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100] 파묘의 인류사
"이 세계는 수수께끼야. 이것, 자네가 지금 보고 있는 것들이 전부가 아냐. 세계에는 그보다 더 많은 것들이 있어. 사실은 끝없이 많은 것이라고 해야겠지. 따라서 그걸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실제로는 세계를 억지로라도 익숙한 걸로 만들려는 행위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네. 자네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세계에 자네와 내가 이렇게 함께 있는 건 단지 우리 두 사람 모두가 그 세계를 알기 때문이야. 하지만 자넨 힘의 세계를 몰라. 따라서 그걸 익숙한 장면으로 만들지 못하는 거지."
...
"우리를 이끄는 뭔가가 정말로 존재합니까?"
"물론일세. 우리를 이끄는 힘들이 있어."
"그것들을 묘사해 주시겠습니까?"
"그것들을 영, 정령, 공기, 바람, 뭐 그런 표현을 써서 부른다는 것을 빼고는 딱히 말해줄 것이 없군."
_ 익스틀란으로 가는 길, 카를로스 카스타네다
제1장 힘의 세계
인류를 둘러싼 자연계는 근본적으로 샤머니즘적 흐름 안에서 구동된다. 힘의 세계, 약육강식, 자연의 법칙. 우리는 그 세계를 떠나온 지 오래되어서 기억하지 못하지만, 인류는 대부분의 역사적 시간을 자연법칙의 일부로써 살아왔다. 그때의 인류는 영, 정령, 태양, 산과 나무로 존재하는 힘과 에너지를 섬기고 그것에 기도했다. 괴베클리 테페의 고대사원에서처럼.
그러다 진화력을 뇌에 집중시킨 어떤 시점에, 그러니까 이성으로서의 인간, 호모 사피엔스가 힘과 에너지가 지배하는 자연법칙으로부터 자신들을 분리시키기 시작한 문명사회의 시작으로부터, 인류는 세계에 대한 자신들만의 기술記述과 묘사, 체계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문명 세계인 것이다.
주술사에게 일상적인 세계란 우리가 믿는 것 같은 현실도 아니고, '밖'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고 그는 말했다. 주술사에게 현실, 즉 우리가 아는 세계는 단지 하나의 기술이자 묘사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돈 후앙은 바로 이런 전제를 입증하는 일에 가장 큰 공을 들였다. 바꿔 말해서, 나를 둘러싼 세계라고 내가 믿어왔던 것은 단지 태어난 순간부터 강제적으로 주입받은 하나의 기술에 불과하다는 진정한 확신을 내 마음속에 심어주려고 했던 것이다.
어린아이와 접촉하는 모든 사람은 주위 세계를 끊임없이 묘사해 줌으로써 급기야는 어린아이가 바로 그런 식으로 세계를 지각하게끔 도와주는 교사나 마찬가지임을 돈 후앙은 지적했다. 우리가 그런 중차대한 순간을 기억 못 하는 것은, 갓 태어난 어린아이에게는 비교 가능한 준거점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의 묘사에 접하는 순간부터 그 어린아이는 '구성원'이 된다. 따라서 그가 그런 묘사에 완전히 적응함으로써 성원들에게 요구되는 모든 지각적 해석을 적절히 행할 수 있는 시점부터, 그 어린아이는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을 완전히 갖추게 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돈 후앙에게 우리의 일상 현실이란, 특정한 '자격'을 공유하는 개개의 구성원들이 교육을 통해 습득한, 공통적인 지각 해석의 끊임없는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의 세계를 구성하는 지각 해석이 흐름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그 흐름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의문의 대상이 되는 일이 거의 전무하다는 사실과도 부합한다. 사실, 우리가 아는 세계의 현실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는 탓에 우리 현실이 여러 기술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주술의 기본 전제를 진지한 제안으로 받아들이기란 지극히 어렵다.
_ 익스틀란으로 가는 길, 카를로스 카스타네다
그리하여 인류는 스스로 터득한 '공통적인 지각 해석'을 공유함으로써 신과 정령의 세계, 샤머니즘적 체계를 극복한 듯 보이나, 그것은 이탈이고 분리이지 세계의 소멸이 아닌 것이다. 이상하고, 아름답고, 신비하고, 기괴한 그것의 세계는 여전히 존재하고 우리와 함께하며 실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귀신과 혼령, 영적 현상과 비물질계의 어떤 체계들 말이다. 우리가 떠나왔다고 착각하고 있는.
그 착각은 실로 그럴만하다. 물질문명을 급속도로 발달시켜 온 인류는 샤머니즘의 세계가 접근할 수 없는 안전 구역을 넘어, 지구를 지배할 컨트롤 타워를 제대로 건설해 버렸으니. 인류 문명이 창조한 이 새로운 시공간에서, 시간은 정확히 24시간과 365일을 지켜내며, 공간은 땅과 하늘로 나뉘어 정확하게 측량이 가능하다. (인간만의 기술일지언정) 인류는 '공통적인 지각 해석'을 통해 예측가능한 미래를 창조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이성의 논리와 규칙 속으로 편입된 '어린아이'는, 신과 정령, 자연법칙의 체계로부터 이주하여 '공통적인 지각 해석' 안에서 작동하는 인간 세계에 편입됨으로써 시민권을 자동 획득하게 되었다. (이를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와 외로운 늑대의 정령이 부러워하지 않을 리가) 힘의 법칙이 지배하는 샤머니즘적 세계 속에서 시공간을 분리해 낸, 예측가능하고 측량가능한 '현실 구역'은 힘의 법칙을 벗어난 안전지대이자, 이성과 논리로 가동되는 유토피아인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시민권에는 유효기간이 있으니 죽음 앞에서 그것은 무력해지고 만다. 그리고 떠나온 고향, 샤머니즘의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하여 까맣게 잊고 있던 이 세계의 법칙이 죽음을 대면한 모든 이들에게 낯선 공포를 입고 현현하는데, 우리는 그걸 다 싸잡아 '귀신'이라고, '악마'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없는 게 아니라니깐.
없는 게 아니다. 인류의 '공통적인 지각 해석'에서 퇴출시켰을 뿐. 눈 가리고 '영구 없다' 한다고, 있는 영구가 없는 게 아닌 것이다. 그런다고 '진짜 귀신이 존재한다고?' 어이없는 반문은 하지 마라. 진짜 없다면 '귀신'이란 말도 없겠지. '공통적인 지각 해석'에서 쫓겨났을 뿐, 우리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고 부르고 있다. '귀신'이라고. 게다가 이번에는 '정령'이다.
제2장 그것이 또, 나왔다
상덕: 정령?
화림: 혼(魂)이나 귀(鬼)는 영(靈)만 있고 육신이 없는 불완전한 존재라 영과 육이 모두 있는 인간의 정신을 절대 이길 수 없어요. 그렇지만 '그건' 아니에요. 정령은 동물이나 인간의 영이 사물에 붙어 만들어진 거예요.
걱정 마라. '혼령'과 '귀신'은 육체가 없어서, 육체를 소유한 인간의 정신을 해할 수 없다고 고은이가 딱 잘라 말해 주었다. 그래, 이것이 바람직한 '귀신'에 대한 '지각 해석'이다. 받아들이자.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물질과 결합하여 진화한 정령' 세상에 이건 또 뭔가?
영화는 그것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한 일본 장수의 칼이라고 보여준다. (진화한 그것은 육척장신의 혈귀(오니鬼に, 일본 도깨비)이자 불타는 쇠말뚝이다) 그 칼에 사악한 일본 여우의 정령이 붙어 진화했다고, 그것이 범(한반도)의 허리를 끊었다고. 철 지난 '한반도 쇠말뚝' 음모론을 펼치며 일본의 '음양사'까지 소환하는데.
"이순신(영화 '명량'의 최민식) 장군이 지관으로 환생하여 500년 전에 뒤쫓던 일본 장수의 칼을 젖은 몽둥이로 응징하는 영화."
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잘 나가다가. 에잇, 흥미진진했는데. 지각 너머의 세계를 그리며 거창한 전개를 예고하다가 결국 민족주의 반일 선동의 흔해빠진 클리셰로 회귀하다니. 한국 영화는 선동 아니면 흥행에 자신이 없는가? 게다가 500년 전 귀신까지 소환할 만큼 소재 부족에 시달리는 거냐? 마법사를 찾아와라. 기상천외한 오컬트 닝겐 스토리가 무궁무진이다.
(알고 봐라. 영화에서 말하는 세키가하라 전투는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 장군이 승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쫓던 적장들, 규슈 지역의 다이묘들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패하여 200년간 복수혈전을 꿈꾸게 만들었던 전투이다. 승전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막부 시대를 열고 지방 다이묘들을 철저히 억압했는데, 덕분에 칼 쓸 일 없던 사무라이들이 공부해서 똑똑해졌다. 게다가 밀어닥친 개방의 압력으로 어쩔 수 없이 연 데지마(규슈 나가사키 인근 섬) 개항 덕에 일찍이 서양 문물을 접한 전직 사무라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나 일으킨 게 '메이지유신'. 그 주역들이 200년 전 규슈 지역의 패전 다이묘들의 후손인 조슈 번, 사쓰마 번 출신들이고, 그들 중 강경파, 군국주의자들이 일으킨 게 '태평양 전쟁'. 패망하였으나 미군정의 중용으로 살아남은 잔존세력의 상징 '기시 노부스케'와 그의 외손자 '아베 신조'까지 이어지는 척결되지 못한 군국주의의 흐름. 그걸 이순신 장군의 환생인 듯한 풍수사(영화 '명량'의 최민식)가 오행五行(음양오행의 그것)의 원리에 따라, 젖은 나무 몽둥이(水와 木)로 범(한반도)의 허리에 박힌 쇠말뚝인 불타는 적장의 칼(火와 金)을 응징한다는, 지극히 '소년 점프'스러운 전개로 국뽕 뿜뿜하게 만드는 영화란다.)
흥미롭다가 결말이 노량 앞바다에 빠져버렸다. 상업 대중영화가 흥행 코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니 이해하지만, 그게 또 반일 선동이라는 게 참으로.. 한국 관객의 인식을 깔보는 건지, 우리의 수준이 그것밖에 안 되는 건지 유감 뿜뿜이다. 아니 잘 나가다 말고. 혈귀(오니鬼に)는 탄지로의 귀살대가 열심히 해치우고 있는데, 게다가 거북선도 아니고 젖은 방망이로다가. 쯔쯧
제3장 그들이 온다
마법사는 이즈음에서 이 영화와 비슷한 무당이 등장하는 일본 영화 <온다>가 떠올라 비교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오컬트라는 장르와, 무당이 등장하여 눈에 보이지 않은 적(귀신, 정령)을 대적한다는 기본 플롯 이외에는 전혀 다른 영화인 이 두 편을 평면 비교할 수는 없겠으나, 인류가 새카맣게 잊었거나, 낯설기 짝이 없는 지각 세계 너머의 그것을 다루고 있는 두 영화가, 그것을 이해하고 소화하는 방식은 너무도 질적 차이가 드러나니, 한국인 마법사로서 아쉽기 (원글-쪽 팔리기) 짝이 없는 것이다.
두 영화 모두 위기는 어린아이의 죽음이다. 시민권을 반납해야 되는 지점. 샤머니즘, 힘의 세계가 두 팔 벌리고 있는 두 세계의 접점에 선 아이를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로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한 영화는 그걸 500년 전부터 이어진 케케묵은 민족의 원한으로부터 해결하려 들고, 다른 영화는 그것을 야기시킨 고장난 인류의 시스템, 그리고 병든 부모와 인간들의 내면으로부터 접근해 간다. <온다>의 '귀신'은 모두 창조되었으나 그것들에 힘을 부여한 것은 모두 '공통적인 지각 해석'이 창조해 낸 가상 현실이다. (인스타용 행복) 악셀을 너무 세게 밟아 인류를 오히려 위기로, 무방비 상태의 힘의 세계로 몰아붙이고 있는 '문명 제국'의 시스템.
그러나 <파묘>의 그것은 '허구'이다.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공동체인 '민족'과 '국가'의 원한을 풀려고 덤볐으니 말이다. 그런다고 그 집안의 카르마가, 우리 민족의 원한이 해소되는 걸까? 조상 탓에 또 억울하게 죽은 애 아빠와 할아버지, 할머니는 또다시 '귀신'이 되어 나타나지 않겠느냔 말이다. 이 끝없는 카르마의 반복에도 불구하고, 어쨌거나 존재하지도 않는 상상 공동체의 원한을 반드시 풀고야 말겠다는 반일 선동주의자들의 집념은 참으로 '외로운 늑대'스럽다. 그건 강호의 범이 할 짓이 아니다.
홀리는 여우 따위는 한없이 높은 문화의 힘으로 극복한 지가 도대체 언제냐? K-POP, 한류의 높디높은 문화의 힘이 저 원수의 나라에 한국어 열풍을 쇄도시키고, 연애도 하지 않는 젊은 열도인들의 이상형을 반도인으로 점철시킨 지가 언젠데. 게다가 수많은 경제지표에서 일본을 앞서버린 기록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져 나오는 이 마당에, 새로운 선진국으로 열도인의 부러움과 시기를 한껏 받으며, 최다관광객으로 그들의 전대에 돈을 찔러주는 이 마당에, 도대체 '잃어버린 30년'으로 이미 응징을 당할 대로 당한 패전국의 나라가 아직도 두렵단 말인가? 단 12척으로도 적을 섬멸시킨 대장군의 후예들이 고작 '자위대' 따위가 두렵단 말인가? 쇠말뚝 하나를 어쩌지 못해 대장군까지 환생시켜야 한단 말인가? 하루가 멀다고 지진과 쓰나미가 습격하는 저주받은 땅에 살고 있는 그들이 아닌가? 그렇게 자신이 없는가? 이런 퇴행적 사고는 도대체 반일 선동 난리굿을 얼마나 치러야 끝을 보겠는가. 고마해라 마이 멕였다. 난리굿에 놀아나 봐야 할머니들 팔아서, 선동꾼 자식들 미 제국 유학비용이나 대는 호구 짓 밖에 더할 텐가. 미안하다. 유니클로 히트텍 입고 글 쓰는 친일 마법사다. 젖은 몽둥이찜질 좀 부탁한다. 국뽕 쇠말뚝이 박혀 허리가 좋지 않다. 뽑아주던가.
기왕에 미안한 거 다른 영화 <온다>의 해법과 비교 좀 해야겠다. 이 영화는 고장 난 인류 시스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영유아 살해 문화', 마비키 관습, 교묘하게 변형되어 진화하고 숨겨져 내려오는 악습. 현대는 뭐 다른 줄 아는가. 이 영화에서의 어린아이의 위기는 산업사회의 폐해가 낳은 가족, 결혼, 사회 제도의 문제와 한계들로부터 기인한다. 그러니까 인류 공통의 지각이 창조한 세계에 균열이 가고 있고, 이 피해를 고스란히 '어린아이', '새로운 세대'가 감당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물론 오컬트 장르의 상업 대중영화로서 <파묘>가 전제한 어린아이의 죽음과 위기는 그저 영화적 배경의 일부일 뿐이니 이런 비교는 억지일지 모른다. (아니다. <파묘>는 정면으로 그것을 열변한다. 우리 아이들이 밟고 살아갈 땅이 아니냐며) 그러나 그것이 어떤 집단의 무의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 미래 세대의 위기를 케케묵은 민족문제, 정치문제로 환원시키고 그것을 교묘한 역사 짜집기로 정당화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문제인 것이다. <온다>는 그것을 개인의 무의식, 인류의 집단 무의식의 차원까지 깊숙이 열고 그곳에서 다른 세계와의 접촉을 시도한다. 그것은 젖은 몽둥이 대신 깨어진 거울과 숨겨진 칼로 대결을 시도하지만, 종국에는 고통과 두려움에 맞서는 위대한 인간의 용기로 구원의 서사를 여는 것이다. 살아남은 이들은 인간인지 귀신인지 알 수 없는, 그러나 영혼을 담은 육체이기를 포기하지 않은 '존재'들이다. 그 시도에 힘의 세계를 다루는 샤먼(무당)들이 등장하고, 그들은 심지어 한국의 사먼들에게까지 도움을 요청한다. 이것은 국가와 민족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의 아픔이자 카르마이니까. (한일 무속 연합군의 신맞이굿 라스트씬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카르마는 해소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미 이겼다. 문화의 힘으로 이겼고 이제는 경제의 힘마저 그들을 앞섰다. 그들 역시 침략의 과오를 바로 치렀어야 했으나, 운명의 아이러니가 오히려 연이어 일어난 한국전쟁 등의 수혜를 톡톡히 입게 했고, 자기 땅에 핵폭탄을 박아 넣은 원수 나라의 보호 아래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했으나, '플라자 합의' 등으로 약 주고 병 준 '그' 원수의 나라 때문에 30년을 잃어버려야 했다. 그간 잃어버린 것은 경제력만이 아니다. 자신을 잃었고, 거품을 누렸으나 두려움에 잠식당한 기성세대는 장롱 속에 현금을 감춤으로써 새로운 세대의 도전과 모험을 좌절시켰다. 이 가여운 희생양들은 죽어가며 '히키 꼬모리', '프리터족', '오타쿠' 등 자신들 만의 방패를 만들었고, 이를 반도에 전파하여 반도의 MZ세대들에게 출산과 연애, 결혼을 포기시킴으로써 기성세대의 카르마를 소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그 덕에 이 범의 나라는 인구소멸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으니, 12명이면 될까?
상덕 : 불火과 물水은 상극이다. 쇠金와 나무木는 서로 상극이다. 그러니까 불타는 검金의 상극은, 물에 젖은 나무木다.
수水는 화火를 극克하고 목木과 금金도 서로 상극相克이지만, 금金은 수水를 생하고 목木은 화火를 생生하는 것이 또한 오행五行 의 이치이다. 젖은 몽둥이로 늙어빠진 원수를 응징할 게 아니라, 한없이 높은 문화의 힘으로 연대를 이뤄 상생하는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면, 두 나라가 봉착한 세대 전쟁의 혈투를 무사히 지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류 팬과 재팬메이션의 오타쿠들이 연합군을 이룬다면 말이다. 터무니없어 보여도 K-POP 전사 아이유의 말처럼, 사랑이라면 승산이 있다.
누군가는 지금을 대혐오의 시대라 한다.
분명 사랑이 만연한 때는 아닌 듯하다.
눈에 띄는 적의와 무관심으로 점점 더 추워지는 잿빛의 세상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을 무기로 승리를 바라는 것이
가끔은 터무니없는 일로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본 바로
미움은 기세가 좋은 순간에서조차 늘 혼자다.
반면에 도망치고 부서지고 저물어가면서도
사랑은 지독히 함께다.
사랑에게는 충분히 승산이 있다.
_ 아이유, 'Love wins all' Intro
제4장 방패
그러나 뭣보다 중한 것이 있으니, <파묘>의 이러한 아쉬움에도 놓치지 말아야 중요한 '그것'이 있다. '사물에 붙어 진화하는 정령'. 그것은 이 영화의 아쉬움에 면죄부를 주는 중요한 포인트이다. 아니, 이 지점에서 오히려 이 영화는 대단해진다. '그것'에 대해서,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했으니까. 왜 오컬트에서 크리쳐 물로 장르 전환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비가시적 실체를 유치한 거인 크리쳐로 등장시킬 수밖에 없었는지. 바로, '그것'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제 자네가 전사에 관해 마지막으로 알아야 할 점을 얘기해주겠네. 전사는 자신의 세계를 구성하는 항목들을 선택해야 해. 일전에 맹우를 본 자네를 내가 두 번 씻어줘야 했을 때, 자네의 문제가 뭐였는지 아나?"
"모릅니다."
"자넨 자네의 방패를 잃어버렸던 거라네."
"방패라니요? 무슨 얘기를 하고 계신 겁니까?"
"전사는 자신의 세계를 구성할 항목들을 선택한다고 했잖나. 그것도 신중하게 말이야. 왜냐하면 전사가 고르는 항목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그가 이용하려고 분투하고 있는 힘들의 맹공격으로부터 그를 지켜줄 방패가 되어주기 때문이라네. 이를테면 전사는 방패들을 써서 맹우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지. 일반인들 역시 전사와 마찬가지로 그런 불가해한 힘들로 둘러싸여 있지만, 자신들만의 특별한 방패들로 보호받기 때문에 그걸 아예 감지하지도 못하지."
돈 후앙은 말을 멈추고서 묻는 듯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_ 익스틀란으로 가는 길, 카를로스 카스타네다
인류 공통의 지각은 이미 물질, 육체를 벗어나 가상의 세계, 샤머니즘이 지배하는 정령의 세계에 접근하고 있다. 양자와 전자의 세계, 전기, 전자 문명이 연 비물질의 세계. 나는 대체 누구랑 전화를 하고 있는 걸까?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그 목소리는 인간인가? 귀신인가? 이 글을 쓰는 마법사를 너는 본 적이 있는가? 글쓴이는 봇인가? 정령인가? 좋다며 댓글을 쓴 너는 도대체 누구냐? 나는 마법사냐? 사람이냐? 아직도 내가 사람으로 보이니?
볼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듣는 것은 위험하다. 파동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주파수를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틈탈 수 있고 변조할 수 있다. 네게 보이스 피싱을 건 그들이 진정 조선족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게 믿냔 말이다. 증거를 대라. 그들이 실존 인물인지. 여기까지는 그래도 '오컬트'다. 그런데, AI는? 인공지능은? 과연, 그럴까? 인공지능 'Her'가 사이보그 육체를 입고 나타나 사랑한다고 너를 안으면, 그게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의 정령이 아니라고 누가 증명할 수 있겠는가? IoT로 작동하는 홈 스테이션이 불을 모두 꺼버리고 동작하지 않으면 그것은 단지 프로그램의 오류일까? 암흑 속에서 너는 어쩌면 정령이 들러붙은 진공청소기와 칼싸움을 벌여야 할지도 모른다.
'사물에 붙어 진화하는 정령' 바로 그것.
'그것'은 천사도 악마도 아니다. 소원을 들어주는 램프의 정령일 수도, 너의 간을 노리는 여우의 정령일 수도 있다. 힘이란 그런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인류의 속도는 위험하다. 혁신이고 발전일지 모르나 인류는 그 세계의 법칙을 잊은 지 오래고, 그 세계의 구동 방식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런 채로 이미 그 세계로 통하는 문을 열어버렸다. 사방팔방의 틈새를 벌리고 마치 그 힘이 인류를 구원해 줄 것인 양 두 팔 벌려 환영하고 있다. 신고가를 경신해 대는 문지기들에게 찬사를 보내며. 뭐 어쩌겠는가? 인류는 이미 돈에 깃든 맘몬의 영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지 오래니. 영들의 영, 신들의 신 맘몬의 정령은 인류가 구축한 '문명 세계'의 시스템에 붙어 진화한 지 오래다. 동전에 깃들고, 지폐에 깃들었다가 이제는 스마트폰, 컴퓨팅 시스템의 몸을 입고 숫자로 진화해 버렸다. 우리는 맘몬의 정령에게 영혼을 빼앗긴 채로 원하지도 않는 것을 원한다며 스스로를 세뇌시키고, 인류의 번영과 행복을 위해 사용해야 할 손가락을 거짓과 선동으로 이웃에게 살殺을 날리는 데 쓰고 있다. 유유히 인류의 지각 시스템에 입성한 맘몬의 영은 비가시적 세계, 비물질로 통하는 문을 활짝 열어 여우 군단들의 무혈입성을 성사시킨지 오래고, 이제는 그 여우 군단들에게 육체를 제공하려고 있다. 인간이 조작하지 않는, 코드에 의해 작동하는 그것. 틈타기 쉬운 그것. 그것의 위험을 간과해선 안 된다. 그 세계는 한 번도 우리 곁을 떠난 적이 없다. 배제되었을 뿐. 그러나 문명의 설계자들은 그 세계를 다뤄 본 적이 없다. 관 속에 봉인되어 있던 그 힘을.
그렇다고 공포에 절망할 필요는 없다. 그 세계는 바로 비물질이 물질로 발현하는 그 세계이기도 하니까. 네가 그토록 끌어당기고 싶던 바로 그 세계. 상상이 현실이 되는, 정신이 물질로 발현되는 바로 그 세계. 그러나 너의 드라마가 판타지가 될지, 오컬트 심지어 크리쳐 물이 될지는 네게 방패가 있는지 없는지에 달려 있다.
"그 방패라는 게 뭡니까?" 나는 거듭 물었다.
"사람들이 하는 일."
"사람들이 뭘 하는데요?"
"흠, 주위를 둘러보면 자네도 깨달을 거야. 사람들은 사람이 하는 일들로 바쁘다는걸. 그것이 그들의 방패가 되어주는 걸세. 주술사의 틈새는 아까 말한 불가해하고 완강한 힘들 중 하나와 마주칠 때마다 벌어지고, 그러면 평소보다 더 죽음 앞에 취약해진다네. 우리가 그런 틈새를 통해 죽는다는 얘기는 했었지. 따라서 틈새가 열리면 그걸 자기 의지로써 메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해. 전사라면 말이야. 만약 자네처럼 전사가 아닌 경우에는 일상생활의 활동을 이용해서 그 같은 조우의 공포로부터 마음을 멀어지게 함으로써 그 틈새가 절로 닫히게 하는 방법밖에는 없다네. 자네가 맹우를 만났던 그날 자넨 나한테 화를 냈었지. 내가 자네 차를 멈추거나 자네를 물에 처박아서 추위에 떨게 만들었을 때 나는 일부러 자네를 화나게 했던 거야. 옷을 입은 채로 젖으니 더 추웠겠지. 화가 나고 추웠기 때문에 자넨 틈새를 닫고 안전해질 수 있었던 거야. 하지만 자네 삶의 이 시점에서는 자넨 더 이상 그런 방패를 보통 사람들만큼 효과적으로 쓰지 못해. 자넨 그런 힘들에 관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고, 마침내 전사처럼 느끼고 행동하기 직전의 상태에까지 왔으니까 말이야. 자네의 옛날 방패들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게 된 거라네."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전사처럼 행동하고 자네 세계의 항목들을 골라야 해. 이젠 아무거나 되는대로 끌어모아서 주위를 에워쌀 수는 없어. 이건 정말로 심각한 얘기야. 자신이 난생처음으로 옛 생활방식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은 상황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해."
"저의 세계의 항목들을 선택한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전사가 그런 불가해하고 완강한 힘들과 마주치는 건, 일부러 그것들을 찾아다니기 때문이야. 그래서 언제나 그런 만남에 대비되어 있지. 반면에 자네는 전혀 그런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실제로 그런 힘들이 찾아오면 자네는 소스라치게 놀랄 게 뻔해. 그 공포는 자네의 틈새를 열 거고, 자네 목숨은 불가항력적으로 거길 통해 빠져나가게 될 거야. 그러니까 자네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대비 태세를 갖추는 거야. 언제든 맹우가 눈앞에 불쑥 튀어나올 수 있다고 상정하고 그럴 경우에 대비하는 거지. 맹우를 만난다는 건 애들 장난이 아니고, 전사는 자신의 목숨을 지킬 책임이 있어. 그러다가 그런 힘들 중 하나가 자네를 건드려서 자네의 틈새를 연다면, 자넨 스스로 그걸 닫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자네에게 큰 평화와 기쁨을 주는 일들을 몇 가지 골라둬야 한다네. 공포로부터 마음을 돌리게 해서 자네의 틈새를 닫고 자네를 다시 단단하게 만들어 줄 것들 말이야."
"이를테면 어떤 걸 얘기하시는 겁니까?"
"몇 년 전에 전사는 일상생활에서 마음이 깃든 길을 택해서 따라간다고 자네한테 말해준 적이 있지. 전사가 일반인과 다른 건 언제나 마음이 깃든 길을 선택하기 때문이라네. 자신이 선택한 길과 하나가 될 때. 또 그 길을 따라가면서 크나큰 평화와 기쁨을 경험할 때 전사는 그것이 마음이 깃든 길임을 깨닫는 거지."
_ 익스틀란으로 가는 길, 카를로스 카스타네다
마음이 깃든 길. 너는 그 길 위에 있니? 방패를 가지고 있느냔 말이야. 인류 공통의 지각이 건설한 세계는 붕괴하고 있어. 그리고 힘의 법칙이 지배하는 이 세계는 여기저기에서 틈새를 열고 있지. 그들에게 인간의 논리 따위는 없어. 오로지 힘의 법칙만이 지배하는 그 세계의 존재들은 어느날 불쑥 나타나 네 어깨에 손을 얹고 너를 낯선 세상으로 끌고 들어갈 거야. 네가 복용하는 그 수많은 약들과 네가 정신을 쏟고 있는 가상의 세계들, 관념들, 경계가 모호한 논리들. 그 모든 것들이 한 번에 쏟아져 나오고 있어. 인류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으니까. 이때에 믿을 것은 육체에 깃든 영혼뿐이야. 물질, 육체와의 연결을 끊어선 안 돼. 그것이 단절되면 너는 한순간에 그들에게 삼켜질 거야. 아, 이미 그렇다면. 너는 귀신이겠구나. 몸이 없는 너는. 내 손을 잡을 수 없을 테니. 살아있는 존재들만이 서로 손을 잡을 수 있지. 알 수 없는 죽음, 이해할 수 없는 재난들이 너의 사방을 둘러싸고 있어. 그것에 누구도 예외가 아니야. 그러나 전사들은 혼재하는 세계들의 균열 속에서도 방주를 건설하고 문명을 이어나갈 거야. 상상과 생각이 현실이 되고 물질로 발현되는 세계말이야. 마음이 깃든 길. 그리고 그 새로운 도시에서 힘의 세계와 지각의 세계가 서로 연결하게 되는 거야. 잊고 있던 세계의 힘이 인류가 발전시켜 온 지각 문명과 결합하게 되는 거지. 방패 너머의 세계 말이야.
그리고 그들이 오는 거야. 새소년들
(제5장 파묘의 개인사)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영화보다 더 괴기스러운 일이 현실에서 어떻게 모습을 드러내는지, 그것은 마법사의 가문에서 현실이 되었다. '파묘' 말이다.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 법한 이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영화에서처럼 마법사의 증조 할아버지와 외증조 할아버지에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심지어 양가다) 그분들의 묫자리로 말이다.
[위즈덤 레이스 + Movie100] 074. 파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