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ty 100] 나는 돌핀 호텔에 가 본 적이 있다
"두 고독이 서로를 보호하고 마주 서서 인사하는 것, 그 안에 존재하는 사랑"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사랑은 영혼이 안전감을 느끼게 하는데, 여기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이런 사랑은 우리가 때로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상대에게 자행하는 폭력을 물리친다. 내가 폭력이라 말하는 것은 학대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노골적, 물리적 폭력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우리가 도움이 될 생각으로 각자의 고독을 침범하면서 범하는 미묘한 폭력이다.
_ 다시 집으로 가는 길, 파커 J. 파머
고독 없는 공동체는 소음과 폭력을 유발할 뿐이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끊임없이 말을 함으로써 자신과의 대화를 외면하고, '널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이상한 욕을 상대의 동의 없이 마구 내뱉는 걸 심지어 권리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걸 사람들은 회식이라고, 멤버십트레이닝이라고, 축제라고 부르기까지 하는데. 아무말 대잔치. 그러다 '라떼'로 통일된 일방적 주문과 이를 방어하려는 '되바라진' 쿠데타가 도를 넘어서면 공동체는 박살이 나고 만다. 뿔뿔이 흩어져 각자도생을 또 '말'하지만, 공동체 없는 고독은 독선과 망상을 재배할 뿐인 것이다. 자기만의 '말', 자기만의 '논리', 자기만의 '감성'이 무럭무럭 자라나 숲을 이루고 개인은 그 검은 숲에 갇혀 고립된 외톨이가 되어가는 것이다. 고독 없는 공동체에도, 공동체 없는 고독에도 자신과의 대화는 결여되어있다. 혼자 숨어 혼잣말을 하루 종일 주문처럼 외워봐야 부딪혀 돌아오는 메아리가 없으니, 그건 말인지, 소린지, 비명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고독은 고립이 아니라 자신과의 대면인 것을. 분열된 자기 인격과의 대면. 그것은 그게 그거인 수많은 대중과의 만남보다 더 다채롭고 소란스럽다. 자신을 마주한다는 것. 수많은 인격의 말, 말들 속에서 분열하지 않은 원초적 자신을 찾아내는 일. 그리고 그 자신을 중심으로 조화로운 자기 인격 공동체를 구성해 내는 자. 그들이야말로 공동체의 초석이 되는 것일 텐데. '외톨이'는 많아도 '고독자'는 드문 세상에서 공동체로 가는 길은 참으로 요원해 보인다.
고독과 공동체를 진정한 역설로 보려면, 양극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를 심화시킬 필요가 있다. 고독은 다른 이와 동떨어진 채 사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독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결코 격리된 채 살지 않는 것을 뜻한다. 고독은 다른 이의 부재가 아니다. 다른 이와 함께 있건 안 있건 자신에게 충실히 존재 하는 게 고독이다. 공동체는 반드시 다른 이와 얼굴을 마주하고 더불어 사는 걸 뜻하지 않는다. 공동체는 다른 이에게 잇닿아 있다는 깨달음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공동체의 본질은 다른 이의 존재감이 아니다. 공동체의 핵심은 우리가 혼자 있건 아니건 관계의 현실에 온전히 열려 있는 것이다.
고독과 공동체를 이런 방식으로 이해할 때 신뢰 서클을 만든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이해하게 된다. 신뢰 서클을 만든다는 건 영혼을 환대하는 공간을 우리 사이에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함께 홀로 할 수 있는 고독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_ 다시 집으로 가는 길, 파커 J. 파머
나는 돌핀 호텔에 가 본 적이 있다. 그곳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말 없는 지배인이 있는데 카운터에 들어서면 그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여권을 요구한다. 여권의 여백에는 국적을 알 수 없는 수많은 결핍과 욕망이 가득 적혀 있고 지배인은 이를 차분히 한 장, 한 장 넘겨보고는 적당한 호실을 배정해 준다. 그리고 배정된 호실의 열쇠를 넘겨주는데 열쇠에는 호실 넘버와 함께 '침묵'이라는 와이파이 패스워드가 적혀 있다. 객실로 가려면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는데, 엘리베이터에 타면 버튼을 누를 필요가 없다. 이 호텔의 엘리베이터는 몇 층 버튼을 눌러도 언제나 동일한 층에 서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로비 의자에는 스타벅스 사내가 카라멜 프라푸치노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고, 당신에게 좋은 식당을 소개해 줄 컨시어지 요정 요스케가 반갑게 당신의 가방을 들어줄 것이다. 물론 그에게 팁을 줄 필요는 없다. 어차피 당신은 그가 추천, 아니 지정해 준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해야 할 테니까. 나는 그가 추천해 준 스시집에서 불란서산 토끼 회를 먹어야 했다. 요정 요스케의 안내를 따라 호텔 복도를 걷다 보면 감각의 제국에서나 사용할 것 같은 채찍과 온갖 가학적 취향을 위한 도구가 박제되어 걸려 있는데, 요정 요스케는 이것들은 모두 예전의 투숙객들이 놓고 간 '자기 연민', '자기 학대'의 도구들이라고 귀띔을 해 준다. 그리고 방에 들어서면,
TV는 있지만 작동은 하지 않는다. 카운터에 리모콘이 망가진 것 같다고 인터폰을 하면 시설 담당 기사인 토마스는 원래 그런 TV라고 수리하러 올라오겠다고 기계적 답변을 반복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올라오지 않는다. 대신 가끔씩 TV가 저절로 켜지는데 그때마다 고정된 채널인 듯 모니터에서는 '스카이캐슬'의 예고편만을 방영한다. OST는 'We all lie'
침대 끝에 멍하게 앉아 꺼졌다 커졌다 하며 'We all lie'를 반복하는 TV를 보고 있으면 어둠이 깔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문 밖에서 뭔가 부스럭대는 소리가 계속 들려오는데, 고양이가 환풍기 구멍 사이로 침입하려고 용을 쓰고 있는 소리다. 나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고양이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눈싸움을 벌이다가 피곤에 지쳐 잠이 들어버린다.
꿈속에서는 암스테르담에서 쏟아져 나온 박살 난 유리창이 하늘을 가득 메워 해를 가리고, 영원을 약속하는 거짓말들이 거짓 전파를 발생시켜 내비게이션을 먹통으로 만들고, 사람들이 말길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바람에 세상이 혼돈에 휩싸이는데. 어디선가 점점 커지는 진동 소리를 쫓아 가보니 이상한 종교집단이 깃발을 들고 퍼레이드를 하며 큰소리로 주문을 외우고, 그 소리가 진동하여 거리의 모든 창문을 와장창 깨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 깨었는데. 동이 터오는 창밖으로, 고대의 석관이 잔뜩 늘어선 공동묘지의 비석들이, 반짝이며 아침햇살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보니 룸서비스로 조식이 배달되었는데. 따뜻한 커피와 신선한 오렌지쥬스에 좋아하는 잉글리시 블랙퍼스트가 한 상 차려진 테이블을 바라보며, 참으로 오랜만에 행복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나는 크림 버터와 딸기잼을 잔뜩 바른 베이글을 한 입 베어 물다 말고, 갑자기 터져 나오기 시작한 내 영혼들의 방언을 받아 적기 위해 컴퓨터 전원을 켜다가 눈물을 툭 쏟는다. 이제야, 이제야말로 나는 나에게로 돌아온 것이다.
돌핀 호텔은 이상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돌핀 호텔에서의 일을 모두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가본 돌핀 호텔은 매일같이 지난날의 자신을 돌아보며 마음 세탁을 하는 하이젠버그의 세탁기가 끝도 없이 돌아가고, 각기 다른 평행우주들 속에서도 언제나 자신을 잃지 않고 일관되게 살아가고 있는 OA들이 기묘한 춤을 추며, 연쇄연민범들의 뒤를 쫓는 진짜 형사들이 피곤함에 지쳐 호텔 로비에서 쪽잠을 자고, 딸에게 세상의 종말을 막을 해결책을 알려주려는 아빠의 외침이 들려오는 책장이 침묵에 잠겨 누군가를 초대하고 있다. 나는 그 초대에 성실히 응하여 매번 돌핀 호텔을 찾는데, 지난 마법행전 중에 시인 루미의 도시에서 묵은 돌핀 호텔에서는, 체크아웃을 하며 지배인에게 다음 돌핀 호텔은 또 어디서 오픈하냐고 물었더니,
0478 CHOONZA ROAD in DOLPHIN HOTEL
(안타깝게도 마법사는 두루미를 쫓아 먼 산에 다녀와야 해서 이번 돌핀 호텔에는 투숙할 수 없게 되었다.)
'공동체의 핵심은 우리가 혼자 있건 아니건 관계의 현실에 온전히 열려 있는 것이다.'
그대를 관계의 현실로 이동시켜 줄 엘리베이터가 돌핀 호텔에 있다. 혼자 있건 아니건, 그대는 돌핀 호텔에서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양사나이와 춘자 그리고 마법고양이의 사촌, 표범들과 함께
[위즈덤 레이스 + City100] 101. Dolphin Hot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