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100] 연기 그리고 안개

in Wisdom Race 위즈덤 레이스4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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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뿌연 연기를, 안개를 좋아하는 것은 가려진 시야 너머의 무언가를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대 초반에 시수업에서 이런 시를 썼었다.

잿빛 인생

짙고 낮게 깔린 안개
매캐한 자동차 매연의 회색 향취
어디론가 숨어버린 태양에
눈이 부시지 않는 하늘
무채색의 네가 흘리는,
투명한 눈물
무덤덤하게 혹은,
애타게 속삭여지는 나의 이름
슬픈 선을 그리며,
휘날리는 흰색 치마 자락
어쩌면 암실 속의 빛이 되어 버린
망쳐진 인화지 위로 멍한 나란 존재.
삶은 그렇게 흐릿하게,
빗물에 멍울진 글씨를
애써 읽어 가는 것처럼 계속된다.
그리고 나는 원한다.
너와 나를 구분 할 수 없을 정도의
아마득히 짙은 안개와
도저히 읽어 갈 수 없는
얼룩만이 남은 글씨를

예상할 수 있고 명백한 모습이 아닌 멍울져서 읽을 수 없는 글씨를 해독하는 것처럼 불확실성의 문턱에 늘 서고 싶었다. 그래서 안개와 연기의 심상은 늘 따라다녔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 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일어나서 무진을 빙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있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 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무진기행 中

무진의 안개도 다람살라의 안개도 사랑했다.

숨을 쉴 수 없다. 거리는 하얀 안개로 빼곡히 차 있어 아무 것도 분간할 수 없다. 구름 속에 갇혀있다면 이런 느낌이겠지. 길에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조차 모르겠다. 갑자기 눈물이 울컥 치솟았다. 안개가 날 숨겨준다면 울어도 될 거야. K는 안개 한 가운데서 우두커니 서서 눈물을 쏟아냈다. 슬픔은 그렇게 습관처럼 그의 옆에 있었지만 그는 한번도 울 수 없었다. 모든 것을 끝내기 전에는 울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매캐한 안개에 둘러싸여서 세상에 아무도 없는 것 같은 느낌이 그를 울렸다.
2017년 메모

허물어지고 비어있는 낡은 건물 사이로 얼기설기 꼬여있는 전선줄이 매우 위태롭다. 3층의 건물 아래서 보는 거리는 무지개빛 우산으로 가득 차있다. 비는 그칠 기색 없이 무서우리만큼 내린다. 안개라는 불투명한 장막이 삽시간에 몰려와 세계를 덮어버린다. 하얗다는 것이 이렇게 숨막히는 건 줄 몰랐다. 안개에 갇힌 나무는 흡사 수묵화 같다. 넋 놓고 보다 보면 옅게 휘갈겨진 묵은 하얀 종이에 스며들어 사라졌다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를 반복한다. 마을 전체를 뒤덮는 경적소리는 작은 마을이 감당하기엔 너무 잦고 시끄럽다. 이곳은 사람들이 머무르는 곳이 아닌 사람이 들고 나는 곳이다. 정착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잠시 멈추는 곳. 그것이 내가 지금 있는 작은 마을 맥그로드간즈다. 내가 이 곳에 온 이유는 누군가를 찾기 위해서이다.
2017년 메모

내 컴퓨터에는 온갖 쓰다만 글이 가득하다. 안개가 자욱한 다람살라의 3층 카페에 앉아 그 배경과 어울리는 미스터리물을 써보겠다 끄적이다 말았다. 다람살라의 안개는 너무 짙고 뿌얘 몽환적이고 아름답다기 보다는 숨이 막혔다. 생각하는 것과 실제 마주하는 것은 늘 이렇게 다르다.

존 버거의 스모크는 연기에 대한 짧은 단상과 그림을 담고 있다. 많은 경우 담배의 연기이다.

담배를 함께 피우며 우리는 세상에 대한 견해를 교환했다. 서로의 여행을 이야기했고, 계급투쟁에 대해 토론했다. 우리는 꿈을 교환했다. 우정을 나누었다.
스모크 中

친밀감을 형성하고 관계의 매개체가 되어주던 담배 연기는 흡연이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공표한 이후 사회악이 되었다. 연기는 담배 뿐 아니라 미세먼지, 매연까지 확장되어 지금 현대인에게는 부정적인 이미지이다. 하지만 또 어딘가에서 길을 잃은 자에게 연기는 사람이 있다는 구원의 신호이고 불을 피어 올리는 연기는 추운 몸을 녹이는 온기이고 희망이기도 하다. 시커멓게 이글거리는 연기 일러스트를 한참 들여다 보며 이제는 끊은 담배가 피고 싶어졌다. 하얀 안개에 갇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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