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오늘의 역사 3월 26

in zzan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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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9(고려 충렬왕5)년 도평의사사 설립
도당(都堂)이라고도 한다. 기원은 성종초에 설치한 도병마사(都兵馬使)이다. 989년(성종 8) 거란과의 전쟁을 겪으며 양계의 병마사를 중앙에서 통제하기 위해, 문하시중·중서령·상서령을 병마판사(兵馬判事)로 임명했다. 2년 후 중추원이 설치되자 추신(樞臣)은 사(使)가 되고 그 밑에 부사(副使)·판관(判官) 등이 마련되어 도병마사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중기 이후 차츰 진휼 등 중대사를 의논하기 시작하여 무신란 이후인 1255년(고종 42) 도병마사는 도당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며, 각종 국사를 처리하는 중심기구가 되었다.

이런 추세를 수용하여 1279년(충렬왕 5) 도병마사를 도평의사사로 개칭했다. 〈역옹패설〉에 의하면 이때부터 도당이 상설기구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도당의 역할은 토지제도·조세·녹봉·화폐·형옥·의례·인사·군사·사대문구·진공·대외관계 등을 의결하고 법률을 공포하는 최고 행정기구로 발전했다.

고려말에는 도당을 중심으로 한 대신들의 집정체제가 강화되어 6부와 백사(百司)의 행정체계가 문란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1278년(충렬왕 4) 재추가 많아 필도치(必闍赤)를 별도로 구성하여 궁중에서 사무를 처리하게 했다. 이를 별청재추(別廳宰樞) 또는 내상(內相)이라고도 하는데, 고려말까지 존속하여 소수가 정권을 장악하는 역할을 했다. 창왕 이후 개혁파 사류가 집권하여 도당의 직제와 운영을 개혁하는 시도를 했는데 먼저 재상의 수효를 줄이고 상의를 제외했다.

6색장은 6방녹사(六房錄事)로 고치고 지인(知印)과 선차(宣差) 10명을 두었다. 또 검상조례사(檢詳條例司)를 두어 검상 2명, 녹사 3명, 도평의녹사 6명을 두었다. 그러나 1400년(정종 2)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바꾸었으며, 1401년(태종 1) 문하부를 통합하여 국정을 총괄하게 함으로써 도평의사사는 폐지되었다.

1910년 안중근 의사 순국
단지혈서로 조국 독립에 헌신한 안중근 의사가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909년 동지 11명과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손가락을 끊어 맹세한 안중근 의사는 그 해 10월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가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Kokovtsev, V. N., 1853~1943)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를 사살하기로 결심한다.

동지 우덕순과 상의, 승낙을 얻은 안 의사는 다시 이강의 후원을 받아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행동에 나섰다. 1909년 10월 26일 일본인으로 가장, 하얼빈역에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를 사살하고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森泰二郞), 만철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田中淸太郞)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됐다.

안 의사가 살해한 일본인 곧 초대 통감 이토는, 비록 그 자리에서 막 물러나기는 했지만 한반도의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였다. 의거 후 곧 일본 관헌에게 넘겨진 안 의사는 여순의 일본 감옥에 수감됐고 1910년 2월 14일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어, 이날 사형이 집행됐다.

1916년 원불교 창설
원불교는 그 연원을 불법에 두고 있으며, 시대에 맞는 새로운 불교이다. 그러나 외면상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차이는 신앙 대상의 상징이 다르며, 불교와의 역사적 교섭관계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교단의 운영방식과 제도면에서도 종래의 사찰제도와는 다르게 운영되고 있다.

즉 근본적 진리는 서로 상통하나, 교단은 기존 불교의 분파적 입장이 아니다. 창조·모방·개혁을 시도하는 새로운 교단으로 볼 수 있다. 소태산은 불법을 주체로 삼아 새 종교를 주창하였는데, 그가 깨달은 일원상의 진리, 즉 법신불(法身佛)사상을 주체로 하고, 모든 종교의 장점을 취하여 시대화·생활화·대중화의 개혁을 시도한 것이다.

시대화란 어느 시대에 처하든지 불법을 그 시대에 맞게 구현하자는 것을 말한다. 시대적 변화에 잘 동화하면서도 높은 차원으로 사람들을 지도해나갈 수 있도록 불법을 응용하자는 뜻이다. 생활화란 생활 속에서 불법(佛法)을 찾고 깨달아서 그 불법으로 새 생활을 개척해 나가자는 것이다.

대중화란 민중화, 서민화 또는 시민화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특수한 계층을 위한 불교가 아니라 누구나 다 같이 보람을 찾을 수 있도록 국한 없이 불법을 구현하자는 것이다. 원불교는 정신개벽(精神開闢)을 표방하고 있다. 다른 기성종교와는 달리 우리 나라에서 발생된 종교로서 후천개벽의 이념과 그 맥(脈)을 같이하고 있다.

1969년 가톨릭의대 우리나라 최초로 콩팥이식수술 성공
「가톨릭」의대부속병원 의료진은 25일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신장 (신장-콩팥) 이식수술을 시도, 59살난 어머니의 통팥하나를 33살난 아들에게 이식했다. 이수술의 성공여부는 2∼3주일뒤와 3개월위의 두차례의 고비를 넘겨야만 가름난다. 「가톨릭」의대부속병원 욋과 이용각교수가 집도하고 임수길 (비뇨기 과장) 민병석 (냇과) 전운혁 (마취과장) 박용휘 (X선과장) 이종무 (임상병리주임) 김신걸 (인공신장담당)교수등 40명의 의료진이 참여한 이 대수술은 25일 하오6시 모자의 마취에서 비롯되어 하오9시38분에 끝났는데 혈액만 4천CC가 들었다.

외국에선 이미 2천명이나 실시됐고 4년이상 생존자마저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시도를 보지못한 신장이식을위해 누가 멀쩡한 신장을 주느냐는 문제는 둘째치고 여러조건이 맞아야 성공 된다는 담당의들의 신중으로 우리나라에선 아직 이식수술을 해보지못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내 신장을 잘라 옮겨서 살려달라』고 졸라대는데 용기를 얻어 이식수술을 하기로 결정했던것. 환자의 왼쪽신장을 떼어낸다음 2개있는 신장중 어머니의왼쪽 신장을 떼내 환자오른쪽 장골동정맥에 연결시키고 요관은 방광에 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2∼3주일뒤와 3개월뒤에 오는 딴사람의 장기에대한 거부반응을 눌러 이겨서 완전히 살아나야만 일단은 성공했다고 보게된다.

1977년 경기도 용인에 한국민속촌 박물관 개관
1970년대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한 서구 문화의 유입 속에 우리의 민족문화유산이 급격히 사라져가는 것을 막고, 나아가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한 정부의 관광사업 진흥을 위해 1972년 한국민속촌건립자문위원회가 구성되었다. 1973년 민자 유치를 통한 한국민속촌 조성 사업계획이 승인되면서 1973년 8월 5일 착공, 1974년 10월 3일 개관하였다. 당시 총 사업비 14억 1,200만 원을 들여 약 66만m²에 전통 가옥 30여 채를 이전 복원하였다.

1996년 한국민속촌박물관과 전통민속관을 건립하였으며, 2001년에는 전 세계 16개국의 민속자료를 수집, 세계민속관을 건립하였다. 2002년 한국의 현대문화예술을 관람할 수 있는 미술관과 조각공원을 조성하였으며, 2004년 역사 드라마와 영화를 종합적으로 전시한 사극영상관을, 이어서 2005년에는 옹기생활관을 건립, 테마전시관을 통한 다양한 관람시설을 개발하였다.

흥겨운 체험과 풍류로 가득한 전통문화테마파크인 한국민속촌은 현재 기와집 132개동, 초가집 143개동이 있고 2만 1,150여 점의 민속유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국제박물관협회(ICOM)에 등록된 세계 4대 야외박물관으로서 발전, 성장하고 있다.

민속촌의 조선시대 마을은 각 지방에서 옮겨오거나 복원한 실물가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철저한 고증과 자문을 거쳐 사계절에 따른 생활문화를 재현하고 있고, 민속박물관에는 사농공상의 계층별 의식주 용품과 민구가 전시되어 있으며, 조선시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풍습과 생활양식을 재현해 놓고 있다.

전통혼례와 농악놀이가 행해지며, 전국민속연날리기대회, 전국민속놀이경진대회, 전국민속그네뛰기 및 널뛰기대회 등의 민속행사도 열린다. 또한, 종합관광휴양시설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야생화화원과 전래수목원 등을 개발하고, 전통방식을 계승한 생활 공예, 절기별 세시풍속 등 잊혀져가는 문화유산의 가치를 이어오고 있다.

1991년 기초의회 의원선거 30년만에 부활
전국 1만 3185개 투표구에서 일제히 실시된 기초의회의원선거를 통해 ‘동네 일꾼’으로 뽑힌 임기 4년의 시‧군‧구 의회 의원들(전국 4천 302명)은, 이날 오전 10시를 전후해 소집된 각 의회 임시회에 참석해 임기 2년의 의장과 부의장 각 1명씩을 무기명 비밀투표로 선출함으로써 원(院)을 구성했다.
그러나 투표율55%로 당시로선 역대선거 가운데 가장 낮은 투표율을 기록했다.

1991년 개구리 소년 실종
대구에 사는 초등학생 5명이 도롱뇽 알을 주우러 나간다며 집을 나섰다가 실종된 후 11년6개월 만인 2002년 9월26일 유골로 발견된 사건이다. 화성 부녀자 연쇄 살인사건(1986년~1991년), 이형호군 유괴 살인사건(1991년)과 함께 3대 미제사건으로 불린다. 도롱뇽 알을 주우러 간다는 말이 개구리 잡으러 간다고 와전돼 초기에 널리 퍼지면서 '개구리소년 실종 사건'으로 굳어졌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특별지시를 내려 대구지방경찰청 차장을 본부장으로 수사본부를 구성해 와룡산 일대를 포함해 전국을 수색하도록 했다. 전국 새마을중앙회 등 각종 사회단체들은 700여만장의 전단을 전국에 뿌렸다. 한국담배인삼공사와 기업체들도 담뱃갑과 상품에 실종 어린이들 사진을 인쇄해 배포하는 등 수색 작업에 동참했다. 대통령의 특별지시, 현상금 4200만원, 단일 사건으로는 최대 규모인 연인원 35만명의 수사인력이 투입됐음에도 개구리소년들의 행방은 묘연했다.

이 날은 5.16 군사쿠데타 이후 중단됐던 지방자치제가 30년만에 부활해 시·군·구 기초의원을 뽑는 선거일로 임시공휴일이었다. 휴일 5명의 아이들이 와룡산에 오르기 전 인근 마을에 사는 학교 친구와 마을 주민들에게 목격된 것이 마지막이었다. 아이들이 실종되자 부모들은 생업을 포기한 채 전국을 헤맸다. 이후 개구리소년들을 주제로 한 노래가 제작되기도 했고, 전국 초등학생들이 '대구 개구리친구 찾기 운동'을 펼치는 등 이 사건은 국가적인 사건으로 떠올랐다.

이후 수많은 거짓 제보와 황당한 예언들이 잇따라 등장했다. 사건이 장기화되자 '외계인 납치설', '북한공작원 유괴설', '불치병 치료용 희생설' 등 온갖 낭설들이 나돌기도 했다. 1992년 8월 경찰은 한센병 환자들이 병을 고치기 위해 아이들을 유괴해 죽였다는 소문을 믿고 한센병 환자 정착촌을 강압적으로 수사해 한센병 환자들의 항의를 받기도했다.

2010년 오늘 서해 백령도 서남방 해상에서 천안함 침몰
오후 9시 20분쯤 서해 백령도 남쪽 해상에서 경비 활동 중이던 해군 제2함대사령부 소속 초계함 천안함(1200t급)이 폭발사고로 침몰했다.

합동참모본부 정보작전처장 이기식 해군준장에 따르면 함정의 선저(바닥)가 원인 미상으로 파공되어 침몰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해군 역사상 초계함급 이상 대형 전투함이 폭발로 침몰한 것은 처음이다. 침몰 직후 부터 다음 날인 27일 새벽까지 구조작업이 이루어졌으나 승조원 104명 중 58명만 구조되고 46명은 실종자로 확인됐다.

이후 함수와 함미가 분리되어 각각 해저에 가라앉은 천안함의 실종자 구조, 수색작업은 해군 해난구조대(SSU)잠수사와 해국특수전여단 수중폭발팀(UDT)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작업 10여일 만인 4월 3일 추가 생존자 없이 실종자 가족의 요청에 의해 중단됐다. 이 과정에서 UDT 소속의 한준호 준위가 3월 30일 함수 부분 탐색 도중 실신해 순직했으며 수색 작업에 참여했던 저인망 어선 금양 98호가 4월 2일 옹진군 대청도 인근해서 침몰했다.

이후 4월 4일 선체 인양 작업을 시작한 군은 4월 15일 함미를 인양하고 36명의 시신을 수습했으며 24일에는 함수를 인양했다.(그외 수색 및 인양 작업에서 4명의 시신을 추가로 수습했으며 이외 실종 6명의 시신은 결국 수습하지 못했다.) 천안함의 46용사 유가족은 4월 30일 오후 백령도 침몰해역에서 합동 해상위령제를 지냈다.

천안함의 폭발 원인은 내부의 원인미상 폭발과 외부의 고의폭발, 두가지가 제기됐지만 침몰 초기부터 5월 20일 민군합동조사단의 공식발표가 나올 때까지 논란이 계속됐다. 민군합동조사단의 발표에 따르면 천안함은 어뢰에 의한 수중 폭발로 발생한 충격파와 버블효과에 의해 절단, 침몰했고 폭발 위치는 가스터빈실, 무기체계는 북한의 고성능 폭약 250kg 규모의 어뢰인 것으로 전해졌다. 2010년 9월 13일 최종 ‘합동 조사결과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천안함은 해군 평택 2함대사령부 소속 PCC(Patrol Combat Corve tte)-772 초계함(哨戒艦)으로 만재 시 배수량이 1200t급이다. 1989년 취역했으며, 해상에서 적 습격에 대비하여 경계하는 군함이다. 1999년에 발생한 1차 연평해전 때 참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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