사회적 문제를 근절하기 위한 공동 활동을 벌여나갈 것을 다짐하는 시간이 되었다.

한편 치과계는 이미 ‘서로존중하기 캠페인’을 마련했으나 집행부의 경질로 현재는 특별한 진행상황이 없는 상태이다.

최근 D대사건과 관련해서 대한치과위생사협회 문경숙 회장은 성폭력 근절을 위한 범치과계 “성윤리위원회”를 구성하자는 제의를 요청한 바 있다.

2014년 육군 제28사단 윤 모 일병 선임병 구타 등으로 사망
육군 28사단 윤 모 일병 사망 수사 내용과 함께 가해자들의 가혹 행위가 공대돼 논란이 일고 있다. 지난 31일 군 인권센터는 기자회견을 통해 지난 4월 사망한 육군 28사단 포병연대 의무부대 소속 윤 모(24) 일병의 부대 내 상습 폭행 및 가혹행위에 대한 군 수사 내용을 공개했다.

앞서 지난 4월 27일 윤 일병은 내무반에서 냉동식품을 먹던 가운데 선임병들에게 가슴 등을 맞고 쓰러졌다. 윤 일병은 당시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음식들이 기도를 막아 산소 공급이 중단되며 뇌손상을 입고 다음날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군 인권센터가 확보한 수사기록에 따르면 윤 일병은 육군 28사단 부대로 전입온 3월 초부터
사고가 발생한 날까지 대답이 느리고 인상을 쓴다는 이유로 매일 선임병들의 구타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졌다. 선임병들은 폭행을 당해 다리를 절고 있는 윤 일병에게 다리를 절뚝거린다며 다시 폭행했으며, 힘들어하는 윤 일병에 링거 수액을 주사한 뒤 다음 원기가 돌아오면 다시 폭행을 가하는 등 상당히 잔혹하게 윤 일병을 괴롭힌 것으로 전해진다.

더불어 허벅지 멍을 지운다며 윤 일병의 성기에 안티푸라민을 발라 성적 수치심을 주기도 했으며 치약 한 통 먹이기, 잠 안 재우고 기마자세 서기 등의 가혹행위를 빈번히 자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드러누운 얼굴에 1.5ℓ 물을 들이붓고 개 흉내를 내게 하며 바닥에 뱉은 가래침까지 핥아먹게 했다는 사실이 전해졌다.특히 28사단 간부 유 모 하사(23)는 윤 일병에게 폭행을 가하는 것을 묵인하는 것도 모자라 폭행에 직접 가담한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자아냈다..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은 "상습적 폭행, 사고 직후 폭행사실을 감추자고 입을 맞추는 등 조직적인 증거인멸, 의식을 잃은 윤 일병에게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던 정황 등으로 봐서 가해자들의 공소장을 상해치사가 아닌 살인죄로 변경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뒤이어 "전화통화 결과 사단장과 군당장 등이 윤 일병 사건을 잘 파악하고 있지 못한 사실을 확인했다.

군 수사 당국이 사건을 축소한다는 의혹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소장 변경 및 사건의 진상을
더욱 철저하게 조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30일 군 수사당국은 윤 일병에게 상습 구타를 가했던 28사단 이모 병장(25) 등 병사 4명(상해치사)과 가혹행위 등을 묵인했던 유모 하사 등 5명을 구속 기소했다.


독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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