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오늘의 역사 3월 27일

in zzan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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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조선 선조25)년 이순신 장군 거북선 진수
거북선은 임진왜란 직전에 이순신 장군의 고안으로 건조된 전선이다. 1591년(선조 24년) 정읍현감 이순신은 전라좌수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하여 왜적의 침입에 대비해 거북선을 만들 것을 결심한다. 난중일기(亂中日記)에 따르면 거북선의 진수식을 가진 날은 임진년(壬辰年:1592) 3월 27일이며, 처음 해전에 참가한 것은 장계(狀啓)에서 “5월 29일 사천해전(泗川海戰)”이라 하였다.

현재 전해오는 문헌 중 '거북선'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타나는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에는 1413년(태종 13년) 5월 초에 "거북선이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고 하였고, 2년 후에는 다시 "거북선이 매우 견고하여 적선이 해치지 못한다"고 되어 있으나 어떤 형태와 규모였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적혀 있지 않다. 대부분의 거북선에 대한 기록은 일반적인 외부 형태와 전투력에 관해서만 기록하고 있어서 실제 건조에 필요한 세부적인 수치에 대한 기록은 없다.

따라서 태종 때의 거북선과 "난중일기"에 드러난 거북선과의 관계도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때 거북선은 이순신의 고안에 의해 군관 나대용(羅大用) 등이 실제로 건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거북선은 신라시대의 조선기술, 뱃전에 창칼을 꽂아 적의 접근을 막았던 고려시대의 검선(劍船), 고려시대에 발달한 화포기술, 조선시대에 개발된 전투선인 판옥선(板屋船) 등의 기술이 종합되어 창조된 것이다. 충무공의 거북선 180년 전에 이미 거북선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순신은 이전의 거북선에다 새로운 기술을 가미하여 거북선을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1812년 홍경래의 난 진압
19세기 첫 임금인 순조(純祖, 재위 1800~1834) 이후로 왕권은 급격히 약화되고, 노론 명문가의 세도가들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들이 정치를 농단하고 매관매직을 일삼으면서 나라의 기강은 흐트러지고, 삼정의 문란에 따른 피해와 고통은 고스란히 농민에게 전가되었다. 특히 뇌물로 자리를 산 향리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농민들을 수탈했다.

1800년, 홍경래는 가산에서 역시 풍수인 태천 출신의 우군칙을 만났다. 양반의 서자로 알려진 우군칙은 경서와 병서에 밝은 지식인으로, 홍경래와 함께 시국을 논하다가 봉기를 도모하였다. 오랜 준비 기간을 거친 이들은 순조 11년인 1811년 12월 18일, 다복동에서 김창시가 다음과 같은 격문을 공표한 것을 시작으로 1,000여 명의 군사를 일으켰다.

이때 남진군 내부에서 분란이 일어났다. 서로 티격태격하다가 홍경래는 이마에 부상을 입었고, 이들은 죽임을 당했다. 홍경래는 전열을 다시 갖추기 위해 다복동으로 회군했고, 북진군도 보조를 맞추기 위해 진격 속도를 늦췄다. 봉기군의 자체 내분으로 관군이 시간을 벌 수 있었던 셈이다.

홍경래는 다시 남진군을 이끌고 안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박천의 송림리에 주둔했다. 봉기군과 관군이 처음 싸운 것은 29일 송림 전투에서였다. 봉기군은 대패하였다. 봉기군은 수백 명이 죽고, 30여 명이 생포됐다. 홍경래는 남은 군사를 이끌고 급히 정주성으로 퇴각했고, 관군에게 밀려 곽산으로 후퇴했다. 그러자 관군도 곽산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시켰으며, 1월 10일 사송야(四松野) 전투에서 봉기군을 크게 무찔렀다.

4월이 되자 관군은 화약으로 성벽을 폭파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관군은 봉기군은 성의 북장대 쪽으로 몰래 땅굴을 파 들어갔다. 그리고 19일 새벽, 관군은 마침내 땅 밑에 설치한 1,800근의 화약을 터뜨려 정주성을 무너뜨린 뒤, 성 안으로 몰려 들어가 봉기군을 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홍경래는 총탄에 맞아 전사했고, 홍총각 등은 사로잡혔으며, 우군칙과 이희저는 달아났다가 이튿날 체포됐다. 당시 정주성에 있다가 체포된 사람은 모두 2,983명으로, 이 가운데 10세 이하 소년 224명과 여자 842명을 뺀 1,917명이 모두 참수됐다. 이렇게 홍경래의 난은 마무리됐다.

1922년 조선여자기독청년회(YWCA) 발기대회
사회복음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사회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여성문제에 커다란 관심을 보였다. 조선YWCA연합회는 여성문제에 관한 모든 부문에 관심으로 가졌지만, 그 가운데서도 여성의 의식개혁과 교육에 비중을 두었다. 그리하여 각 지부를 중심으로 야학 또는 강습소를 운영하였으며, 각종 강연회를 통하여 기독신앙에 의한 여성의 의식개혁에 앞장섰다.

1920년대에 이르러서는 여성의 지위향상과 여성들에 의한 문화운동, 신앙활동이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평양여자기독청년회, 대구여자기독교청년회 등 전국 각처에서 생겨난 여자기독교청년회들이 그러한 현실요청의 반영이었다. 1922년 3월 27일김필례, 김활란, 유각경 등 남녀유지 30여명 중심이 되어 발기대회가 개최되었으며 동년 1922년 6월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 연합회 기성회가 발족되었다. 1923년 8월 정식으로 조선YWCA연합회가 창설되었다.

1924년 세계 YWCA에 정식으로 가입하였고, 지방 지부 및 학교지부를 결성해 조직을 확대했다. 초기에는 강연회와 성서 공부, 야학 운영 등 여성 교육활동에 집중하였으며, 점차 문맹퇴치 운동, 국산품 장려운동이나 금주, 금연 운동, 공창폐지 운동, 조혼 폐지운동 등으로 확장되었다.

조선YWCA연합회는 남녀평등과 여성의 기본권, 사회적으로 불평등한 관습의 인식타파 등을 내세웠다. 당시에도 물론 교회를 중심으로한 여성의 선교회나 전도회가 있었지만, 여성들의 사회적 활동의 장을 폭넓게 제공했다는 점에서 조선YWCA연합회의 역할과 사회적 의의는 평가될만 하다. 조선YWCA연합회는 1920년대 기독교여성운동의 새로운 장을 열면서 구심체로서 기능하였다.

1954년이승만 대통령 ‘한글 간소화’ 특별담화
이승만 대통령이 “3개월 이내에 현행 한글 맞춤법을 버리고 한말 성경 맞춤법으로 돌아가라”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읽기에 힘이 들고 쓰기에 복잡하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이 대통령 개인의 불편함이 더 크게 작용했다. 1912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수십년간 변화해 온 한글을 제대로 접하지 않다가 광복 후 본격 사용하기 시작한 한글표기가 불편했던 것.

일반 국민들의 불편함을 내세워 이 대통령의 취지에 찬동하는 학자도 일부 있었지만 반대 여론이 더 많았다. 현재의 맞춤법이 복잡하다해도 한말 성경에 사용된 맞춤법도 문제 있기는 마찬가지여서 해결책이 될 수 없고 또 3개월로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한글 간소화 주장은 1949년 10월 이 대통령의 담화로까지 거슬러올라가지만 6·25가 논쟁을 가로막았다. 논쟁이 다시 고개를 든 것은 1953년 4월, 국무회의에서 정부 문서와 교과서 만이라도 옛 맞춤법을 사용할 것을 일방적으로 결의하면서였다.

문교부까지 나서 반대해도 이 대통령이 뜻을 굽히지 않자 편수국장 최현배와 문교장관 김법린이 사임하며 반발한다. 이런 상황에서 특별담화가 발표됐고, 7월 3일에는 ‘앉았다’를 ‘안잣다’로, ‘좋지않다’를 ‘조치안다’로 표기하는 한글간소화 시안까지 발표됐다. 하지만 학자들은 물론 국회까지 나서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자 결국 이 대통령이 1955년 9월 19일 한글간소화 추진 입장을 철회함으로써 7년에 걸친 한글간소화 파동이 일단락됐다.

1971년 미 제7사단 남한주둔 23년10개월만에 철수
주한 미 제7사단이 약 24년간의 한국 주둔을 끝내고 본국으로 철수했다.당시 미국은 베트남전쟁에 50만 명이 넘는 많은 병력과 막대 전비를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황은 날로 악화돼 고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제37대 대통령 닉슨은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이를 신호탄으로 베트남을 비롯한 해외 미 주둔군의 철수가 시작돼 71년 봄까지 베트남에 파병된 미군 50만 명 중 30만 명을 감축했고, 필리핀 6000명, 태국 1만2000명과 함께 주한미군 2만 명도 71년 여름까지 철수를 단행키로 결정하게 된다.

결국 한미 양국은 10차에 걸친 협상을 통해 이견을 해소하고 71년 2월 6일, 공동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주한미군 감축 문제를 매듭지었다. 이로써 주한미군의 중추인 제7사단의 철수가 현실화됐던 것이다.미 제7사단은 8·15 광복 직후인 9월 8일 한반도에 진주해 38선 이남에서 일본군 무장 해제 임무를 수행 했고 한국 정부 수립과 국군 창설을 도운 뒤 48년 일본으로 철수 했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하자 그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선봉부대로 참전함으로써 또다시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됐다.

인천상륙작전에 이어 9·28 서울 수복을 주도한 미 제7사단은 북진을 계속해 그해 11월 한만 국경인 혜산진 까지 진격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했고 이어 화천·김화·철원 등지의 격전을 통해 많은 피해를 감내하면서도 전선을 사수하는 혁혁한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자유 수호의 선봉 부대로 한반도에 주둔했던 미 제7사단이 떠난 자리를 미 제2사단이 동두천 지역으로 이동했고, 미2사단이 담당했던 지역은 71년 3월 10일부터 한국군 제1사단이 인수했다.

미 제7사단의 철수로 주한미군은 18년 만에 판문점을 제외한 모든 휴전선에서 제2선으로 물러나고 국군이 155마일 휴전선의 방위를 전담하는 새로운 체제로 전환됐다. 또 한국군 단독 방위체제로 전환된 휴전선은 국군의 전술 개념에 따라 기동 방어에서 고수 방어로 전환 됐고, 철책선을 연해 각종 진지와 장애물을 보강하고 경계를 강화함으로써 종전에 비해 더욱더 강력한 방어 태세를 갖추게 됐다.

1976년 금강유역 대청댐 공사 착공
대전과 청주지역으로 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도수로와 시설용량 9만㎾의 수력발전소가 있는 이 댐은 1975년 3월에 공사를 착수해 5년 9개월의 공사 끝에 1980년에 완공했다.

우리나라 3번째로 큰 댐!! 대청다목적댐은 높이 72m, 길이 495m, 체적 123만 4,000㎥의 콘크리트 중력식댐과 석괴식댐으로 구성된 복합형 댐이다. 금강 하구로부터 150㎞ 상류지점인 대전시 동북쪽 16㎞, 청주시 남쪽 16㎞의 대전시와 충청북도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대전광역시 대덕구 미호동에 위치한 대청댐은 금강 본류를 끼고 있으며, 유역면적은 4,134㎢이며 총사업비는 약 1,557억원을 소요하여 1975년~1981년까지 약 6년 동안 건설하였다.계획홍수위는 EL.80m, 상시만수위는 76.5m, 저수위는 EL.60m이다.

하류지역의 홍수피해를 경감시키는 한편 하류지역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경제성장과 인구증가로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대전, 청주, 전주, 군산 등 충청, 호남 지역에 생활용수와 공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연간 2억4,000만㎾의 전기를 생산하여 중부지역에 공해없는 깨끗한 에너지를 공급함으로써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대청댐의 주요시설로는 저수용량 14억 9,000만㎥의 본댐과 조정지댐이 있으며, 본댐 주변에는 저수지의 물이 다른 지역으로 넘치지 않게 해주는 3개의 보조댐이 있다.

금강은 우리나라 중부 내륙에서 서해로 흐르는 유로연장 401㎞, 유역면적이 전 국토면적의 약 10%에 해당하는 9,886㎢에 이르고 있다. 이댐의 건설로 충남.북을 포함한 2개도, 4군 2읍 11면에 걸쳐 대청호가 조성됨에 따라 홍수피해를 크게 절감하였다고 한다. 대청호는 청주지구, 금강하류지구, 만경강지구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으며 대전, 청주, 공주, 부여, 논산, 장항, 군산, 전주, 익산 등에 생활용수 및 공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1982년 프로야구 시작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MBC 청룡-삼성 라이온즈의 개막전 열렸다.
프로야구 원년 시즌. 팀당 80경기씩 240경기가 열렸다. 전두환당시 대통령의 시구와 함께 시작된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첫 선발은 이길환, 첫 타자는 천보성이었으며, 제1구를 친 것이 내야플라이로 아웃된 것이 역사적인 첫 개막전의 첫 승부였다. 첫 안타와 타점은 삼성의 이만수가, 첫 홈런도 이만수가 기록했다. 이 경기에서 MBC의 이종도가 만루홈런을 기록하며 MBC가 첫 승을 기록했고 첫 승리투수는 유종겸이었다.

원년답게 풍성한 기록들이 쏟아졌는데 OB의 박철순이 22연승을 거두고, MBC의 백인천이 4할 타율을 기록했으며, 해태의 김성한은 투타를 겸업하며 3할 타율에 13홈런, 10승을 기록[2]하는 등의 진기록이 세워졌다

1987년 한강 종합개발 착공
한강의 하천공간을 종합적이고 다목적으로 이용·개발하기 위한 사업으로 1982년 9월에 착공하여 1986년 9월 준공되었다.

​총사업비 9560억 원이 투입되었는데, 크게 치수(治水)기능 확대, 휴식공간 확보, 올림픽대로 건설(강변도로 확장), 분류하수관로(分類下水管路)와 하수처리장 건설, 유람선과 수상 레저·스포츠시설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탄천 등 4대 지류에 하수종말처리장을, 강 양쪽에 생활하수를 집거하는 하수관로를 설치해 오수와 폐수에 찌든 한강을 되살리기로 했다. 이에따라 강남쪽 2∼4차선 강변도로가 6∼8차선의 고속도로로 확장, 신설되며 이 고속도로와 고수부지사이에 81·8km(폭3m)의 자전거전용도로, 고수부지와 초지(초지)에 40·2km의 산책로가 조성된다.

이와함께 잠실올림픽촌길목인 탄천을 비롯해 청계·중랑, 안양천, 난지도 등 4대 지류에 하수종말처리장(하루 처리능력 4백10만t)이, 강 양쪽에 생활하수와 공장폐수를 모으는 1백45km의 하수차집관이 건설된다.

또 고수부지와 강변도로사이에 26km, 체육공원·유원지에 55·8km등 모두 8l·8km(폭3m)의 자전거 전용도로를 건설한다. 선착장은 마포·광나루 등 옛나루터 11곳에 만든다. 저수로 뱃길이 완공되면 유람선은 한강교각 사이를 빠져 다닐 수 있도록 50∼1백t급으로 만들어지고 잠수교도 유람선 운행스케줄에 맞춰 교판들 들어올리게 된다.

1990년 대한항공 여객기 정기항공편 최초로 모스크바 기착
정기 항공 여객기로는 모스크바에 첫 기착할 대한항공기가 27일 하오8시40분 김포공항을 출발했다. 이 여객기는 동해 상공-니이가타 북부 상공-하바로프스크 상공-시베리아 상공의 루트를 10시간 35분간 운항,28일 새벽 2시15분(현지시간) 모스크바의 쉐레멘찌에브 국제공항에 착륙,급유를 받고 새벽 3시40분 모스크바를 출발,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취리히까지 운항할 예정이다.

앞으로 매주 화요일 같은시간에 서울을 출발하는 이 KE903편은 모스크바행 승객은 태우지 않고 모스크바에서 급유와 간단한 정비,승무원 교대등만을 하는 소위 기술착륙을 하게되며 모스크바행 승객을 태우고 가는 정식 취항기는 오는 31일하오8시40분 서울을 출발할 예정이다.

대한항공은 유럽노선 항공기들의 시베리아 루트 운항으로 기존 앵커리지 경유노선에 비해 비행거리가 약 3천6백㎞ 가량 단축되고 비행시간은 3시간30분-4시간30분 가량 줄어드는 효과를 얻게된다. 대한항공측은 모스크바 노선에 4백10석 규모의 B747 점보기를 투입하는데 아직 소련과의 교류가 본궤도에 진입한 단계가 아니어서 당분간 항공기 좌석은 상당히 비워둔채 운행하게 될 것으로 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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