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치민 생일 5/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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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베트남 사람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호치민" 생일 이랍니다. 그런데 공휴일도 아니네요...

갑자기 궁금해져서 네이놈에서 관련 정보를 좀 끍거왔습니다. 독서할 시간이 없으니 이거라도 봐야것네요.

조국을 떠난 지 20년 만인 나이 마흔에 홍콩 땅에서 베트남공산당 결성

사이공 항구를 떠나는 호찌민(하노이 혁명박물관 소장)
1930년 2월 3일 홍콩의 주룽. 노동자 마을의 작은 집에 베트남의 공산주의 운동가들이 모였다. 국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베트남의 혁명세력은 세 분파로 나뉘어 갑론을박 하고 있었다. 이에 베트남 혁명세력의 실질적 지도자인 호찌민(호찌민, 당시 이름은 응우옌 아이 쿠옥)이 회의를 소집한 것이다.

먼저 자신을 소개한 호찌민은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분열해 있는 혁명세력이 하나의 당으로 뭉쳐야 합니다. 그래야 프랑스 제국주의와 싸울 수 있습니다.” 호찌민의 말에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실려 있었다.

혁명가들은 통합정당의 이름에서부터 하나하나 의견을 좁혀나갔다. 그리하여 베트남 공산혁명 세력의 공식적인 통합정당인 ‘베트남공산당’이 탄생하였다. 보안을 위해 장소를 옮겨가며 회의를 하는 동안 호찌민은 지나온 세월을 반추하면서 감회에 젖곤 했다.

그의 나이 이제 40이 넘었으니, 고국을 떠난 지 20년이 다 되었다. 오직 조국 베트남의 백성들에게 행복을 되찾아주리라 결심하고 떠난 길이었다. 경찰에 쫓기면서 하루도 편안하게 눈을 붙일 수 없었던 세월, 아직도 갈 길은 멀었지만, 이제 초석을 놓았다는 마음에 호찌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엄밀히 말해 호찌민의 베트남공산당은 레닌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약칭 코민테른)이나 마오 쩌둥의 중국공산당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호찌민에게는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조국의 현실을 타개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였다.

호찌민은 프랑스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베트남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지식인, 중농, 프티 부르주아지만이 아니라 의식 있는 부르주아 민족주의 그룹도 혁명세력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공산주의자 이전에 민족주의자임을 말해주는 호찌민의 이러한 생각은 새 통합정당의 강령에 반영되었다.

그러나 베트남공산당의 2월 강령에 대해 코민테른은 부분적으로 문제점을 지적했다. 강령의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문제였다. 10월에 소집된 회의에서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제거한 새로운 강령이 채택되었고, 그에 따라 당명도 ‘인도차이나공산당’으로 바뀌었다. 이는 베트남뿐만 아니라 캄보디아나 라오스 등 인도차이나를 형성하는 세 나라의 혁명을 함께 추구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었다.

민족 독립을 우선시하고 이를 위해 중간 계급의 협조를 구하고자 했던 호찌민의 전략은 은근히 묵살되었지만, 호찌민은 새로운 강령을 선선히 받아들였다. 받아들일 것은 군말 없이 받아들이고, 확신이 서면 단호하게 실천에 옮기는 것, 그것이 호찌민의 크나큰 장점이었다. 온화하면서도 단호하고, 단호하면서도 넓은 그의 성품이야말로 성공의 일등 공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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