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가뭄 2

in #busy7 years ago (edited)

이직한 지 얼마 안 됐는데 공교롭게도 이직 제의를 받았다. 지금보다 돈을 '훨씬' 더 벌 수 있는 자리다. 하지만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로딩이 너무 많은 자리라 야근은 물론 토요일에도 출근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스트레스 받으면 제일 먼저 알아차리는 건 와이프일 수밖에 없다. 집안일과 육아를 함께 해도 모자를 판에 내 스트레스까지 알아채게 하고 싶진 않았다. (이번 이직도 돈보다는 일의 로딩을 줄이겠다는 게 주요 목적이었다.) 돈보다 가족과의 시간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거절하였으나 내게 그 자리를 제안한 분을 떠올리면 마음이 편친 않다.

이렇게 남자들은 어떻게든 가족을 보호하고 돈도 벌어야 한다는 구시대의 역할뿐만 아니라, 요즘 요구하는 새로운 역할까지 포함된 남성성의 표준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계속 듣고 있다.

요즘 아빠들은 집에서도 잘해야 되고 회사에서도 잘해야 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해 있다.

시대가 변해서 집안에서의 아빠에 대한 기대가 달라지는데 회사에서의 역할 기대는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야근 많이 하는 직원이 훌륭한 직원이고 아이 병원에 데려갈 사람이 없어서 반차라도 쓸라치면 눈치가 보이는 게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남자가 육아휴직을 한다? TV 광고에서 남성이 육아휴직 쓰게 해주는 것을 무슨 대단한 아량인 양 선전하는 기업이 있는 것을 보면 여전히 요원한 일로 보이고, 대부분의 회사에서 남자가 육아휴직서를 제출한다는 것은 일을 그만 두겠다는 말의 다름 아니다.

아빠들이 왜 육아휴직을 안 쓰냐고요? 대부분의 조직에서 해서는 안 되는 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바꿔야 할까요? CEO부터 육아휴직을 써야 합니다. 그럼 달라질 겁니다. 정말 일과 생활의 균형이 중요하다고 믿는다면, "9시 전에는 출근하지 마라. 오후 5시 이후에는 회의를 잡지 않는다"고 말하세요.

사회적 인식 변화가 없는 상태이고, 법적인 지원도 없다. 출산이 미덕인 양 국가적인 홍보를 펼치고 있지만 애 키우는 것은 여전히 한 가정의 문제이다. 지하철에 임산부석이 있지만 아침 출근 시간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 자리에 앉은 것은 임산부가 아닐 때가 더 많다. 육아휴직이라는 제도가 있지만 유명무실한 것과 판박이다.

법이 정해지고 사회 인식이 바뀐다기보다 사회 인식 변화가 입법하게 만드는 때가 더 많아 보인다. 인식이 변화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저자나 역자가 주장하듯이 인식의 프레임을 결정짓는 단어 사용에서 그 시작점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워킹대디'라는 단어는 없는데 '워킹맘'이라는 단어가 있다는 것은 여성은 집안일 하는 존재이며 여성이 일터에 있는 것은 흔치 않은 일임을 반영한다. 하지만 실상이 어디 그런가? '워킹맘'을 사용하고자 한다면 '워킹대디'란 말도 같이 사용하는 게 옳지 않을지. 그리고 요즘엔 이런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이 전에 비해 늘었는데, 남성이 집안일을 '도와준다'라는 표현도 적절치 못 하다. 이런 표현이 통용되는 사회이니 봉태규 같은 아빠가 특출나 보인다. 집안일은 같이 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가진 남자라 하더라도 육아는 엄마가 더 잘하니 엄마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기 쉽다. 나 또한 그렇고. 하지만 엄마도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다. 결국 얼마나 관심을 쏟느냐의 문제다. 집안일이든 육아든 돕는 게 아니라 같이 한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집안일과 육아에 모두 능한 봉태규를 보고 놀라게 되는 것은 그게 흔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봉태규가 놀라운 남자로 여겨짐을 반성한다.

우리 사회는 아버지들에게 육아에 젬병이 되도록 허용할 뿐만 아니라 젬병일 거라고 기대한다. 젬병이 되라고 권장한다. 그래서 막상 젬병이 아닌 아버지를 보면 매번 놀란다.

그밖에도 저자는 일상에서의 실천을 강조한다.

육아휴직을 신청한 남자 동료에게 남성성을 조롱하는 농담을 던진다든지, 저녁 회식에 참석하는 여자 동료에게 애는 누가 보냐는 질문을 던진다든지 하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다. 남자를 실수투성이에다가 아내의 지시가 꼭 필요한 존재로 표현하는 광고에는 항의를 표하고, 성 역할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공익광고를 만들라고 압력을 가하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인식 변화의 목표 가운데 하나는 남성을 일터에서 집으로 귀환시킬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게 애너벨 크랩의 주요한 주장이다.남자가 처음부터 집안일과 육아에 무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남자는 돈 벌고 여자는 집안일 + 육아한다는 인식은 산업혁명 이후의 산물이라고 한다. 그렇든 아니든 간에 잃어버렸던 집안일 + 육아 세포를 다시 소생시키기 위해서는 여성의 사회 진출이 용이하게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남성을 집으로 귀환할 수 있게 돕는 어떤 장치들이 필요하다. 실제적으로 여성의 사회 진출이 증가 추세라지만 남성이 집으로 돌아올 수가 없으니 여성은 사회 생활에 더해 여성에게 부가되는 집안일 + 육아 스테레오 타입을 떠맡는다. 남자들도 안 하고 싶어서 안 하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안 하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다고는 할 수는 없겠으나, 주지하다시피 상사가 7시에 퇴근 한다는데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부장님 고생하세요~'라며 칼퇴할 수 있는 용자는 많지 않다.

맡은 일을 덜어보려고 수를 쓰지 않는 것도 행복을 위한 좋은 비결인 듯해요. 전 그런 식이 좋더라고요. 저희한테는요.

정치인 아내를 둔 어떤 남편의 말이다. 젠더라든지 불평등이라든지 착취라는 인식 틀이 지향하는 바는 결국 인간 대 인간으로서 서로 예의를 갖춰 행동하자는 것이다. 가족이라고 해서 서로에게 함부로 대할 권리는 없다. 살 맞대고 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해야 하는 순간이 많다. 연애라는 게 남녀간의 피끓는 애정으로 시작할 때가 많지만 결혼과 육아의 인생 페이지로 넘어오면 성적이고 열정적인 부분보다는 파트너십과 헌신의 비중이 훨씬 커지는 게 사실이다. 같은 배를 탔고 선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한 명은 멀티로 일하고 한 명은 자기 일만 하겠다고 주장한다면 그 배가 험난한 파도를 잘 헤쳐 나갈 가능성은 적다. 침몰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황혼 이혼이 어느 순간 트렌드처럼 한국 사회에 불어닥쳤는지 모른다. 여성의 사회 인식은 변화되는데 남성은 고릿적 사고를 유지하며 적응적으로 대처하지 못 한 결과다. 자기 일만 하겠다고 주장한 남편들은 아내뿐만 아니라 자식으로부터도 외면당하기 십상이다.

인간의 최대 강점은 직접 경험해 보지 않아도 대리학습과 모델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선배 남편들의 무지와 방만함을 반면교사로 삼을 필요가 있다. 각자의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것은 회사일에서뿐만 아니라 집안에서도 중요하고, 소임을 덜어 보겠다고 수 쓰지 않는 것이 원만한 부부생활의 지름길이라 생각한다. 남성의 집안일 + 육아 세포 소생을 가능케 하는 '실제 사용 가능한' 법적 제도적 장치 마련이 병행되면 좋겠지만, 북유럽 국가 정도의 수준이 되려면 얼마나 걸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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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배를 탔고 선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한 명은 멀티로 일하고 한 명은 자기 일만 하겠다고 주장한다면 그 배가 험난한 파도를 잘 헤쳐 나갈 가능성은 적다.

공감합니다.

곰돌이가 @eversloth님의 소중한 댓글에 $0.016을 보팅해서 $0.007을 살려드리고 가요. 곰돌이가 지금까지 총 5314번 $59.299을 보팅해서 $67.606을 구했습니다. @gomdory 곰도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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