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오늘의 역사 3월 25일

in zzan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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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5년(조선 태조4년) 한양도성 수축공사 시작
궁궐과 종묘사직을 완성한 태조는 수도 방위를 위해 1396년 도성 축조를 착수했다.
평지는 토성, 산지는 석성으로쌓았고 2차에 걸친 대공사로 사대문과 사소문, 이를 잇는 성벽이 완성되었다. 총 59,500척(18.6km)에 이르는 도성을 쌓기 위해 전국에서 약 20만명의 백성을 동원하였다.

완성된 한양도성은 나라의 안정과 왕의 권위를 온 백성에게 보여주는 상징물이며,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성은 외부와 연결하기 위해 모두 8개의 성문을 설치하였다. 동서남북에 4개의 큰문이 있고 그 사이에는 4개의 작은 문이 있어 사람들의 통행로가 되었다.

그러나 한양도성 수축공사는 의외로 난공사였다. 무거운 돌을 다루는 공사 때문인지 사망자가 속출했다. 길지 않은 공기임에도 불구하고 사망자가 8백명을 넘었다. 수축 도감에서 계하기를, 각도의 군인 중 죽은 사람이 모두 8백 72명이라 하니, 그들이 사는 고을에 명하여, 호역(戶役)을 면제하고 부물(賻物)을 주게 하였다.

사대문은 사람이 갖추어야 할 유교의 덕목(인 의 예 지)을 담아 이름을 지었다. 도성에는 사람이 아닌 하천을 위한 문도 있었다. 흥인지문과 광희문 사이에 있었던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이다. 남산 정상의 성벽 부근에는 통신시설인 봉수대가 있었다. 햇불과 연기를 통해 전국 각지에서 보내온 신호들이 남산 봉수대를 거쳐 최종적으로 왕에게 보고되었다.

1422년 세종 때에는 32만명의 백서을 동원하여 무너진 곳을 보수하고 기존의 토성을 모두 석성으로 다시 쌓았다. 공사는 철저한 구간별 책임제로 실시하였는데 천자문 순서대로 전체를 97구간으로 나누고 각각 담담 군현을 정하여 축성과 함께 사후 보수까지 책임지게 하였다. 세종 4년 도성 수축 공사가 끝났다. 성은 모두 돌로 쌓았다.

1881년 이만손 등 만인소 상소
조선왕조는 왕조 국가이지만 조정의 시책이 잘못되었을 경우 유생들이 개별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자신들의 의견과 주장을 내세울 수 있었다.

유생들의 집단적인 상소는 16세기 전반까지는 성균관·4학유생(四學儒生)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러나 16세기 중엽 이후 지방 사족(士族)들의 세력 증대에 따라 유생 집단이 형성되면서 지방 유생들에 의해서도 주도되기 시작하였다.

지방 유생들의 집단 상소는 처음에는 수백 인이 연명하는 정도의 규모였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가면서 1000명대를 능가하는 규모로 더욱 커져갔다. 그리하여 18세기 말 이후에는 1만인 내외의 유생들이 연명한 대규모의 집단 상소도 간혹 나오게 되는데, 이를 일컬어 흔히 만인소라 하게 되었다.

안동·상주 등 영남의 유생들은 전통적인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을 주장하면서 조정의 개화 정책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이황(李滉)의 후손인 이만손(李晩孫)을 소두로 하는 만인소를 올려 조정의 개화 정책을 비난하고 그 추진자들을 규탄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영남만인소이다.

이어 일본의 간교함을 지적하면서 그들과의 결탁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간파하였다. 또한 미지의 미국을 끌어 들여 그들의 꼬임과 요구에 말려 감당하기 어려운 국면에 처하게 될 것임도 경고하였다. 그리고 러시아에 대해서는 쓸데없이 그들을 자극해 침범을 자초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황준헌이 주장한 외교 정책은 매우 위험한 것임을 지적해 비판하였다.

이처럼 영남만인소에서 구미 여러 나라와 일본의 야심을 논파하고 민족 정의로 부당성을 제시했기 때문에 황준헌의 외교 정책은 수용되지 못하였다. 이 중 1855년 장헌세자 추존 만인소와 1884년 의제개혁 반대 만인소의 원문이 각각 안동 도산서원과 경주 옥산서원에 보관되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으며, 2018년 '만인의 청원, 만인소'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UNESCO) 아시아태평양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1895년 을미개혁 추진
을미사변으로 다시 들어선 김홍집 내각이 아관파천으로 무너지기 직전인 1896년 2월 11일까지 추진한 일련의 개혁. 갑오개혁의 연장선상에 있다.

삼국 간섭 이후 일본이 약간 주춤하게 되고 개화파와 친러파(김홍집, 이완용)의 연합 내각이 등장하고, 왕후 민씨의 세력이 친러파와 결탁을 하여 일본 세력 제거를 시도하기도 한다. 이에 일본은 왕후 민씨를 시해하고 친일 성향이 강했던 조희연과 유길준이 참여하여 4차 김홍집 내각을 조직하고 을미개혁을 추진한다.

갑오개혁도 그렇지만 일본의 침략 행위인 을미사변으로 들어선 정권이 일본의 지원을 받아가며 시행한데다가 갑자기 시행한 단발령 때문에 안 그래도 안 좋았던 평판이 아예 바닥으로 떨어지게 된다. 결국 김홍집 내각이 아관파천으로 무너지면서 개혁은 모두 중단되고 만다.

또한 단발령을 강요했기 때문에 을미의병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으며 최익현의 "목을 자를지언정 머리칼을 자를 순 없다"라는 명언이 탄생한다.

1905년 이용익, 보성학교 설립 (고려대학)
탁지부 대신이었던 이용익이 고종으로부터 '보성(普成)'이라는 교명과 황실 문장인 이화문을 교표로 하사 받아 사립보성소학교와 보성전문학교(현고려대)를 먼저 개교하였고, 1906년 9월 사립보성중학교를 개교하였다. 참고로 보성 시리즈의 시작은 소학교/중학교/전문학교의 3개 학교였으나, 소학교는 사라졌고 중학교는 고등학교[9]가 된 뒤 중학교가 분리되었으며 전문학교는 소학교, 중학교와 재단이 분리된 뒤 아예 이름까지 갈렸다.

1908년,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는데 당시 황실군악대를 앞세워 수송동 교사 (현 조계사)에서 경희궁까지 졸업생, 교사들이 행진을 했다고 한다. 을사조약 이후 이용익 선생이 러시아로 망명하였고 그에 따라 보성학교는 손자인 이종호에게로 경영권이 넘어갔으나 그는 곧 항일인사로 지목되어 1909년 구금 당했다. 그 후 경영난에 빠진 보성학교를 천도교주인 손병희가 인수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학교 내부의 인쇄실인 보성사(普成社)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배포하였고 많은 학생들이 3.1운동에 참여하여 3.1운동의 선봉에 섰다. 그러나 민족대표 33인에 속해있던 교주 손병희와 교장 최린이 잡혀가 학교가 다시 경영난에 빠졌다. 그 이후에도 거듭된 경영난에 빠지다가 1940년 간송 전형필이 학교를 인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60년 4.19 혁명 때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는데 보성고를 포함한 다른 학교들과의 친목서클이 주도하여 서울시내 고등학교들 간 연합을 구축하고 시위에 참여했다고 한다. 보성의 파란만장한 역사는 학교법인이 자주 바뀐데서 알 수 있다. 일제의 탄압으로 계속된 경영난에 시달리던 보성은 보성학원-천도교 총본부-조선불교 중앙교무원-고계학원을 거쳐 현재 재단인 동성학원이 5번째 재단이다.

학교의 교사들은 흔히 보성학교가 선교사의 도움 없이 민족자본으로 세워진 한국 최초의 민립사학이라고 하는데, 이는 엄연히 틀린 말이다. 민족자본으로 세워진 최초의 사학은 양정고등학교로, 보성학교 개교 2년 전인 1904년에 세워졌다. 다만 같은 재단이었다가 분리된 보성전문학교는 최초의 민립대학이라고 할 수 있다. 보성중고등학교는 해당되지 않는다.

1907년 나철이 이끄는 5적 암살단이 을사5적을 습격함
일본은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에 대한 청의 간섭을 없앴다. 이어서 1904년 러일 전쟁에서 승기를 잡고, 미국과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체결하고, 영국과 제2차 영일 동맹을 맺어 두 나라로부터 대한 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러일 전쟁이 끝나고 러시아와 포츠머스 강화 조약을 맺어 대한 제국에 대한 권리를 보장받았다.

조선에 대한 서양 열강의 간섭까지 없앤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를 보내 일본군을 동원하여 궁궐을 포위하고,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늑약(제2차 한일 협약)에 서명하게 하였다(1905. 11.). 이 때 조약에 찬성하며 서명한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을 을사 5적이라고 한다.

이후 을사늑약에 반발하며 을사 5적과 일본 침략자 등을 처단하기 위한 활동이 전개되었다. 중국 하얼빈에서는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고(1909), 나철, 오기호 등은 자신회라는 5적 암살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이재명은 이완용을 살해하려 했지만, 실패하였다.

1989년 전민련 고문 문익환 목사 평양방문 김일성 면담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상임고문인 문익환 목사와 유원호, 재일작가 정경모가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같은 시기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대변인인 소설가 황석영도 평양에 도착했다.

4월 2일 문익환 목사 일행은 김일성 주석과 두 차례 회담을 가진 후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9개항에 이르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4월 13일 정부는 김포공항으로 귀환한 문익환 목사 일행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문익환 목사 일행은 평양공항에 도착한 후 발표한 성명에서, “일찍부터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만나 마음을 열고 민족의 장래를 기탄없이 이야기하고 싶은 희망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김일성과 회담 후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가진 공동성명에서 “7·4남북공동성명에서 확인된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에 기초해 통일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또한 한반도 분열의 지속 반대, 정치군사회담 추진과 이산가족문제 등 다방면의 교류와 접촉 실현, 공존 원칙에 입각한 연방제 방식의 통일지지, 팀 스피리트 합동군사연습이 남북대화 및 평화통일과 양립할 수 없음을 확인하고, 전민련이 제안한 범민족대회 소집을 지지하는 등 9개항을 발표했다.

문익환 목사 일행은 10일간의 방북 일정을 마친 뒤 일본을 거쳐 4월 13일 귀국했다. 정부는 이들이 귀국하자마자 사전 구속영장을 집행해 국가보안법상 지령수수, 잠입탈출, 회합통신, 찬양고무 등의 혐의로 구속·수감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공안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해 재야단체와 인사들에 대한 전면적인 수사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북한과 교류·접촉을 시도하던 리영희, 고은, 이재오, 이부영, 조성우 등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2007년 박태환 제12회 세계수영선수권대회 자유형 남자400m 우승
한국 수영의 간판 박태환 선수가 우리시간으로 25일 오후 호주 멜버른에서 열린 제12회 국제수영연맹 세계선수권대회 남자 자유형 400m 결승에서 우승했다.

한국 선수로는 세계선수권대회 출전 사상 최초로 메달을 따냈고, 특히 이날 기록한 3분44초30은 지난해 8월 범태평양대회에서 자신이 세운 3분45초72의 아시아신기록을 1초42 앞당긴 것이다.

박태환은 세계 최정상의 선수들과 겨뤄 금메달을 따냄으로써 내년 베이징올림픽에서의 우승 전망이 한층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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