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미원조전사 4-2 초기 작전계획, 모택동의 작전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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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지원군이 투입할 때는 “적극적인 방어로 진지전과 운동전을 서로 결합시키고 반격, 습격, 매복으로 적 유생역량을 섬멸하고 소모시킨다”는 작전방침을 채택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먼저 구성, 태천, 구장, 영원, 오노리 선에서 방어는 쉽고 공격이 어려운 유리한 방어진지를 구축, 적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전장 국면을 안정시킴으로써 시간을 획득해서 조선 인민군이 북쪽으로의 철수와 정비를 엄호하며 차후작전을 유리하게 창조할 조건을 만들려 했다. (등화, 홍학지, 해방이 1950년 10월 19일 12시에 각 부대장에게 하달하며, 팽덕회 사령원에게 보고한 전보)

중국군은 압록강을 도하한 다음 신속하게 진출했으나 유엔군보다 먼저 처음 생각했던 예정방어지역까지 도착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마침 유엔군은 여전히 중국군의 참전을 알지 못하고 분산한 채로 공격하고 있었다. 게다가 중간지역의 한국군 3개 사단의 진격상태가 돌출되어 있었고 그 양전선 사이에 80여 km의 간격이 열려 있었다.

이런 형세는 중국군이 과감한 기습공격을 통해 각개격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런 상황을 파악한 모택통은 즉각적인 공격작전으로 전환할 것을 지시했다. 10월 21일 지원군이 원래 정한 계획을 버리고 운동중에 유엔군을 타격하기로 한 것이다.

“현재 이 문제는 전기를 잘 포착하여, 며칠내에 전역계획을 세워 작전을 개시하는 것이지, 먼저 일정시기 방어를 한 후 다시 공격을 준비하는 때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20-21)

이어서 매우 구체적인 부대운용방안까지도 제시한다. 42군의 주력부대를 이용하여 맹산 이남으로 진출시켜 원산-평양선의 철도선을 차단하고 북쪽으로의 원조를 견제한 다음, 지원군의 3개 주력군을 집중하여 국군 6,7,8 개 사단을 타격한다는 것이다.

그 이후 국군과 유엔군의 진출이 빨라지면서 중국군은 신속하게 작전계획을 바꾼다. 이 과정에서 모택동은 매우 정확한 상황판단에 입각한 작전지침을 하달한다. 아마도 모택동이 그런 판단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한국군과 유엔군의 진출상황이 매우 자세하게 보도가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전쟁이 거의 끝나가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종군기자들이 거의 제한없이 국군과 유엔군의 진출상황을 보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당시의 신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국군과 유엔군의 작전보안 미흡으로 인해 모택동은 적시적인 상황판단에 입각한 작전지침을 실시간으로 하달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항미원조전사>에 따르면 1차 전역에서 모택동이 전보로 지침을 하달 한 것은 다음 세 번이다.

10월 21일 공세작전을 하라는 내용(20),

10월 23일 국군과 유엔군을 깊숙하게 유인하기 위해 희천, 온정, 구성 선 이남을 양보하고 절대 조기에 접촉하지 말라는 지시(22),

10월 24일 먼저 국군 제1,6,8 사단을 타격하고 다시 미-영군을 공격할 것을 준비하고, 깊은 산악지역까지 유인한 후 포위섬멸하라는 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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