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100] 아무튼, 방콕
여행 에세이를 읽는다는 건 남의 여행을 대놓고 엿보는 게 아닐까 싶다. 별 것 아닌 사건들을 엮어내어 내 얘기 같지만 한끗이 다른, 그 끝에 뭉클한 감정이 밀려들게 하는 글이 좋다. 소설가인 작가의 애인과 방콕 여행을 담은 이 책은 가볍지만 또 마냥 가볍지는 않은 위의 요건이 충족된다.
나는 내가 애초에 순순히 500밧을 약속했더라면 노인의 졸음운전을 목격하고 기함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노인은 호갱을 물어 기분이 좋았을 것이고, 우리에게 립서비스를 한답시고 어디서 왔느냐, 무슨 일로 왔느냐, 태국은 몇 번째냐, 태국 음식은 먹어봤느냐, 하면서 자꾸 말을 걸었을 것이며, 그렇게 시답지도 않은 대화를 이어나가 보면 어느새 잠이 달아 났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잠시 후 캐리어를 꺼내주겠다며 차에서 내린 노인을 똑바로 마주하니, 내 생각이 너무 순진했구나 싶어서 면구스러워진다. 나무 껍질 같은 주름으로 뒤덮인 얼굴과 무거운 것을 짊어진 듯한 구부정한 자세는 노인의 고단함이라는 게 고작 몇 푼으로 무마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는 것을 일러준다. 그러니까 이건 오랜 세월 성실하게 쌓아 올린 견고하고 육중한 철옹성 같은 피곤이다. 노인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내게 감사를 표하고, 나는 갑자기 내 여독이 좀 부끄럽고 겸연쩍어서 적당히 고개를 숙인다.
하지만 전투적으로 관광에 매달린 두 번의 여행에서 우리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건 휘황찬란한 자태를 자랑하는 왓 프라깨우나 끝없는 미로 같은 짜뚜짝 시장이나 2500여년의 전통과 역사가 살아 숨 쉬는 타이 마사지나 이국적이고 오묘한 맛이 나는 타이 푸드 같은 게 아니었다. 그보다는 호텔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호텔에서 보낸 시간, 호텔에서 잠시 쉬면서 느꼈던 여유와 충만.
우리는 한 번씩 양보하면서 찾은 중립지대 쪽으로, 둘 다 진정으로 원하는 곳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정으로 원치 않는 곳도 아닌, 저기 저 이름 모를 식당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호텔을 예약하고, 호텔 수영장을 즐기고, 마사지를 받고, 야시장에서 음식을 싸와서 먹는 사소한 이야기들을 조곤조곤 들으니 나도 모르게 ‘나도 나도 그랬는데’ 내 지난 방콕 여행을 복기하며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나는 잠시 숨을 멈추고 애인의 얼굴을 천천히 눈에 담는다.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있고, 피부는 푸석푸석하고, 눈가에는 눈곱이, 입가에는 음식 양념이 묻어있지만, 그러니까 이보자 더 꾀죄죄할 수가 없고 이보다 더 생활적일 수가 없지만, 바로 이 장면을 만나려고 내가 방콕에 온게 아닐까 싶다. 나는 환한 빛이 마음 한쪽을 간질이는 것 같은 지금 이 순간을 아주 오래도록 기억하리라 예감하면서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든다.
애인의 말마따나 방콕은 그 모든 차이와 균열의 순간들로부터, 그 모든 지루하고 멸렬한 순간들로부터 가장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무엇이다. 우리가 함께 좋아하고 설레고 열광하고 즐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무엇이다. ‘거의 유일’하다고 말하는 섣부름과 과장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무엇이고, 거의 유일하기에 더없이 소중하고 값지게 느껴지는 무엇이며, 그러하기에 오랫동안 최선을 다해 가꿔나가고 싶은 무엇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우리가 매년 방콕을 찾는 게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단합대회 겸 포상휴가 같다는 생각을 한다. 방콕을 여행함으로써 우리는 우리만의 과거를 추억하고 우리만의 현재를 점검하고 우리만의 내일을 약속하려는 게 아닐까. 그동안 우리가 서로를 위해 알게 모르게 애써온 모든 것을 치하하고, 이제껏 잘 지내온 것처럼 앞으로도 잘 지내보자고 서로를 격려하고 응원하는 게 아닐까. 우리가 우리이기를 포기하지 않도록, 우리가 계속 우리일 수 있도록 온기를 불어넣고 활기를 북돋는 게 아닐싸. 방콕을 찾는 건 우리에게 그런 의미가 아닐까.
우리는 과연 언제까지 함께 방콕을 찾게 될 것인가(중략) 아마도 우리는 우리일 수 있을 때 까지 방콕을 찾지 않을까. 우리는 우리이고 싶을 때 까지 방콕을 좋아하지 않을까. 만약 우리가 더는 방콕을 찾지 않는다면, 더는 방콕을 찾지 않기로 동의한다면, 그건 우리가 더는 우리가 아니라는 뜻이 아닐까. 그때의 우리는 지금의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지 않을까. 나는 우리가 오래오래 방콕을 좋아하면 좋겠다. 내년에도, 후년에도, 5년 뒤에도, 10년 뒤에도 서로를 잃어버릴까 봐 두 손을 꼭 붙잡아야 하는 그런 나이가 되더라도 함께 방목을 여행하면 좋겠다. 그리고 애인도 나와 같은 마음이면 좋겠다.
마지막 에피소드를 읽고는 이 책이 여행기를 가장한 연애 편지라는 걸 깨달았다. 함께한 시간을 정성스럽게 포개어 쓰고, 이런 낭만적인 고백으로 끝나는 연애 편지라니. 누군가의 연애를 한 번도 부러워해본 적 없지만, 이 연애 편지는 정말이지 부러웠다. 쓰는 사람과 받는 사람 둘 다. 둘이 두 손 꼭 붙잡고 오래오래 방콕을 여행할 수 있기를 나 역시 간절히 바랐다. 작가의 소설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도 봐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