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명인

in Wisdom Race 위즈덤 레이스4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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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바타 야스나리 - 명인

3월부터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가와바타 야스나리 생각이 났다. 하루키가 그려낸 직관의 세상을 따라가다 보면 그 에너지와 속도에 지쳐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유리처럼 섬세한 글로 마음을 달래고 싶어질 때가 종종 있다. 어느 날 특히 더 가와바타 야스나리 생각이 났고, 그의 글을 찾다 비교적 얇아 보이는 이 책을 보게 되었다. 다른 하루키 소설을 읽던 중이라 그 사이에 이 책을 읽을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우선 빌려왔다.

정한 분량을 매일 성실히 읽어나가는 하루키 독서와 달리, 이 책은 처음 열자마자 반 정도를 그 자리에서 몰입해 읽었다. 일탈 같은 독서인 것도, 그리웠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글인 것도 이유 중 하나였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이 바둑을 소재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흑 69의 공격을 두고 사람들은 ‘귀수'라고 불렀다. 명인도 나중에 오타케 7단 특유의 예리한 노림수라고 강평했다. 잘못 방어를 했다가는 백의 수습이 어려워질 수 있기에, 명인은 백 70수에 1시간 46분을 썼다. 그러고 나서 열흘 후인 8월 5일에 백 90은 2시간 7분으로 명인에게는 이번 대국 가운데 가장 오랜 장고였는데, 백 70은 그에 버금가는 장고였다.

그리고 흑 69가 공격의 귀수였다면 백 70은 받아치기의 묘수였다고, 입회한 오노다 6단도 감탄했다. 명인은 담담히 위기를 헤쳐 나갔다. 명인은 한 걸음 물러나며 위험을 피했다. 쓰라린 명수였으리라. 흑이 예리한 노림수로 쳐들어간 기세를, 백은 이 한 수로 늦추었다. 흑은 힘을 쏟은 만큼의 이득을 취했지만, 백은 상처를 떼어 버리고 홀가분해 보이기도 했다.

섬세한 표현에 눈앞에서 대국이 일어나는 듯한 생동감을 느꼈다. 어떻게 바둑의 한 수 한 수를 이렇게 잘 설명할 수 있는지, 작가라면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밀도 있게 그려낼 수 있어야 하나? 감탄하며 글을 읽었다. 책의 뒷장에는 이 대국의 기보가 나와 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이것까지 만든 줄 알고 혼란스러웠는데, 나중에 찾아보다 실제로 본인이 관전한 대국을 기반으로 했음을 알게 되었다.



글을 읽고 필사까지 마친 후로도 책에 대한 생각이, 더 정확하게는 바둑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바둑을 배웠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흥미는 없지만 딱히 할 것도 없어 배운 바둑이었다. 학원을 다닌 지 1년쯤, 실력이 늘어 더는 학원에서 나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없을 즈음 그 남자애가 왔다. 그 아이가 누구였는지,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모든 기억이 흐릿하지만 함께 뒀던 마지막 대국만큼은 아직도 선명하다.

바둑판을 앞에 두고 마주 앉은 그 애는 나를 아주 날카롭고 예리하게 쳐다보았다. 장난치며 놀 때와 전혀 다른 표정에 당황했다. 그 애는 내가 말을 걸어도 절대 웃지 않았다. 나는 이전까지 그 애를 자주 이겼는데, 그날은 아주 처참하게 패배했다. 그 확실한 패배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 무렵 즈음해서 내 급수는 꽤 많이 높아졌고, 그래서 더 이상 예전처럼 가볍게 둬서는 상대를 이기기가 힘들어졌다. 점점 흥미가 떨어졌다. 학교에 입학하면서 저절로 바둑이 멀어졌다고는 하지만, 아마도 바둑을 그만두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그 대국 때문이었을 것 같다.

그때는 그 애가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왜 갑자기 나를 싫어하는지, 왜 나를 저런 매서운 눈으로 바라보는지, 왜 한 번도 웃질 않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지나고 보니 그는 나를 강한 상대로 인정해준 게 아닐까 싶다. 아마도, 그 애는 최선을 다해 나와 싸우지 않았을까?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든다.

학원을 그만둘 무렵 그 애가 프로 기사를 지향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패배감과 안도감이 동시에 들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바둑을 그만둔 후로 파도파도 끝없이 나오는 무한한 예술의 광맥에 푹 빠지게 되었다. 이제 와 돌아보니 여지없이 확실히 질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때 그 아이가 나를 그렇게 확실하게 이겨주지 않았다면 내 삶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대국이 끝나고, 압도적인 차이로 이기고도 끝까지 표정을 풀지 않은 채 목례하던 그 애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날의 승부는 그 애가 내게 보일 수 있는 최선의 존중이었다는 것을 이제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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