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100] 어떤 사랑

in Wisdom Race 위즈덤 레이스4 years ago (edited)

박상영의 소설 <대도시의 사랑>에서 주인공 영은 에이즈를 에이즈라 부르지 않는다. 에이즈가 아닌 '카일리'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이건 나야. 또 다른 나. 앞으로도 나일 거고 죽을 때까지 나일 테니까. 그리고 오직 나만의 것이어야 하고. 나랑 만나고 싶으면 말이야. 그걸 알아둬야 해. 내가 나이며, 동시에 카일리라는 사실을 말이야.

'카일리' 라고 에이즈를 새롭게 명명하는 행위는 은유를 벗어나 질병을 질병으로 바라보려는 시도라고.

<푸른알약>은 에이즈 양성보균자 카키를 사랑하는 남자 페테르스의 이야기이다.

"프레드, 난 에이즈 환자예요."
절벽에서 떨어지는 아찔함.
"에이즈라고요?"
"양성이에요. 양성보균자요. 내 아들도요."

사랑에 빠진 상대가 에이즈 보균자라고 하면 어떤 생각이 들까?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에이즈라는 무시무시한 공포와 사회의 혐오를 감내하며 그 관계를 이어가고 싶을까? 온갖 극단적인 감정들이 주인공의 머리와 가슴속으로 마구 몰려들었지만 대범한 척 하며 그녀를 받아들인다. 사랑에 필요한 용기란 상대의 감정을 확신하지 못함에도 다가서는 것이나, 어떤 반대에도 굴하지 않는 것들 뿐인 줄만 알았는데 이런 막대한 용기도 있다. <대도시의 사랑>을 보면서도 생각한 거지만 이 세상에는 전 인류가 마치 짠듯이 무지하고 편협한 영역이 있다.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고, 굳이 들여다 보려고도 하지 않고, 떠도는 극단적인 말들만이 전부 인 냥 믿고 새된 눈으로 보는 그런. 에이즈가 그런 영역이 아닌가 싶다. 에이즈 보균자라고 하면 성적인 문란함을 의심하고 동성애를 의심하고 후기에 적힌 말처럼 섹스에 있어 불가촉 천민처럼 여겨진다. 주인공은 각오를 하고 연애를 하지만 두려움은 너무도 쉽게 그들을 덮친다. 관계를 하던 중 콘돔이 찢어진다 던가, 상처가 난 손으로 관계 후의 콘돔을 만진다든가 하는. 그럴 때마다 주인공과 여친인 카키는 사색이 되어 병원으로 달려간다. 괜찮은 건가요?

의사는 말한다

페테르스 씨가 에이즈에 걸릴 가능성은, 이 방을 나갔을 때 흰 코뿔소와 마주칠 가능성 쯤으로 보시면 되겠네요.

KakaoTalk_20220220_011747742_01.jpg

병에 대한 의심의 상징으로 주인공을 늘 쫓아다니던 흰 코뿔소가 사라지는 장면은 잔잔하지만 감동적이다. 그리고 멸종 위기의 흰 코뿔소도 아닌 이미 일 만년 전에 멸종된 매머드가 페테르스의 꿈에 나와 말한다.

아마 이 병은 자네한테 최악의 불운이자 최고의 행운이 될 거야. 가장 본질적인 것에 눈을 뜨게 해줄지도 모르지.

스스로를 온갖 위험을 안고 있는 질병 그 자체로 보던 카키도, 작은 문제에도 두려움부터 앞서던 페테르스도 질병에 대한 공포라는 고비를 함께 넘으며 그들의 사랑은 완성된다. 콘돔과 푸른 알약, 두 가지면 그들은 남들처럼 보통의 사랑을 지속할 수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의 실제 주인공 둘은 실제로 HIV 양성반응이 없는 건강한 딸까지 낳아서 잘 살고 있다. '내가 나이며, 동시에 카일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상대'를 만나는 이야기가 소설에만 가능한 줄 알았는데 현실에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악의 순간에도' 용기를 내고 힘을 다해 지속하는 사랑의 이야기는 비현실적이지만 위대하다.

Coin Marketplace

STEEM 0.04
TRX 0.33
JST 0.101
BTC 64135.15
ETH 1820.07
USDT 1.00
SBD 0.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